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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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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일 16시 29분 등록
조셉캠벨 ‘신화의 힘’ – 아담과 이브의 신화, 다시 보기

7살 아들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갑작스럽게 물어본다.
“아빠~, 아빠도 죽어?”
(약간 당황하며) “음~ 아빠도 언젠가는 죽겠지.”
“그럼,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
아들의 실존적 질문에 잠시 고민 후에 이렇게 대답한다.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되지. 아빠가 죽더라도 먼저 천국에서 아들을 기다릴께. 걱정하지마.”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졌어?”
“하느님께서 아담이라는 남자와 이브라는 여자를 처음 만드셨단다.”
(이어지는 질문과 답변은 지면상 생략하겠다. 더 재미있는 일화가 있지만……)

아들과의 실제 대화다.
당신은 어린 꼬마가 간절한 눈빛으로 창조의 기원에 대해 질문한다면 어떻게 답변하겠는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아담과 이브의 신화가 아닐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간단한 설명 또한 천국과 지옥이라는 내세관일 것이다. 물론 아담과 이브 신화는 신화적인 의미에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맞겠지만, 일부의 경우에는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고 경향도 있는 것 같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태초에 지상낙원이었던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악한 뱀의 유혹으로 인해 아담과 이브가 금기시 되었던 선악과를 먹게 되어,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남성은 노동의 멍에를 짊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중요한 사실은 아담과 이브가 이 금단의 열매를 먹게 되면서, 인간에게 씻을 수 없는 ‘원죄’가 발생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규율을 어긴 죄로 인간은 타락의 역사를 걸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왜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바로 ‘아담과 이브의 신화’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아담과 이브의 신화’를 액면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까?
창세기를 살펴 보면, 태초에 아담과 이브는 벌거벗은 상태에서도 서로 부끄러워하거나 자신의 신체 일부를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나체의 상태에서도 서로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유아기적 상태’였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벌거벗은 상태에서도 전혀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태초의 아담과 이브는 자신을 객관화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이다.

창세기 3장 7절을 보면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담이 이브가 건네준 금단의 열매를 먹고서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존재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인간의 ‘자의식’(自意識)이 생긴 것이다. 이 부분을 저자의 표현은 동일성만을 의식하는 차원에서 이원성에 참여하는 의식의 변화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는 단지 이원성(二元性)을 인식했다는 죄로, 초시간적인 융합의 낙원에서 쫓겨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나와 살자면 대극이라는 문맥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동일성만 인식하는 의식에서 이원성에 참여하는 의식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합니다. 의식이 이렇게 옮겨가야 시간의 장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101P

지금까지 ‘아담과 이브의 신화’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는 인간의 죄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러한 해석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담과 이브가 ‘죄’를 저지르기 위해서는 우선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자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로부터 자유의지가 생기며, ‘죄’를 짓든 선을 행하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태초의 아담과 이브는 꿈속과 같은 혼몽의 상태였다. ‘죄’를 저지른다거나 신의 말씀을 거역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사건은 ‘인간의 원죄’를 설명하는 상황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우리가 자연을 부패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에덴 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을 다룬 우리 이야기는 자연을 부패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 바로 이러한 신화가 우리를 대신해서 이 세계를 부패시키고 있는 겁니다. 자연 자체를 부패의 상징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은 죄악이고, 따라서 타기되어 마땅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 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189P

그렇다면 ‘자의식’이 생겼다는 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인간이 자신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자신과 타인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타인과의 다름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죽을 때까지 ‘외로움’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소외와 고독’ 역사의 시작이다.

인간은 이 소외감과 고독감을 극복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수 밖에 없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바로 ‘이성과의 사랑’을 찾는 것이다. 물론 이 사랑은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 모두를 일컫는다. 인간이 가장 무아지경(?) 또는 절정의 감정을 느끼는 것도 남성과 여자의 성적인 접촉의 시기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어둠이 찾아오면, 불을 찾아 헤매이는 불나방처럼 ‘이성’을 찾아 헤매이는 것이다.

‘자의식’(自意識)이 생기면, 자기중심적 사고를 갖게 되어 ‘욕망’이 생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욕망이라는 녀석의 문제는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블랙홀이라는 사실이다. 불교에서 인간의 욕망을 갈증 해소를 위해 짠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 것은 적절하다.

이 자의식이라는 괴물(?)이 있는 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종교들의 최종적 목적은 이 ‘자의식’을 제거하기 위해 부단한 수행과 노력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자의식을 제거해야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으며, 인간의 수많은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용어로는 자의식의 제거를 ‘자기 초월’이라고 표현한다. 저자는 이러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멋지게 표현했다.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오랜 명상을 경험하고 나오면 말이지요. 자기의 모든 것을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주어버립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이지요. 382P

정리하면, ‘아담과 이브의 신화’는 인간의 ‘죄’가 발생되는 인류 역사의 타락을 설명하는 내용이 아니라, 동물과 같은 상태의 인간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으로의 도약’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저자 또한 아담과 이브 신화가 기존의 알려져 있는 인류의 타락의 시초가 아니라 새로운 문명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신화는 일종의 메타포이기 때문에 어떠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유추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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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01 17:53:16 *.70.72.121
아이가 있으시군요. 앞으로 일찍 과제를 마쳐야 평화로운 주말을 즐기실 수 있을 거에요. 자신의 견해를 무리 없이 펼쳐 보이시네요.

앞으로 무슨 책을 그리도 빨리 쓰고 싶으신지요? 반가워요. 실물도 보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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