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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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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4월 2일 21시 31분 등록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좋지만 꿈에서 깨어나는 것은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언제나 꿈을 간직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꿈이 있다는 것, 아름다운 꿈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지 모른다. 인간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도 꿈을 지닌 사람은 절망할 줄 모른다. 언제나 푸른 꿈을 지닌 사람은 아무리 험하고 먼 길을 갈지라도 지칠 줄도 모르고 외로운 줄도 모른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는데, 절망이란 꿈이 깨진 것을 말한다. 꿈은 언제나 깨지지 않아야 한다. 현실에 부딫혀 깨즌 꿈은 참 꿈이 아니다. 참 꿈은 언제나 영원에 뿌리를 박고 현실을 넘어서야 한다. 어떠한 현실이 닥쳐와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꿈을 지녀야 한다. 개인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고 인류도 그렇다. 꿈의 세계는 자유의 세계이다. 아무리 꼼짝못하는 사람도 꿈속에서는 완전히 자유롭게 날 수 있다. 꿈은 모든 소망의 근원이요, 모든 상상력의 근원이기도 하다. 모든 종교는 꿈을 안겨주고 길러주고 지켜준다. 모든 전통도 꿈을 안겨주고 길러주고 지켜준다. 전통의 단절은 꿈의 단절이요, 종교의 부재는 꿈의 부재다. 어린이들의 꿈은 아득한 옛날부터 시작되었을 지도 모른다. 동화의 기원은 신화인지도 모르고 신화의 기원은 옛조상 나름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어린애 같은 순진성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생명의 원동력이요 상상의 근원이기도 하다 장자는 '참만고參萬古일성순一成純'이라고 표현했다.
하류의 물이 아무리 흐려도 산간에서는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이 아무리 탁해졋다고 해도 우리의 상상력, 우리의 꿈은 언제나 파랑새처럼 하늘을 날아야 한다. 근대인들이 언제나 가지고 다닐수있는 가장 큰 보배인 꿈을 살려낼수있는가 없는가에 근대사람의 생명이 달려있다. 꿈을 가진다는 것은 생명의 풍성함을 가진다는 말이요 상상력의 풍성함을 가진다는 말이다. 상상의 끊임없는 분출이 모든 문화의 근원이기도 하다. 상상력을 가진다는 것은 세계를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다. 아무리 싱성과 개념의 힘이 강해도 그것에 복종하지 않는 더 큰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상상력을 통해서 무한을 가지고 있다. 이무한을 놓칠때에 인간은 유한이되고 흙덩이가 되고 기계가되고 짐승이 된다. 인간은 무한을 가져야 한다. 그 무한 속에 모든 만물을 집어넣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것들로 하여금 질서 정연하게 돌아가게 하여야 한다. 사람은 상상력을 통하여 자기의 우주를 창조해간다. 문학, 미악, 심리학, 철학, 종교뿐만 아니라 인간의 일체 활동이 창작의 활동이다. 인간은 창작속에서 기쁨을 느낀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상력의 세께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상징의 세계이다. 이성과 개념으로 어떻게 할수없는영원, 무한의 별 바다를 인간은 상징을 통해서 아름답게 나타낼수있다. 창조의 세계는 그대로 상상의 세계요, 상상의 핵심은 상징이기도하다. 상징과 신화의 세계는 까마득히 먼 저쪽으로부터 비추어온다. 그것은 이 우주에 사는 어떤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역사적 조건 뿐만 아니라 역사를 넘어서는 더 넓은 상황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역사적 상황에 지쳤을 때는 곧 역사적 현재로부터 떠나야 한다. 그는 좋은 음악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아름다운 그림이나 자연에서 역사적 현실을 잊어야 하고, 사랑과 기도와 의식 속에서 영원한 현재를 되찾아야 한다. 그는 문학을 들추고 연극을 감상하면서 자기 무의식 세계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의식은 깨면 깰수록 자기 자신의 역사성을 넘어서 무의식의 세계로 날개를 펼쳐간다.
모든 시대의 현자들이 역사를 넘어서는 깊은 명상에서 구원을 찾고 있다. 인간이 무한을 찾고 허공을 찾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안주하기 위한 집을 찾는데 불화하다. 넓직한 대청에 뒤주를 놓고 찬장을 놓으려는 주부의 마음과도 같다. 무한한 공간이없으면 어디에다 삼라만상을 배치해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 무한 속에 배치된 삼라만상이야말로 그대로 하나의 아름다운 상징인 것이다. 고요한 밤에 시계소리가 밤의 정적을 드러내고 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푸르름을 드러내듯이 웅장한 밤하늘의 별자리는 우주의 무한함을 드러내준다. 상징은 무한이 유한이 된 것이요 꿈이 육신이 된것이다.
무한에 통하는 길은 오로지 상징을 통한 상상력의 세계가 있을뿐이다. 무한을 그리는 인간이 마음은 언제나 고향을 그리는 마음으로 표현되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향수를 지워버릴 수있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랫동안 사람은 무한을 향해서 날아오르고자 했다. 꿈속이나 생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천사러럼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꿈을 꾸었는지 모른다. 그들의 무한은 끝없이 먼 하늘을 날아 올라간 곳에 있기도 하고, 한없이 높은 산꼭대기에 자리잡기도 한다. 그들은 천국을 그리면서 동시에 지사으이 낙원을 그리고 심지어는 먼 바다 속의 꿈나라 섬을 그리기도 한다. 인간이 비행기를 발명하고 배를 만들어서 먼 황금의 섬을 찾아간 것은 아득한 옛날 일이 아니라 근세의 일이다.
꿈은 언제나 의속이 아닌 무의식 속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심층 심리학의 도움 없이도 시인의 꿈속에서 얼마든지 찾아 낼 수 있다. 가장 생기가 없는존재 속에도 언제나 상징과 꿈이 깃들여 있다. 세상에서 가장 기계적인 인간마저도 그들나름데로 꿈은 있는 법이다. 아무리 기계 문명이 발달되어도 인간의 마음속에서 꿈이 사라지고 상상이 사라지는 날은 없을 것이다. 낙원에 대한 향수는 기계문명속에서도 영화와 음악을 통해서 계속되어갈 것이다. 사람은 현실에서 얻지 못한 것을 이상 속에서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새로운 이상을 창조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가 이렇게 오랫동안 인류의 역사를 지배해오고 있는것은 인간의 창조성 때문이다. 인간에게 창조성이 없었다면 인간은 하나의 기계적 반복만을 계속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있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이상적인 것이요 상징적인 것이다.
고향에 대한 향수, 낙원에대한 향수, 이러한 향수가 중요한거은 그것을 체험한 주체가 그것을 말로는 표현할 수없기 때문이다. 말로 편현할수없기 때문에 그들은 쓸 수밖에 없엇다. 그런데 그 상징마저도 현대에 와서는 자꾸 퇴색해가고 있다. 실낙우너의 신화가 현대인에게느 하나의 백일몽으로 타락하여, 그들은 천상으로의 향수를 대도시 됫골목에서 잦아 헤매고 잇는 지도 모른다. 그들의 꿈이 아무리 저속할지라도 그 꿈 없이는 다시 새로운 꿈이 일어날 길이 없다. 그 지저분한 길거리에서 흩어진 꿈을 다시 주어 모아 우리는 새로운 꿈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비록 피비린내 나는 참호 속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상상력을 짓눌러버릴 수는 없다. 자신 속에 있는 꿈을 다시 살려내기 위하여 현대인은 상징의 세계를 다시 한번 더듬어 보아야 한다. 옛날 아득한 태고 때의 원시적 상징도 인류의 우주적인 상징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떤 상징이든 간에 그것은 인간이 무한의 휴한, 말씀의 육화, 꿈의 휵화, 신의 화신임을 증거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의 고귀성을 회복할수 있으며 다시 거룩한 공간의 샘물을 마실 수 있다. 그들에게는 하늘로 치솟는 산도 나무도 굴뚝도, 일체가 영원을 지향하는 손가락으로 의미를 가져다 줄것이며 인간 자신도 하늘을 향한 하나의 손가락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인간 자신이 하나의 영원을 향하는 나무요 영원을 드러내는 상징이요 꿈의 표현이요 꿈틀거림일진대, 이러한 꿈틀거림 없이 어뗳게 인간의 사명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무한을 안은 자로서 언제나 불멸이며 언제나 불사이기 때문에 하늘과 사귀고 신과 통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때 인간의 이성은 감성의 품에 안겨서 영원한 꿈을 품은 채 이세상에서 완전한 통일을 이루어 살고있었다. 쉴새없이 흘러 나오는 시와 신화의 시냇가에서 씨를 뿌리고 오월이 되면 시골 아가씨들이 꽃수래를 타고 동리를 맴돌고, 햇살 밑에서 보리를 배면서 민요를 불렀다. 가을이 오면 축제와추수의 농악이 산과 들에 메아리쳤으며, 경울이 되면 화롯가에 앉아 짚신을 삼으면서 노래를 주고받고, 옛날 그 옛날의 이야기들로 어린애들의 꿈도 자라고 있었다. 산이나 들이나 나무나 집이나 일체가 흰 눈에 덮이듯이 그들은 깊은 잠 속에서 아름다운 꿈을 꾸며, 밝아오는 새날을 위해 깊은 안식을 취했다.
세익스피어의 말대로 인간은 모두 꿈과 같은 재료로 지음을 받아서 그럴까. 프랑스의어떤 학자가 꿈은 원시인의 진정한 신이었다고 말했듯이 꿈은 결코 정신의 배수구를 통해서 쏟아져 나오는 고단한 마음의 노폐물이 아니라 최초의 가장 근원적인, 영원한 의미의 顯現(현현)임에 틀림이 없다. 꿈은 신의 옷이요 영원의 상징이요 영원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인지도 모른다. 잠은 깨어도 좋지만 꿈만은 영원히 잃고 싶지않은 것이 모든 사람의 심정일것이다.
생각없는 생각 - 김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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