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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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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6일 08시 16분 등록
亂中日記

통제공 이순신, 임란이후 근 400여년을 이어 내려오면서도 조선의 군왕에서부터 민초들에게 절대적 권위를 가졌던 명칭이다. 박정희 정권에 와서 권력의 유지를 위한 이데올르그의 한 역할에 지나치게 미화된 면도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공의 전사 후 2백년이 지난 1795년 정조의 명에 의해 전문 30여 만 자에 달하는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출판된 것을 보면 가히 그 위엄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라의 난리에 임한 무장의 의연함, 전쟁에 임하면서도 중앙 정치가 우선인 동료 무장에 대한 안타까움, 적들에 대한 분노, 김훈의 표현대로 적들의 적에 의한 모함과 내침, 어머니를 향한 가없는 사랑과 가족애, 아마도 죽음을 예견한 노량의 싸움 ······. 공의 아픔이 어디서 어디까지였는지 알 수 있었다.

일기를 읽기 전에는 왜 죽었을까? 살아서 창끝을 한양으로 돌려 썩어빠진 조선을 도려내고 새 나라를 세우지 못했는가? 적어도 고려 무인정권처럼 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상상도 했었다. 공은 그래도 된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일기는 그런 여유와 희망을 꿈꾸기에는 너무 버거웠고 힘들었음을 보여주었다. 당장 눈앞의 적을 쳐부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군사와 군량이었고, 부족한 무기 앞에 오직 공만이 갖고 있는 불퇴전의 뜨거운 임전태도만이 적을 물리칠 수 있었음을 알았다.

병病은 임진란 전 기간 동안 공을 가장 괴롭혔던 고통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임란 발발(48세)이전에도 아프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이전에 병마와 싸우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사천해전에서 어깨에 총탄을 맞은 이후에는 더욱 심해졌다. 모략과 중상으로 서울에 압송(53세)되기까지 5년 동안 잠시라도 갑옷을 벗고 편히 쉬지 못했으니 현대 의학으로서도 어찌해 보지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더군다나 옥고의 내침까지 당한 이후로는 곽란癨亂, 구토, 안질 등으로 인사불성의 위험한 상태가 몇 번이고 있었음을 보면 오직 나라를 구하고 적들을 단 한명이라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마음이 아니었으면 벌써 쓰러지지 않았을까 할 정도였다.

공은 유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머님에 대한 사랑과 걱정, 나라에 대한 걱정, 적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에 대한 걱정 등으로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달이 밝으면 밝아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난리중이라 언제 어디에서 적들의 침공을 대비해야 하는 군사령관으로서의 스트레스까지 있었을 터이니 이는 초인적인 의지력 하나만으로 버텨왔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공의 사람 중 눈에 뛸만한 몇몇이 있으니 잠깐 살펴보자. 첫 째로는 당시 영의정을 지냈던 유성룡이다. 꿈자리에서조차 몇 번이나 만나 나라를 걱정하였다고 하니 당시 두 분의 서로 믿고 의지함이 남달랐던 모양이다. 끊임없는 서신의 왕래를 통하여 공과 유정승은 나라를 위한 안타까움을 교감하였을 것이다. 두 번째는 무엇보다 군관 나대용을 들어야 한다. 공이 임란무적의 밑바탕에는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는 거북선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공의 사후 3백년이 지나 대원군이 외국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충무공의 거북선을 만들어 대비하라 하였으나 만든 배는 물에 뜨지 못했다 한다. 적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 거북선은 조선造船 기술에 뛰어난 군관 나대용도 도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김완, 박종남, 배흥립, 선거이, 송여종, 송희립, 신호, 안위, 어영담, 우치적, 이몽구, 이순신, 이억기, 이영남, 이운룡, 이원익, 이의득, 이정충, 황세득 등 막하 장수들이 소위 이순신 사단을 형성하였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권준의 이름이 유달리 많다. 일기 전체를 통틀어 254차례나 언급되었을 정도이다. 전쟁을 수행중인 무장이 그의 기록에 그만한 이름이 있음은 더 말해 무엇하랴.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합세한 기간동안 지휘권을 거의 공에게 양보하였고, 공의 사후 장지선정에도 명나라 지관을 보냈을 정도로 공에게 애정을 가졌던 것 같다. 그는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는 최고의 찬사를 공에게 바쳤다. 지금도 영향력 있는 외국의 사절을 무시하기 어려우니 당시 정세 속에서 원군의 장수는 어떠했겠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공이 점占을 많이 보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처음에는 의아했으나 일기를 읽어가던 중에 극히 일상적인 현상이란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도 점보는 사람이 많았고 지금도 점집이 성행하고 있으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점과 꿈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당시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였었나 보다.

공이 53세 되던 정유년(1597년) 4월 초하루에 28일간의 옥고를 치르고 옥문을 나오게 된다. 많은 고관대작들이 종을 시켜 공을 위로하였다고 일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대목에서 분노의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마땅히 선비된 자로서 국록을 먹는 위치라면 자신을 내던져서라도 난중의 장수를 보호해야 했다. 유성룡이 미웠다. 과연 그마져도 일신의 안위나 당파의 이익이 우선이었을까? 풀려난 이틀 만에 밤새 이야기하고 헤어졌다고 기록하니 공께서 믿고 의지할만한 이가 유성룡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오직 일흔 두 살 된 판중추부사 정탁만이 공의 탄원을 말하였다.

그 달 열 사흗날 공의 모친께서 운명하셨다. 어찌 공의 심정을 애기할 수 있을까. 다만 당시 공의 기록으로 대신해 본다.

잠시 후 종 순화가 와서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였다.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자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어찌 적으리. ······ 배를 끌어다 영구를 상여 위에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며 슬프고 찢어지는 아픔이야 어찌 다 말하랴, 어찌 말하랴. 집에 도착하여 빈소를 차렸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며, 나는 기력이 다 하였는데다 남쪽으로 내려갈 길이 또한 촉박하니 부르짖고 또 부르짖어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 이는 공을 대표하는 구절이다. 옥고에서 풀려나 “신에겐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오니 감히 적들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인즉 ······” 하였던 명량대첩 하루 전에 쓴 일기에 나온다. 명량해전에서 공이 믿었던 것은 오직 스스로 선봉이 되어 싸우는 것 외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선에 둘러싸여 오직 독전할 뿐이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안위가 등장한다. 어쩔 수 없이 대장선으로 온 안위를 앞에 두고 “너는 군법으로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으로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며 적진속으로 뛰어 들것을 명령하는 장면인데 공의 처절한 음성이 400년이 지난 지금에까지 살아 들리는 듯 하다. 명량의 물길을 거꾸로 돌려질 때까지 버텨 쳐부수는 이점 외에는 접근전과 육탄전 외에는 방법이 없었던 명량에서의 승리로 왜군은 더 이상 정유재란의 침공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오로지 공의 힘이었다.

공께서 54세 되던 무술 선조31년 되던 1598년 난중일기가 절필된 다음 날인 11월 18일 500여척의 조·명 연합군은 왜 함대와 혼전난투의 접근전을 노량에서 벌인다. 해전은 춥고 달밝은 밤의 전투였다. 각종 화포를 쉴 새 없이 발사하고, 불화살을 날리고, 잎나뭇불을 마구 던지는 등, 치열한 야간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밤은 서서히 트이기 시작했다. 이 마지막 해전이 고비에 이른 19일 새벽 공은 몸소 지휘 독전 중에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된 적의 탄환을 왼쪽 가슴에 맞아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군사들이 급히 그를 방배로 가리었으나, 공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고 당부하며 숨을 거두었다. 관음포 앞바다였고 승세는 이미 압도적이었다.

나는 공의 전공을 말하고 싶지 않다. 공이 아팠을 때 곳곳을 되새기고 싶다. 7년 전란의 현장에서 아픈 심신을 이끌고 삶을 부축였을 공의 흔적을 생각해 본다. 그럴 수 있을까? 정녕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공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머리숙여 공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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