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언 달러 베이비(Million Dollar Baby, 2004)



* 마음을 울린 말들- 기억나는 대사
“내 생각에 이건 복싱영화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딸의 러브스토리이고, 희망과 꿈에 관한 것이지요. 그것이 복싱의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

맞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그런 영화다. 좋은 내용, 좋은 연기, 좋은 촬영. 희망과 꿈에 대한 영화에서 의미와 일상과 철학이 빠질 수 없다. 그것을 담은 대사가 또한 좋다. 이 영화는 모간 프리먼의 1인칭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그의 말은 억지스럽지 않고 유치하지 않다. 관조적이고 철학적이다. 기록해두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다. 기억나는 것들을 대강 옮겨 본다.

“권투에 있어 마법이 있다면 엄청난 인내력을 가지고 시합을 치루는 것이다. 상처가 벌어지는 걸 참고 신장이 파열되어도 참으며 말이다. 그건 누구도 아닌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꿈을 위해 모든 것을 건 위험한 마술이다.”
-에디 스크랩(모간 프리먼, Morgan Freeman)

"가끔은 펀치를 먹이기 가장 좋은 방법은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뒤로 너무 많이 물러나면, 제대로 싸울 수가 없다."
-에디 스크랩(모간 프리먼, Morgan Freeman)

“열정만으로는 안 된다. 도중에 포기하는 놈들은 열정이 넘쳐나던 놈들이다.”
- 프랭키 던(클린트 이스트우드, Clint Eastwood)
* 프랭키의 힛핏 체육관 사무실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Tough isn't enough"

"서른 한 살이 된 여자가 발레리나를 꿈꾸지 않듯 복싱선수를 꿈꿔서도 안 된다."
- 프랭키 던(클린트 이스트우드, Clint Eastwood)

"13살 이후처럼 접시를 닦거나 서빙을 보면서 생일을 보내지 않고, 여기에서 생일을 보낸다는 사실을 축하하고 있어요. 당신 말대로 내가 좋은 펀치를 날릴 수 있기 전에 37살이 되겠죠. 제가 스피드 백을 한 달 동안 치고 있는 것도 명백한 진실이구요. 또 다른 진실은 제 남동생이 감옥에 있다는 거죠. 사회복지기관에 의해 빼앗긴 여동생의 아기는 아직 살아있구요. 우리 아빠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몸무게가 134 킬로죠. 만일 제가 올바로 생각한다면 집에 돌아가야겠죠. 중고 트레일러에 가서, 후라이팬을 사고, 먹을 거도 좀 사야겠죠. 문제는 권투가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아하는 일이라는 거예요. 서른 두 살이 늦었다면 나한텐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것에요."
- 매기 피츠제랄드(힐러리 스웽크, Hilary Swank)

“주먹을 뻗기 위해선 한걸음 뒤로 물러나야한다.”
-에디 스크랩(모간 프리먼, Morgan Freeman)

“평생 접시 닦고 평생 청소하다가 삶이 끝나는 사람들은 말하지. ‘나에게는 기회가 없었다’고.”
-에디 스크랩(모간 프리먼, Morgan Freeman)

“복싱엔 존중이란 게 있다. 내 속에서 그것을 끌어내고, 자기 것을 지키며 상대에게서 그걸 뺏는 거지.”
-에디 스크랩(모간 프리먼, Morgan Freeman)



*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대한 소고- 소감
영화에는 다양한 인물이 나온다. 자신만의 철학과 훈련방식을 갖고 있는 꽤 유명한 트레이너인 프랭키. 그는 가족을 그리워한다. 딸을 그리워하고 딸을 위해 기도하고 편지를 보내지만 딸의 최근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편지는 늘 반송되어 온다. 프랭키의 깊은 친구이자 좋은 자질을 갖고 있던 왕년의 프로복서 스크랩. 그는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무리하게 도전하여 한쪽 눈을 실명했다. 그는 프랭키가 운영하는 ‘힛핏’ 체육관의 관리자로 일하며 체육관에서 생활한다. 빅 윌리 리틀, 프랭키가 키운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지만 오랜 기다림에 지쳐 프랭키를 떠난 인물이다. 돈과 챔피언 벨트를 얻기 위해 유명한 매니저에게로 떠나는 윌리에게 프랭키는 말한다. “그는 사업가야. 가서 배울 것이 없다고!” 윌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복싱에 필요한 것은 당신에게 모두 배웠어요.” 프랭크를 떠난 윌리는 세계 챔피언이 된다.

이 영화에서 내가 주목하는 인물은 유쾌한 허풍쟁이 데인저와 주인공 매기이다. 데인저는 부모님에게 버림받은 젊은이다. 그는 우연히 프랭키의 체육관을 발견하고 공짜로 운동을 한다. 나는 그가 복싱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다만, 그가 소란스럽고 허풍떠는 복싱으로 외로움을 달랜다고 추측할 뿐이다. 데인저의 일상에서 복싱은 즐거움이다. 그는 복싱을 즐긴다. 스텝도 주먹도 엉망이고 훈련도 제멋대로다. 체육관에 와서 그저 즐긴다. 복싱은 데인저의 취미다.

매기라는 캐릭터는 데인저와 매우 다른 쪽에 위치한다. 그녀는 어려운 시절을 보냈고, 식당 종업원으로만 10년 넘게 일해 왔다. 복싱을 좋아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배운 적은 없다. 프랭키의 선수(제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프랭키는 거들떠도 안 본다. 프랭키의 차가운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힘들게 식당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프랭키의 체육관에 등록한다. 그것도 6개월치를 선불로 지불하고 말이다. 가난한 그녀의 가족들을 고려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 돈을 버는 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꿈을 선택했고 그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 식당 손님이 남긴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돈을 모은다. 말 그대로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시간과 돈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꿈에 건다. 하지만 최소한의 그것들조차 꿈을 위한 투자였으므로, 그녀는 정말이지 모든 것을 걸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면, 그녀는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식당으로 간다. 식당 일이 끝나면 체육관으로 와서 혼자 훈련을 한다. 체육관의 불이 꺼져도 그녀는 연습에 몰입한다. 그녀는 스크랩의 따뜻한 도움을 받기 전에, 그리고 프랭키의 인정을 받기 오래 전부터 ‘준비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스크랩이 그녀를 도운 것은 그녀가 도와달라고 해서가 아니다. 프랭키가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 역시 그녀가 말로 설득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녀의 방식으로, 그녀의 꿈을 위해 열심을 다해 훈련했다. 남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훈련이고 수준이더라도 그녀는 꿈속에서 살았다. 꿈속에서 존재하는 그 모습은 가장 늦게 까지 연습하는 것, 쉬지 않고 연습하는 것, 펀치 볼을 사기위해 몇 주 동안 모은 돈을 다 쓰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쓸 데 없고 무모한 짓이지만, 매기에게는 확신에 찬 행동이다. 같은 행동이 이렇게 다르게 인식된다.

복싱이 취미인 데인저는 언제든 복싱을 그만둘 수 있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에서, 한 흑인 젊은이에게 형편없이 얻어맞고 떠난 데인저는 영화의 종반부에 아무렇지 않게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온다. 복싱에 모든 것을 건 매기는 다르다. 매기는 복싱을 그만두기도 어렵지만, 그만두게 되면 다시 글러브를 끼기도 어렵다. 자신의 전부를 쉽게 걸고 쉽게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자가 그랬던가. 스승이 한쪽 구석을 들어 보이면 제자는 세 구석을 들고 답해야 한다고, 그렇지 못한 제자는 나쁜 제자라고 말이다. 준비된 마음을 갖은 사람은 이미 준비된 제자이고 훌륭한 제자다. 프랭키의 조언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면서 그녀의 수련 과정은 가속도가 붙는다. 식당일을 하면서 스텝을 받는 그 모습은 일상이 되어버린 수련이다. 31살에 발레리나를 꿈꾸는 것은 무모한 짓이고 성공 가능성 제로에 가까운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선택하고 노력하는 사람을 누가 비난할 수 있는가?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붙잡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 적당히 타협하는 삶보다 비참하고 행복하지 않다고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상처’다. 주요 캐릭터 3명 모두 상처받은 인생을 안고 살아간다. 프랭키는 유능한 컷맨으로 권투선수들의 치료사이지만 정작 자신의 상처는 치료하지 못한다. 그래서 "항상 자신을 보호하라”가 그의 첫 번째 규칙이다. 영화에 나오는 단 한 번의 빅 클로즈업이 바로 한 권투선수가 눈가에 입은 상처를 확대한 것이었다. '너무 깊고 뼈에 가까운 상처'도 있다. 딸과 프랭키 간의 단절, 가족과 매기 간의 상처, 스크랩의 실명된 한 쪽 눈. 매기가 챔피언의 악랄한 반칙으로 반식물인간이 되는 장면이 절정이다. 이 영화는 상처투성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상처를 따뜻함으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인물들이 있으니, 서로의 상처를 안고 보듬어주는 프랭키와 스크랩의 우정, 데이저가 권투에 정을 붙이도록 도와주는 스크랩의 따뜻함, 그리고 서로의 한(恨)을 메워주는 프랭키와 매기가 바로 그들이다.



* 내가 감독이라면 이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기 5분 전 쯤 도착했다. 오후 5시 50분, 목동 CGV 1관의 가장 좋은 자리에 나는 앉았다. 처음 온 극장이었지만 정말이지 자리가 좋았다. 맨 뒤의 중앙 N열 11번. 내 자리 왼쪽에는 의자가 아니라 앉은키만한 네모란 돌이 있어, 거기에 옷을 두고 팔을 올렸다. 편했다. 오른편에는 한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아마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올드 팬인 것 같았다. 할머니는 혼자였고 나도 혼자였다. 그리고 그날은 3월 14일, 화이트 데이(White day)였다.

큰 기대를 만족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에 기대치가 높아져 나중에 실망한 영화가 한 둘이 아니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도 그랬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환상적’인 평가만 보였다. 그것들을 보고 스스로 기대치를 조절하려던 나는 포기했다.

“나는 책처럼 꼬집어서 설명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관객이 이것저것 생각하며 즐기는 게 좋다. 그게 관객의 할 일이니까.”, 이 영화를 찍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적어도 그는 이 말에 맞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 들게 하고 해석하게 만든다. 생략과 절제 그리고 그 안을 채우는 의미. 덜 보여줌으로써 더 생각하고 상상하게 만들고, 현실성에 의미를 더하여 철학을 품게 만든다.

‘내가 영화 속 등장인물’이었다면 하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우선, 매기 피츠제랄드의 덜 떨어진 가족들에게 하루 날 잡아 설교를 퍼부을 것이다. ‘가족은 그런 것이 아니야!’ 다음으로, 매기에게 치졸한 반칙을 더한 그 망할 챔피언을 기절하지 않을 정도의 주먹으로 100대 쯤 때려줄 것이다. ‘게임은 규칙이야!’ 기절하면 안 아플 테니까, 기절 바로 직전까지 100번을 오락가락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세 번째로 매기가 위기에 처한 순간 링 구석에 있던 ‘문제’의 그 의자를 내가 살짝 밖으로 빼낼 것이다. 반도덕적인 한 인간 때문에 꿈에 모든 것을 건 아름다운 이가 반식물 인간이 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하지만 만약 이렇게 된다면 영화는 재미없어질 것이다)

‘내가 감독이라면’, 매기가 꿈을 발견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좀 더 철저하게 보여줄 것이다. 복싱이 좋아 그것에 모든 것을 건, 매기의 수련 과정은 내게 송곳이었다. 나의 가슴을 찔렀고 나의 과거를 돌아보게 했다. 프랭키에게 삼고초려하는 매기의 모습도 좀 더 늘릴 것이고 프랭키가 매기를 받아들이는 순간을 더 극적으로 만들 것이다. 준비된 제자일지라도 훌륭한 스승을 얻기 위해서는 정성을 쏟아야 한다. 에디 스크랩의 선수 시절에 대한 부분, ‘기회를 가져서 아프고 행복했던 그 시절’을 삽입할 것이고 스크랩의 '109회' 전에 프랭키가 링 안으로 타월을 던지지 못한 과정도 넣을 것이다. 즉, 매기와 스크랩의 관계를 대비함으로써 둘을 오버랩하고 싶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million dollar baby)'는 ‘모든 상품이 1센트에 판매되는 1센트 가게에서 100백만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물건을 발견한다’는 의미의 관용어라고 한다. 1970년대 미국의 한 대중가요의 가사에서 유래된 말로 ‘예상하지 못했던 허름한 곳에서 보물 같은 진귀한 것을 얻는다’거나 ‘뜻밖의 순간에 행운처럼 소중한 사람을 만난다’는 뜻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 영화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프랭키와 매기 두 사람이 서로에게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프랭키가 매기의 닉네임으로 정해준 모쿠슈라(mokulsha)에 잘 담겨있다. 아일랜드의 토속 언어인 게일어(gaelic)로 '모쿠슈라'는 ‘내 사랑, 내 혈육’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