- 최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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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끼들은 매년 여행을 한번 간다.
추모제 때, 마지막에 불렀던 [지금 우리는] 노래도, 제목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유끼들과 제주도 여행에 갔을 때 불렀더니, 이선형 연구원이 제주도 풀무질 서점에서 산
박준 시인의 시에서 차용하여, 멋진 이름을 지어 주었다.
여행과는 별도로 일년에 한번 정도는 상현이하고 진철이를 만나러 전주에 간다.
남자 셋이서 무신 재미가 있다고....가는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암튼 간다.
만나서 특별한 건 없다. 쓰잘데 없이 농이나 하고, 막걸리나 한잔 하고 다음날 서울에 다시 온다.
작년에 박미옥 연구원이 하는 [조셉 켐벨 느린독서회] 활동을 함께 하면서
4주차 과제로 전주에 가서 놀았던 이야기를 에세이로 썼었다.
개인 블로그에 썼던 내용을 굳이 변경연 홈피에 올리는 이유는,
진철이가 이번에 새로 출간한 책이 너무 섹시해서다.
사람들은 진철이를 잘 모른다. 그런데 알게 되면 아마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쿵 저러쿵 어떤 인간인지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혼자 노포 맛집을 즐기면 그만일 뿐이다. 라고 생각하지만
이번 책은 직접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에세이인데...
내 생각엔 그동안 진철이가 쓴 글 중, 가장 섹쉬하다.
많은 이들이 봐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글을 올려 본다.
문득, 스승의 날에 글을 올릴 수 있어 다행. 이라는 생각도 든다
제목 : 다큐 3일 (22.09.27)
9월23일 금요일
오전에 9월 급여가 들어왔다. 급여일인 25일이 주말이라 오늘 들어온 것이다. ‘오호 몸에 텐션이 올라간다.’
직업이 주는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인생이나 생활에서 우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익숙한 일에 몰두함으로써 현실의 문제가 초래하는 압박감과 근심에서 물러서 있을 수 있다. 때로는 기분좋은 피로와 이런 보수까지 선물해준다.
물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이어가는 일상은 일탈과 여행을 꿈꾸게 한다. 전주에 사는 진철이(연구원)와 만나 (한달 전 약속했던) 저녁 먹고 다음날 집에 오는 가벼운 1박2일의 여정이지만, 떠남 자체가 내게는 쉽지 않은 스케쥴이라 내게는 늘 설레는 여행이다. 오후에 반차를 내고 상현이(연구원)와 함께 진철이를 만나러 전주에 가는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느긋한 여행자에게 기차가 달려가는 곳은 어떤 행선지가 아니다. 기차는 늘 시간 속을 달린다.
-떠남과 만남. 구본형 -
고속버스 터미널 역에서 전주까지 3시간, 우등 버스를 타고 편안한 등받이에 기대어, 느린 독서의 시간으로 달려갔다. 30년 전 첫 직장을 다닐때의 생각, 그때의 기억들. 그 이후의 많은 사건들... 미래의 장례식장으로 데리고 가기도 한다. 두려움을 뛰어넘었던 ‘모험’의 시간들을 생각해보니, 병원으로 이직을 한 것도, 변경연 연구원이 되어 내 삶을 탐구한 것도 아주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앞으로 어떤 모험을 해볼까? 어떤 두려움을 뛰어넘을까. 당분간 화두가 될 좋은 생각거리가 생겼다.
음악을 밥벌이로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재능과, 의지, 운의 3박자가 맞아서 로또복권 같은 삶을 산다면야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생계수단으로 음악을 해야 한다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프로가 될 자신이 없다. 내 안의 감정선이 흔들려서, 통증이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쳐서 노래를 만든 직후,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분출되고, 그 순간 시간은 정지한 것 같고, 날아다니는 음표로 가득한 그 공간의 기쁨을 다시 못 만날 것 같다. 그럼 어떤 모험을 할 것인가? 글쎄 생각해 볼일이다.
전주는 가맥이다. 전일슈퍼에 가니 오후 4시. 진철이가 맥주와 황태, 갑오징어를 시켰다.
“형. 요기는 배부르게 먹음 안디여.. 2차가 있당께...”
나는 전주가 좋다. 왜 좋은지는 몰라. 그냥 촉을 따라 사는 인생이니 합리적, 과학적 추론은 사절.
정년퇴직하면 전주에 내려와 살고 싶다는 생각도 잠깐 했다.
아마 진철이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햇살 좋은 금요일 오후, 이 시간에 노포 느낌나는 허름한 슈퍼에서 시원한 맥주와
잘 구워진 황태, 갑오징어를 씹어먹으니 행복하다. 음.. 역시 술은 낮술이지...
‘낮술’과 ‘건달’은 불량하지만 내게는 자유의 언어들이었다.
캠벨을 읽으며 그에게 깊이 천착했던 구본형이라는 사람을 생각했다. 스승은 부드러우나 엄격했다. 웃음은 따뜻했고 다정했으나 자신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절제가 강한 분이었다. 그는 스승(길현모 선생)을 닮고 싶어 했고,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다. 자신이 말한 대로, 날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자신의 시간을 쓰고 싶은 곳에 배분하며 살았고, 일의 가치가 빛나는 일을 하며, 제자들을 양성하고 스스로의 삶을 즐겼다. 일상의 황홀을 느끼며, 삶이 기뻐하는 삶. 삶 자체가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삶을 스스로 살았다.
나는 얼간이가 될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인생이다. 산다는 것이 바로 목적이다. 인생이 전부 경제와 경영일 수는 없다. 사랑도 해야 하고 눈물도 흘려야 한다. 순수한 배움 자체는 즐거운 것이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식이 중요하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활동적이다. 철저하게 혼자 있을 때 가장 고독하지 않다. ~ 나를 위해 아낌 없이 시간을 쓸 예정이다. 햇빛이 들과 밭에 내리듯이. 산과 강과 바다에 쾅쾅 쏟아지듯이. 거기에 무슨 효율이 있는가?
그분을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그분처럼 살 자신은 없다.
그냥 대충 내 멋대로 살 것이다.
나는 재미있고 남은 행복하게.
일상에 음악이 있으면 흡족하다.
나는 그런 여행을 하고 싶다. 계획도 목적지도 없다.
발길 닿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혹은 기억을 따라서
혹은 그저 기대를 따라서, 혹은 꽃을 따라서 강물을 따라서.
얼큰하게 취한 몸, 전주천을 따라 걷고, 진철이의 구수한 안내를 들으며 시내를 이리저리 걸으며, 김태리가 나왔던 드라마 장소에 가기도 하고, 오줌이 마려우면 대충 길가에서 남자 셋이 허리춤을 내렸다. 전동 성당을 들러 잠시 기도를 하고, 한옥마을을 걷다가 비어있는 한옥을 발견했다. 평상 마루에 앉아, 진철이에게 시켜서 가지고 온 기타로 분위기에 어울리는 노래 두 곡을 불렀다.
김영동의 ‘어디로 갈거나’
송창식의 ‘침묵을 듣는 이여’
화성시에서 환경운동 연합인가(이름은 잊어먹었네...) 대표를 하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환경부 사표를 내고 귀향한 진철이를 위로하러 가자고, 상현이가 꼬셔서 갔는데, 만나보니, 전혀 위로할 필요가 없다. “난 너무 좋은데 왜 온겨?” 걍 전주에서 위로를 받고 가라고 한다. 이건, 심심해서 놀거리를 찾던 상현이의 수작이 분명하다.
할 수 없이 스스로를 위한 위로송 노래를 불렀는데,
아..내가 노래에 취한다.
솔직히, 난 너무 노래를 잘 한다.
아. 이런 노래를 부르면 막걸리를 마시러 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막걸리가 있는 ‘천년의 봄’으로 갔다. 식당은 왁자지껄 하다. 금요일 저녁 손님들은 많았고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술은 멀리있는 것들을 당겨온다. 지나간 과거들이 소환되고, 웃고 떠들고 즐거워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렇게, 보내고 싶었던 시간을 보냈다.
휴식은 자신에게 선사하는 따뜻한 시간이다. 자신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겠는가? 왜 우리는 늘 바쁘고 또 다른 사람을 바쁘게 하는가? 바쁜 사람은 바보다. 자신을 괴롭히고 남을 못살게 할 뿐이다. 휴식이 게으름이나 소비로 느껴지지 않을 때, 한 사회가 이에 진심으로 공감할 때, 우리는 훨씬 나아진 사회에 살게 된다. 우리가 좀더 나은 사람(a better person)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긍정적 변화인 것이다.
9월 24일(토)
숙소는 상현이가 미리 예약해 두었다. 전주 세계소리축제? 인가 하는 공식숙소 호텔이었는데,, 이름은 잊어먹었다.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알아서 나오는 에어컨 바람 탓인지 오랜만에 많이 마신 탓인지 컨디션이 좋지 않다. 얼른 전주 콩나물 국밥을 먹으러 ‘왱이집’으로 갔다. 몇 년만에 간 국밥집은 주차장이 넓어졌다. 전주맛집으로 소문나 넘쳐나는 손님을 받기 위한 것 같았다. 국밥 맛은 변치 않았지만 너무 기업화 된 것 같아 왠지 아쉬웠다.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에게 가도록 빨리 집으로 와달라는 아버지 전화를 받았다. 국밥을 먹고 오전에 하는 커피집을 찾아 커피숍 3층으로 갔다. 전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았다. 짧은 하루밤을 아쉬워 한 채로 전주 고속터미널에 갔더니 영풍문고가 있었다. 오랜만에 서점에 가서 책을 구경했다.
한 사람 한사람의 욕망과, 땀과, 삶이 켜켜이 쌓여진 책들....
책들을 구경하다 차를 놓칠 뻔 했다. 부리나케 서울로 오는 고속버스에 탑승했다.
버스 안에서 계속 콧물이 흐른다. 서울로 가는 버스는 막혔다.
빨리 집에 가서 감기약을 먹고 푹 자고 싶었다.
여행은 자유다. 그리고 일상은 우리가 매여 있는 질서다.
질서에 지치면 자유를 찾아 떠나고 자유에 지치면 다시 질서로 되돌아온다.
떠날 수 있기 때문에 일상에 매여 있는 우리에게 여행은 늘 매력적인 것이며,
되돌아 올 수 있기 때문에 비장하지 않다.
저녁 6시. 전주에서 1시에 출발했는데 5시간 만에 도착했다. 씻고, 이불을 깔고 감기약을 먹고 누웠다. 편안하고 포근했다. 지난 주 작업한 바닥장판이 고실고실하고 까끌까끌하여 감촉이 아주 좋았다. 따뜻한 느낌을 주는 수면등을 켜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밤 10시. 잠에서 깨어났다. 감기는 나아졌고, 내일은 당직이므로 출근 준비를 했다. 하는 김에 분리 수거, 설거지, 그릇 정리도 하고 이것저것 눈에 닿는 일들...을 했다.
다시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면서 뜬금없이, 바라는 것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대로 좋다, 더 나아지면 더 좋고, 나빠지면 할 수 없다.”
9월 25일(일)
휴일 당직은 기분이 좋다.
운동화를 신고 청바지를 입고 출근한다. 차를 가지고 출근하기에, 라디오를 틀고 마음껏 음악을 들으며 갈 수 있다. 휴일 아침 도로는 시원하게 뚫려있고, 아침바람은 상쾌하다. 양희은의 가을아침, 노래를 아이유가 담백하게 리메이크했다. 덕분에 출근길이 가을가을하다. 같은 일을 하러 가는데, 이렇게 차이가 있는 걸 보면, 역시 마음이 모든 것인가. 보다.
일요일 오전 당직은 여유로와서 딴짓을 하기 좋다. 천천히 가는 삶에 대해 생각을 하다가, 감수성을 높이는 활동, 최소한의 삶 등, 3주차 과제 댓글에 대한 답을 달았다. 생각을 정리해서 답을 달면, 다시 한번 질문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다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바쁜 오후가 끝나고 퇴근하는데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고기 먹고 싶다고...
그래.. 목요일 저녁에 먹은 고기는 기억이 안나겠지...고기 좀 먹자.....단골 정육점으로 차를 몰았다. 이분은 젊어 보이시고 서글서글하고 목소리도 좋고 친철하신데, 재미있는 건, 늘 사극만 보고 계신다. 대장금, 주몽 등 지나간 사극들을 늘 틀어놓고 보시며 고기를 파신다. “사극이 그렇게 좋으시냐?”고 물었더니, “요즘 드라마는 정신없어서 못 봐요, 사극이 좋죠.”라고 하신다.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영혼, 타샤 튜더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맞아요. 요즘은 정신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카모마일 차를 마시며 개똥지바퀴의 노래를 들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생삼겹 한근, 도축하는 사람들이 뒤로 빼서 먹는다는 뒷고기 한근을 사서 마늘, 김치, 파채와 함께 제법 맛나게 구워먹었다. 아내도 맛있다고 한다. 설거지가 끝나고 잠을 청할까 하는데, 자꾸 욕실이 걸린다. 화장실 청소방법을 유튜브에서 배워뒀는데, 몸이 피곤도 하고 내일이 월요일인데 청소를 할까 말까, 내일 저녁에 할까 고민하다가 “에라 하자”... 욕실청소를 시작했다. 과탄산소다, 베이킹 소다, 세제, 스퀴지, 칼 헤라 등등 청소도구를 준비해서 레시피에 적은대로 실시해보니 대략 한시간 정도가 걸렸다. 깨끗해진 공간을 보니 마음이 좋다. 나른하고 기분좋은 잠이 몰려온다.
아무것도 아닌 날,
특별할 것 없는 날
어제도 오늘도 지속되는 평범한 날이 위대하다.
‘꿈’을 읽어 본다.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담담하고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적게 쓰며
천천히 걷고, 천천히 읽고, 천천히 말하며
내가 웃고, 가족이 웃고, 세상이 웃는 것.
마음에 든다.
바람대로 살 수 있으면 좋고,
안되면 어쩔 수 없다.
인생은 길이다.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길 그 자체다. 마음이 모질고 팍팍하여 한 그루의 나무도 자라지 못하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천촌리의 길처럼 솔잎이 깔려 있고 동백나무 우거진 아름다운 길일 수도 있다. 나도 인생의 어느 부분인가에 솔잎이 깔리고 주위에 꽃이 가득한 그런 부드럽고 포근한 길이고 싶다. 돌 밖에 없는 길, 한 그루의 나무도 없어 뜨거운 햇볕에 머리가 벗겨질 것 같은 황막한 길, 파이고 강퍅한 길, 그런 길이고 싶지는 않다. 아름다운 나무 가득하고 옆으로 작은 시내 하나 흐르는 그런 길이었으면 한다.
나라고 사내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남자 셋의 여행에 설렘을 감출 수 없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時耕(시경)'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둘은 탁월한 시간의 농부들이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에 그들은 유독 고유의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각자의 소화기관을 건너뛰지 않고 하나하나 거친 것이기에 단번에 누구의 것인지 알아챌 수 있다. 입에서 식도, 식도에서 위와 소장/대장으로 이어지는 동안 때론 서두를 법도 한데, 그들은 그러지 않는다. 뜨겁고, 맵고, 상한 시간이 내장의 상피세포를 사정없이 후벼도, 그들은 식재료가 그들의 시간으로 거듭나 최후의 얼굴을 비추기까지 기다리고 기다린다. 바람이 불고, 노을이 질 무렵 그들의 그림자가 서성이는 내 발 앞에서 너울거리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생이 그 때 속삭였다면, "너는 섬이며, 섬을 아우른 바다"라고 했을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