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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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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3일 21시 33분 등록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반인들에게 가장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이슈화되고 있는 재무적 문제는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즉 ‘주택문제’, ‘교육문제’, ‘은퇴문제’이다. 이 세가지 재무적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이 우리네 삶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절체절명의 숙제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 문제 중에서 향후 가장 심각하게 다가올 문제가 바로 ‘은퇴문제’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를 보이고 있으며, 노인들의 사회적 문제가 해를 거듭할 수록 심화되고 있다.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노인들의 자살률을 보이고 있으며, 매일(!) 7명 이상의 노인들이 자신의 목숨을 거둬들이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노인들의 자살이 외로움과 우울증의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먹고 사는 한계상황에 직면했을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노인의 문제는 악화되면 악화되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보브와르의 <노년>이라는 책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보브와르의 <노년>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아직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맞이할 ‘노인의 삶’에 대해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역사적 배경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노인의 삶에 대해 장미빛 미래가 아닌, 음울한 미래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침묵의 금기로 되어있던 비참하고 절망적인 노인의 삶에 대해 직시할 필요가 있으며,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이 변화하거나 혹은 세상에 남는다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때, 젊은 사람은 변화의 희망을 간직한다. 노인은 그렇지 않다. 노인은 자기 자신의 상황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그 상황을 초월하고자 하는 희망을 감히 품을 수 없는 것이다. -618p

노인들은 몇몇 선구자들을 제외하고는 젊은이와 같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만큼 노인들은 본인의 선택에 의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체제에 의해서 규정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가 되었음을 말한다. 그래서 미래지향적 존재가 아닌, 과거의 추억으로 퇴행되는 삶을 통해 그 안의 자신을 발견하고자는 무기력한 존재로 그린다.

왜 노인들이 그렇게 쉽사리 어린 시절로 향하게 되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노인은 어린 시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을 무시하고 싶을 때조차도 그 시간이 노인들의 뇌리를 결코 떠나지 않기에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521p

보브와르는 폭넓은 지식과 다양한 접근 방법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시종일관 부정적인 관점을 놓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삶이 끝난다는 것은 모든 의미와 가치가 소멸되는 무의미한 과정임을 말이다. 그래서 그녀가 조사하였던 무수히 많은 사상가와 문학가들은 젊음을 찬양하고 있으며, 노년을 우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당연한 귀결이다. 죽음의 문제를 ‘악’(惡)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으며, 실패의 귀결로 인식하고 있는 한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노인들은 분명히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가 언급했던 위대한(?) 사상가들 끊임없이 생산적인 성과(작품, 글, 의미……)들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노년은 축복받을 수 없는 시기인 것이다. 나이먹음으로 인한 창조성의 감퇴와 신체의 퇴보와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함은 당연지사이다.

사실 우리가 삶에 대립시켜야 하는 것은 죽음보다 차라리 노년이다. 노년은 죽음의 풍자적 모방이다. 우리가 매장하는 이 사람, 그의 마지막 나날들에 다른 날들보다 더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그의 삶은 그 부분 부분이 모두 죽음에 차압 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모두 동등하게 존재하고 하나의 총체를 이룬다. -756p

보브와르와 같은 사상가들은 철저하게 ‘죽음’과 ‘늙음’을 터부시하고 있다. 그들은 ‘죽음’을 인간이 성장해 나가는 자연스러운 과정 중에 하나임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아니 그럴 수도 없다. 서구 사상가들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단선적인 관점에 의해 ‘죽음’과 ‘노년’을 이해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들로 여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죽음이라는 과정이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의 하나라고 이해한다면, 노인의 위치에서도 찾을 수 있는 의미(意味)와 가치(價値)들을 추구해 나갈 수 있다. 노인 1인 기업가 찰스 핸디는 과거의 관점과 기준이 아닌 ‘삶의 의미들을 재규정 할 필요’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행복한 노인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현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받아들임’의 철학이 필요하다 하였다. 모든 두려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죽음’이다. ‘노년’에 대한 두려움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죽음을 단순히 터부시하고, 멀리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철학이 필요하다.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현재(現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럴 때 이 삶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을 위한 시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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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23 22:25:34 *.36.210.80
죽음은 그저 까만 하늘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어요. 언젠가 까무러쳤다가 깨어난 일이 있는데 생각해보니까 그냥 깜깜했던 것 같더군요. 그냥 그렇게 정지하는 것은 아닐까요? 신은 왜 이 세상을 이렇게 골치 아프게 만들어 놓았는지. 모두가 착하고 이쁘게 만들어 놓지 않으시고.

그동안 힘드셨죠? 좋은 책 쓸 수 있는 기회를 만나시길 바래요.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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