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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승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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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26일 11시 40분 등록
대안을 꿈꾼다 - 공동체적인 삶


2004년 대통령 탄핵 때의 일이다. 국회 앞 시위현장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자”는 내용의 연설을 들었다. 그때 당시는 뜨거움이 솟구치는 감동이 있었다.
그로부터 거의 3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과연 더 나은 세상이 만들어졌는가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정말 많은 곳에서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본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떤 세상을 물려주자. 우리 아이들에게 ....를 할 수 있도록 하게 하자’ 등 아파트 광고전단지에서부터 사학법 개정반대 등 각종 홍보문구에 빠지지 않는 말이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러한 희망들에 굳이 아이들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 갖게 되는 책임감, 소명감, 사명감 등 자식을 둔 부모라면 지니게 되는 본능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미래는 어떤 것인가 생각할 때 암울해 지는 것이 사실이다. 4살짜리 딸아이를 보면서 딸의 미래를 생각할 때 걱정스런 마음과 왠지모를 연민이 깃들이게 된다.

인류는 유사이래로 이상적인 사회 혹은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고자 애써 왔다. 시민혁명과 민주화 투쟁, 전쟁, 엄청난 희생을 거쳐 이룩한 ‘현실’은 이제 자본과 군사력 등 절대권력을 소유한 집단이 지배하는 제국의 등장과 끝없는 테러, 계급의 양극화, 환경 파괴, 이상기온과 질병 그리고 실업 등 갖가지 집단적 갈등으로 점철되어 가고 있다.
전지구적으로 실업, 빈곤, 환경오염, 양극화, 계급화의 문제들은 뚜렷하다 못해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린지 오래이다. 특히 IMF 이후 한국에서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실업문제와 양극화 문제 그리고 세계 1위의 자살률만 보아도 그것이 인간성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어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취업, 위험한 상상에 관한 보고서”라는 영화에서는 실업문제로 인해 자신과 동일한 경력을 가진 경쟁자들을 골라 살인을 저지르는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 전혀 억지스럽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는 크게 구분하면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지속적으로 효율과 생산성을 고집하고 개인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 관리와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이다. 고도의 과학기술화와 자본 증식 자체를 목표로, 불필요하다고 간주되는 모든 종류의 공동체적 기반을 해체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로 대표된다. 그 사회는 개별화된 시민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그 질서에 편입되기를 욕망하게 만듦으로 더욱 바쁘고 정신없는 “결핍”과 “불안”의 악순환 사회를 만들어낸다. 더 이상 노동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의미도, 수고의 적절한 대가도 기대할 수 없는 체제에서 사람들은 ‘소모성 건전지’에 지나지 않은 자기를 인식하게 된다.

다른 하나의 방향은 현 사회를 ‘위험사회’로 규정하고 ‘성찰’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더 이상 “하면 된다”가 아니라 “할수록 망칠 수 있다”는 시대 상황을 인식하고 그간의 습관화된 신념과 방식들과 단절을 시도하면서 새로움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이다. 경제 성장과 과학기술 우선으로 형성된 불균형 사회의 방향을 바꾸어내고 ‘성취’만을 강조하는 시대를 거슬러 살고자 하는 이들은 성취 이전에 최소한의 돌봄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내야 함을 강조한다.

이들은 다시 작은 공방을 차리고 노동과 삶을 회복할 것을 주장한다. 아파트에 고립된 작은 가족들,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는 파편화된 개인을 양산해온 배타적이고 독점적 핵가족제도를 바꾸어낼 방안을 찾아내고자 한다. 돌봄 결핍 사회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델은 이제 오히려 근대화 이전의 지역 공동체 내지 친족 공동체 사회이다. 사랑과 돌봄이 가능한 유사 확대 가족적 삶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 이웃을 경계하는 사회가 아니라 안전하고 즐거운 마을에 위치한 열린 가족, ‘위기’에 시달리는 ‘불안한 개체’가 아니라, 서로의 삶 속에 엮이면서 삶의 의미를 그 관계성 속에서 찾아갈 수 있는, 그래서 보다 안정되고 관계적인 시민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는 기초로서 돌봄과 배려가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자 애쓰고 있다.

최근 대안교육, 공동육아, 사회적 기업, 자활후견기관, 귀농학교, 유기농 마을공동체 등등의 다양한 분야에 많은 공동체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을 본다. 나날이 이런 공동체를 꿈꾸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은 아마도 “신자유주의 질서”가 주는 사람 사이의 “소외”가 늘어나는 반증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 아이들을 위한 세상은 어떤 세상이어야 할까?
조안 시울라는 <일의 발견>에서 “그 이상의 것”을 찾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보다 광범위한 질문은 [우리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삶을 원하는지 알고 있고,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기꺼이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이다.”
대답은 너무나 분명한데 혼자서 그 길을 가기에는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한가 보다.
IP *.235.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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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gie
2007.03.26 13:02:53 *.142.163.4
대학로에 들어서면 고스란히 살아나는 열아홉 스물셋까지의 기억...
공동체.. 제겐 특별한 단어입니다. 너무도 사랑했고 그래서 아프고 상처이기기도 한, 늘 머리속에 자리잡은 그리운 그것.. 도시에서는 불가능이라고 입모아 말하는 그것.., 그러나 소중한 것.. 장소나 시간의 일치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닌 그런 공동체를 이제는 꿈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험이지요. 그것은 거룩한 상처이지요. 작게는 나와 너 크게는 광막한 우주에 닿는 그런 아픔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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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27 00:59:12 *.140.145.63
글을 읽는내내 '창조적 부적응자'들이 자연스럽게 모인 '꿈벗'과
'연구원'이라는 색다른 형태의 공동체가 머리속을 계속 맴돌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런 커뮤니티를 찾고 있었구나. 그리고 만났구나.하는
그런 생각에 잠겼죠..

'창조적 부적응자'들이 더이상 외롭지 않고 부적응자로 불리우지 않는
그런 사회를 이 공통체를 통해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갑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여러가지 소통의 방법을 통해서..

고생 많이 하셨고 이 아름다운 공동체에 계속 머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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