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춤추는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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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탐험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모든 탐험의 끝은 내가 출발했던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네
내가 나 자신을 연구하지 않으면 다른 자들이 나를 연구 한다네
“춤추는 별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카오스를 품어야 한다.”
춤추는별, 10년 회고(2023-2033)
직업과 일상 그리고 나, 2033년에 돌아 본 10년
나는 기대한다. 이 세상 열심히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날, 그들의 삶의 길목에서 만난 목소리, ‘나는 과연 누구인가?’ ‘내 삶에 참 기쁨이 있는가?“ 라는 벼락 같은 질문에...
바람결에 촛불처럼 마음이 흔들리고, 무언가 자신의 인생이 잘못되었다는 불만족감에 삶의 행보를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다시 한 발 앞으로 내딛고 다시 걸어 나아갈 수 있기를... 그래서 그들의 인생이 원래 되기로 했던 그 모습(소울 코드) 그대로, 한 송이 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나 절정으로 만개하는 그 순간, 그 자리에 함께 있고 싶다. 이것이 내 오랜 공부와 일이 내게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풍광이다. 나는 내 삶의 기쁨과 만족을 찾아내고, 사람들이 자기 안의 영웅을 찾아가는 그 여정에 함께하는 <나>연구자, 꿈벗으로서 살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직업관:
나는 일을 즐긴다. 나는 일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사람으로 태어났다. 일은 내가 가진 재능과 기질, 경험을 활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돕는 가장 효과적인 통로이자 수단이다. 나는 나를 가장 나 답게 하며 가슴 뛰게 하고 아랫배를 따뜻하게 데우는 일을 찾아 그 일을 즐기리라. 내게 일은 놀이며, 명상이며, 기도이며, 친교이며, 공헌이다.
그 일이 내 일인지 알 수 있는 세 가지 기준
1.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아랫배가 따뜻해지며, 빙그레 입꼬리가 올라가며 미소가 떠올라야 한다.(나의 본능적 욕망)
2.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자타 공인 잘하는 것)
3. 가장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매일 해도 지겹지 않아야 한다.)
직업인으로서 나의 차별성
감정의 경험을 통해 인생의 비의를 찾아가는 <나>연구자, 꿈벗
- 작가 / 마인드코치 / 여행작가 / 인플루언서 / 오디오 크리에이터
내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자산(기질, 재능, 경험...)
- 인문학적 감수성(카오스를 품고 살아가는 정신적 유연성)
- 심리학 관점(허용하는, 이해하는)
- 영성적 감수성(수용하는)
- 문학적 감수성(느끼고 표현하는)
- 예술적 감수성(이면의 본질을 알아보는)
- 운명학, 수비학, 카발라 등의 신비주의 경험과 지식
- 무엇이든지 말과 글로 표현하는 기술
- 학습공동체 경험
- 경험수집가적 기질: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새롭게 시도하기를 즐기는 기질
- 군 복무, 간호계 30여년 커리어(사회복지, 정책, 대외, 교육평가, 경영기획, 관리)
- 인내와 수용, 포기하지 않은 의지력, 추진력
- 회사에서 주로 新사업 셋팅, 新제도 도입, 용병술. 협상력, 문제해결력
가장 중요한 자기관리 원칙에 대하여
나는 회사에서 일하는 내내 주인으로서 일했다. 조직생활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삶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스스로 그 의미를 부여하고 선택한 삶이었기에 최선을 다했다. 어릴 때는 인내로 버티는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점차 나이가 들어가며 진실로 즐길 수 있었다. 그것을 부정할 정도로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나는 다른 사람이 내 운명을 컨트롤 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에 조용히 거부하였다. 분노하고 싸우는 그런 화끈한 방식은 아니었지만, 나만의 서늘한 거리두기로 나름의 자유를 누리며,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조직생활의 경계를 지켜내고자 투쟁했다.
나는 경제적 자립을 이룰 정도의 수입만 취하고 그 이상의 돈을 벌기 위해 나를 소모하지 않았다. 특히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것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책을 구입하고, 세미나에 참석하고,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선사하는 모든 기회에 아낌없이 후회없이 투신하였다.
그리하여 내 나이 쉰에서 예순 살로 향한, 지난 10년은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가득 채운 나날이었다. 내 삶은 자기SELF를 찾아 포기하지 않는 열정의 힘으로 정진해 온 구도자의 삶이었다. 끝내는 진정한 나를 조우하고야 만 예술 그 자체의 삶이었다.
내 묘비명
그녀는 삶 자체가 ART인 사람, 세상의 모든 감정에서 지혜를 얻고자 했던 구도자였다.
10대 풍광
1. 나는 블로그와 브런치에 축적한 글들을 모아 모두 3권의 책을 썼다. 먼저 전자책 형태로 SNS에서 선보이는 선행적인 과정을 통해 종이책으로 출간했다. 물론 출간은 내가 운영하는 독립출판사에서 했고, SNS 플랫폼과(메타버스 공간을 포함한) 동네서점을 중심으로 판매 했다. 나는 결코 베스트셀러를 원하지 않았다. 다만, 나처럼 <나>를 연구하고 실험하는 모든 구도자들에게 내가 쌓은 지식과 경험, 지혜를 나누고 싶을 뿐이었다. 내게 모든 것은 놀이였기에... 책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 <나> 연구 에세이(2025.12)
- <나> 연구 성장심리소설(2028.12)
- <나> 연구 시(2032.12)
2. 학습공동체 <신비서가> 운영(2023~)
- 휴 休 HUE 프로젝트, 회원제 북클럽 운영
(회사에 다니는 동안은 블로그와, 메타버스 속 온라인에서 활동, 2031년 정년퇴직 후, 오프라인으로)
3. 나는 회사생활과 병행하여야 했기에 매년은 아니지만, 적어도 2년에 한 번은 세계 문명을 탐색하는 7일간의 세계여행을 즐기며 내면 뿐 아니라, 감각적인 경험치를 확장했다.(2024~2030)
- 몽골 초원의 별 빛 쏟아지는 고원에서의 야영(2024): 내 인생 선배, 남편과 함께
- 네팔 포카라 또는 산티아고 순례길 트래킹(2026): 혼자, 회사에 남을 것인가를 다시 제고함
- 그리스, 로마 서유럽 가톨릭 성지 기행(2028): 내 인생 선배, 남편과 함께
- 체코, 폴란드 등 동유럽 도시 여행(2030): 내 보물, 딸과 함께
- 영국, 프랑스 등 미술관 관람 여행(2032): 내 인생 선배, 남편과 함께
4. (2026)나는 혼자서 13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여행을 다녀왔다. 걸으면서 나는 끊임없이 나를 비워내고 흘려보내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리고 인생 제 2막의 문을 이제는, 드디어 이 시점에서 열어야 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했다. 30년 커리어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알아내고 궁극적으로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언제나 그러해왔듯이 가장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했고, 가장 <나>다운 답을 찾아냈다. 그날의 결정이 있었기에 지금 나는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그 날의 선택에 대해 가끔 돌이켜 떠올리면 조금의 아쉬움(가지 않은 길에 대한 낭만적 감정)이 남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진실이다.
5. (2027~)<나> 연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소규모 모임 <신비한, 월간살롱>을 개업했다. 격월 온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정기적인 네트워킹을 이어나갔다. 2~3년에 한 번 '여자의 일생'에 대한 극본을 쓰고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어 모노드라마를 무대에 올려왔다. 2033년, 올해는 10년 전 포항에서 비로서 진짜 시작 된 52살 여자, <나>의 삶을 드라마로 올릴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6. 50대, 여성의 몸은 무너지고 빛 바래지기 쉬운 나이라고 했지만, 지난 10년 동안 나는 내 몸을 더 아름답고 건강하게 돌보았다. 매일의 짧은 러닝과 정기적인 걷기로 몸을 가볍게 유지했다. 언제나 마음 한켠에 사라지지 않고 살아있던 숨은 열망, 내가 상상하는 나만의 옷과 액서서리를 만들어 스스로 입고 선보이며, 원하는 이들과 공유했다. 작년에는 정년 1주년 기념으로 대관령에 숲 속 패션쇼를 열었다. 물론 내가 운영하고 있던 <신비한 월간 살롱> 주관 행사였다. 이때 스스로 모델이 되어 런웨이를 걸었다. 이때 나를 쵤영한 영상은 유튜브 소트에 공개되어 유례없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제목은 “60대가 이렇게 아름답다고! 리얼??”, 태그는 이렇게 달렸다. #아름다운60대, #춤추는별도로시처럼 #60-17=43살의비밀(이때는 특수기호도 태그로 들어갈 수 있기를 기대하며)
7. 우리 부부는 사이좋고 행복한 친구처럼 지냈다. 서로에게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때로는 전장 같은 삶의 한복판을 함께 행군하는 전우애를 느끼기도 했다. 우리는 둘이 함께할 때, 혼자일 때보다 더 깊은 충만감을 느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20년 전, 대관령에 마련해 둔 세컨하우스에 주 3일간은 묵으며 함께 산행을 즐기고 맛있는 음식과 여유로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남편은 본인이 원하는대로 수입 파이프라인을 완성하여 완전한 경제적 자유를 이루었다. 딸은 원하는 대로 온라인 미디어컨텐츠 회사인 카카오페이지에 들어가서 10년간 재밌게 회사 경력을 쌓고 최근 내 조언대로 자기 회사를 창업하여 독립했다.
8. 아름다운 정년퇴직(2031)
나는 등에 짊어진 십자가처럼 끌고 온 장장 35년 간의 오랜 직장생활을 마치고 지인들을 초대한 나만의 정년퇴임식을 열었다. 장소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 2년 전부터 조용히 준비해 온 강원도 고성의 바닷가가 보이는 <나만의 연보랏 빛 방>이다. 나는 여기서 조직생활의 문을 닫고, 인디워커로서 새로운 문을 열었다. 내게 직장생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같은 것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고통스러움을 알았지만, 자신의 사명임을 인정하고 기꺼이 겟세마네 동산을 올랐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리스도교는 일개 민담이 아닌 종교가 되었다. 물론 내가 무언가를 입증하기 위해 이 삶을 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직생활은 <나>라는 개인의 삶을 그저그런 인생이 아니라 레전드로, 영웅의 여정으로 꽃 피워준 준 고귀한 십자가였다. 나는 오랜 세월, 이것이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성찰했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나>연구를 이어가게 하는 힘이었고, 결국은 춤추는별로 떠오르게 하였다.
9. (2032~)강원도 고성의 바닷가 언덕에 나의 작업실이자 상담실을 열었다. 연보라 빛의 시크릿하고 프라이빗한 <나만의 방> 이었다. 여기서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오디오 컨텐츠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상담했다. 내게 상담은 일이 아니라, 놀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가벼운 즐김만은 아니란 걸 말해두고 싶다. 놀이는 가장 고귀한 형태의 일하는 자세이다. 그리고 대관령 시내에는 독립서점, <신비한 나의 서가로>를 운영했다. 북 테라피와 다양한 <나>연구 프로젝트를 열었다. 가끔은 삶에 대해 질문하고 <나>를 연구하는 커뮤니티에서 발견한 신박한 외부 강연자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세상에 없는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만들어내고 함께 향유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10. (2032~)나는 바닷가와 숲 등을 무대 삼아, 중년 여성의 해방을 위한<조르바처럼>과 청년여성의 독립을 위한<디파잉그래비티>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했다. 춤과 음악이 함께하는 정기적인 파티를 열었다. 이 프로그램은 자주, 이 바닥 고수들이 인정하고 추천하는 가장 좋은 프로그램으로 정평이 났다. 자주 그들의 SNS와 커뮤니티에 소개되었다. 입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내가 운영하는 모든 프로그램은 회원제로 운영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내가 주는 밥이(예를 들어...) 모든 사람에게 소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느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