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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8일 18시 48분 등록
영웅을 흠모하다



최근에 지인으로부터 받은 편지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소개합니다.

인도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영국은 많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인도인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마을을 보존했답니다.”
하지만 그들의 속내는 대략 이런 것이었다.
“아이고. 그곳이 얼마나 더러운데. 차라리 저 옆에 넓고 큼직한 우리 동네를 만들자. 어차피 우린 이곳에서 가져갈 것만 가져가면 된다.”
한국사람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영국은 역시 신사나라야. 인도를 위해 그곳에 왔던 영국인들은 그들의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어.”
라고 떠들어댄다. 왜냐하면, 우리 머릿속에 고정된 영국의 우월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세상은 ‘오해’ 투성이지요? 몇 년 전, 한 지인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은 매트릭스 같아.” 저는 이 말을 잊어버리지도 않습니다. 순간,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거든요. “세계를 흐르는 절대 법칙, (캠벨의 표현을 빌리면)이 절대 에너지의 의인화가 사람들을 자궁(matrix) 안에 가두어 두고, 왜곡과 곡해의 요술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곰곰이 들여다 보면, 정말이지 본질은 심하게 뒤틀려서 짜그라져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괴물이 되어가고요.

“본질은 없고 인식만이 있을 뿐이다.” 허브 코헨이 <협상의 법칙>이란 책에서 한 말입니다. 그의 말은 일견 옳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지혜는 ‘인식의 강’을 넘어 ‘본질의 황금양털’(영웅 이아손의 전리품)을 차지하기엔 역부족일지 모릅니다. 그곳에는 왜곡의 불을 뿜는 용이 살고, 편견의 방망이를 휘두르는 도깨비가 지키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영웅의 이야기가 늘 상 그렇듯, 겸손의 날개를 단 요정, 따뜻한 마음가짐의 거북이, 묵시의 지팡이를 든 노파 따위의 조력자가 있는 법입니다. 이들은 오직 영웅의 홍익(弘益: 큰 이익, 널리 이로움)을 위해 존재하지요. 영웅에겐 본질이라는 ‘소명’이 주어졌고, 그는 의례, 신화적 익살로 잔뜩 무장하여, 신나는 모험을 헤쳐나가게 될 겁니다.

이야기인 즉 슨, 예부터 지각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강조했던 ‘태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본질로 떠나야 하는 모험이 아무리 캄캄하다 해도, 영웅이란 모름지기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 법이지요. 물론, ‘본질’이라는 것, 참 어렵습니다. 본질에 대한 탐구는, 바로 이를 탐구해야 하는 기관에 의해 매번 좌절 당하고 맙니다. 그 좌절의 색은 공허와 애매함과 어둠이지요. 그러나 영웅의 입문이 시련의 길이듯, 본질의 탐구는 저 에너지의 의인화가 쳐둔 일종의 시험입니다. 플롯(plot) 상, 극복될 수 밖에 없는 것들이지요. 중요한 것은 그저 태도인 셈입니다.

조셉 캠벨 같은 영웅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태도를 지닌 영웅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나는 의식인가, 아니면 의식을 나르는 수레인가? 나는 빛, 태양의 빛을 나르는 육체인가, 아니면 빛 그 자체인가?” 이렇게, 철저하게 본질을 공격합니다. 어떻습니까? 영웅의 도전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혹자는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지루해. 따분해.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본질 타령이야. 그런 건 신화학자나 철학자들에게 던져버리라고.” 사람들은 의외로(?) 본질, 진리 따위의 소재에 흥미가 없습니다. 이런 소재는 단순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사색에 동참하지 않으면 모호한 이야기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질을 탐구하면서 단순한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실체’는 복잡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를테면, 독서는 책을 펴서 글씨를 읽고, 내용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독서의 실체는 훨씬 복잡합니다. 책에 빛이 비취게 되면, 인쇄된 글자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각기 다른 형태의 빛을 반사하게 되고, 이것이 홍채를 통과해 망막에 맺히게 됩니다. 망막에 맺힌 각각의 상은 사전에 약속된 의미 있는 문자로 해석되어 뇌를 자극합니다. 이런 식의 해설은 복잡하긴 하지만 본질에 좀 더 다가선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아시는 바, 이것은 독서 실체의 지극한 일부분일 뿐이지요.

그렇습니다. 본질은 인식에 가리워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복잡해서 어떨 때는 본질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쉽게 지치고 이내 타협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본질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좀 달라야 하겠습니다. 본질과 인식의 조우 앞에서 양껏 소매를 걷어 부친 우리들은 이미 영웅일 테니까요.

물론 본질로의 모험은 생각보다 거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영웅 운운하며, 할랑한 것을 상상했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지요. 본질의 탐구는 집 앞 공원을 거니는 산책이나, 출장 중에 부담 없이 펼치는 추리소설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정치판의 당파싸움이나 종교인들의 고행(苦行) 같은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사색의 저편에서 길어 올린 한 구절의 시구이거나 무작정 떠나는 무전여행에서 만끽한 일탈의 향기 같은 것입니다. 영웅적으로 윤색한다면, 끝없이 펼쳐진 인식의 강을 건너, 황금 유람선을 타고 떠나는 판타지 같은 것이기도 하겠죠.

어제 그제는 사랑, 철학, 죽음 따위의 인생 필수품들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돈, 시간, 일 따위의 인생 소품들을 배열하느라 분주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필수품에 대해서는 지루해합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소품들의 주변을 맴돌더니, “내가 진짜 삶이다” 소리치며 갑자기 등장하는 인생 필수품들은 잔인하지요.

본질이 많이 뒤틀려 있다는 생각, 속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그 순간을 잊지 않으려 적어둡니다. 빼곡히 적고 나니, 조금은 나아집니다. 그래도 서글픈 것은, 이런 일이 큰 소용은 없을 거라는 것. 금방 또, 소품에 가리울 테니……

그리고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합니다. 영웅들은 좀 다를 텐데……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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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8.04.09 00:38:17 *.131.127.68
오지에 사는 사람들은
그 삶이 문명의 도시의 삶에 비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죠
문명의 도시 사람들은 오지의 삶을 보면서 묘한 감정을 느끼죠
불행해 보여야 하는데 불행하지않는 오지사람들을 보면서 말이죠...
거기서 본질과 만나는 것이 아닐까요?

인식을 통해서 본질을 생각하죠.
그러니 인식이 없으면 본질도 없죠

본질적인 것들은 본질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죠.
그것은 그 자체니까...

본질은 인식을 통해 이르지만 인식은 아니죠...

소품들로 인하여 필수품을 구별하게 됩니다.
필수품만 가진 사람들은 그것이 필수품인지 모르죠


빛은 외부로 부터 오기도 하고
내부로 부터 솟아 나기도 하지요

누군가 본 사람이 있다면
없는 것을 보지는 않았겠지요.

다만 못 보던 것을 보게 된 것 뿐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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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쟁이
2008.04.09 09:44:01 *.235.31.78
와! 시인이세요.

길게 늘인 제 글보다 훨씬 깊게 찌르시네요.

방패가 없어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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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
2008.04.09 14:50:35 *.75.127.219
인식만 있고 본질은 없다고요.
우리는 삶의 본질과 그 까닭도 모르고 그냥 살잔아요.

영웅이 별것입니까.
소크라테스는 물론 이것이 다는 아니지만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을 확실히 알고는 영웅이 되었지요.
누구나 주제파악만 분명히 되며는 이미 작은영웅이 아닐까요.

본질과 실체 그리고 인식도 어떤 범주의 것이냐가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힐 턴데 이를 잘 감당해 나갈 준비가 된자는
영웅시대에 입문되었다고 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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