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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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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14일 12시 54분 등록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유명한 이야기체 시(詩)
"이녹아든(Enoch Arden)" 입니다.
1910년대에 Percy Nash, D.W. Griffith 등의 감독들에 의해 무성영화로 만들어지고 그후 많은 영화에 차용되었습니다.

이녹 아든(Enoch Arden )

기다란 벼랑 끊기어 틈바구니 이루고,
거기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모래밭이 펼쳐져 있으며,
그 너머 좁다란 부둣가 주위에 붉은 기와지붕들이 있네.
그 옆으로 낡은 교회가 보이고,
약간 위로는 기다란 거리가 이어지며
방앗간이 탑처럼 우뚝 솟아 있고,
하늘과 맞닿은 잿빛 구릉에는
덴마크 사람들의 낡은 무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네.
그 아래 움푹 꺼진 골짜기에는
녹음이 짙게 드리우는 가을이면 개암나무 열매를 주우러 가는
개암나무 숲이 있네.

벌써 백년도 더 되는 오랜 옛날
바닷가에는 집이 세 채, 아이들이 셋
귀여운 애니 리리라는 소녀와
방앗간집 외아들 필립 레이,
어느 추운 겨울날 배가 난파하여
아버지를 여읜 이녹 아든이 그들이라네.
바닷가에는 낡은 어구들, 둘둘 말아놓은 밧줄,
해진 그물, 녹슨 닻이며,
끌어올린 배가 있었네.

거기에서 아이들은 모여 모래성을 쌓아
밀물에 부서지는 걸 지켜보거나
하얀 파도에 신나서 요리조리 쫓고 쫓기는 놀이를 하며
귀여운 발자국을 모래밭에 남기면,
그 발자국 다시 파도에 씻겨 흔적도 없어졌다네.
벼랑 아래 좁은 동굴
이곳에서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했다네.

하루는 이녹이 남편 되고
또 하루는 필립이 남편 되고
색시는 오직 애니로 정해져 있지.
때로는 이녹이 남편 노릇을 일주일씩이나 하기도 했네.
‘이건 내 집, 애니는 귀여운 내 아내야.’
‘아냐, 내 아내이기도 해. 우리 공평하게 하자.’
이렇게 필립이 말했네.

그러면 둘 사이에 다툼이 일었고,
이기는 쪽은 언제나 힘센 이녹이었네.
필립은 푸른 눈동자에 분한 눈물 글썽이며 마냥 대들었네.
‘이녹, 넌 못된 놈이야’
그러면 조그만 색시도 따라 울면서 말하길
‘제발 나 때문에 싸우지 마.
나는 두 사람 모두의 귀여운 아내가 될 테야.’

어언 장밋빛 어린시절은 지나갔고
이제는 떠오르는 햇살처럼 생명의 열기가
서로에게서 느껴졌네.

두 젊은이는 처녀 하나를 놓고서
서로의 가슴을 두근거렸네.
이녹은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지만
필립은 마음속에 품을 뿐이었네.
애니는 필립에게 상냥히 대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이녹을 사랑했네.

이녹은 애니를 위한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배를 한 척 사고, 집고 마련할 계획을 세웠네.
이녹은 용감할 뿐 아니라 행운도 따라서
만사가 그의 뜻대로 잘 풀려 나갔네.

폭풍을 만나서도 당황하지 않는 사나이는
이 바닷가 근처에는 이녹말고는 없었다네.
상선에 올라 한 해 동안 일한 끝에
이녹은 당당한 뱃사람이 되고,
사나운 파도에 휩쓸린 사람을 세 번이나 구하여
모두가 그를 훌륭한 젊은이라고 생각했네.

이녹은 스물 한 살의 한창 나이에 애니를 위해
배도 한 척 사들이고,

방앗간에 잇닿은 거리의 중간쯤
새 둥지 같은 집 한 채도 마련했네.

그러던 어느 황금빛 가을저녁,
포구의 젊은이들 일손을 멈추고
손에 손에 자루며 바구니들고
개암나무 숲으로 열매 주우러 갔네.

필립은 병석에 누운 아버지 수발 때문에
뒤늦게 언덕을 올라서니,
그 아래 비탈진 골자기
드문드문 숲이 우거진 가장자리에
이녹과 애니가
손을 마주잡고 앉아 있었네.

이녹의 검은 왕방울 눈, 햇볕에 그은 얼굴은
제단의 맑은 불꽃에 비치듯
환히 빛나고 있었네.
필립은 그들의 얼굴과 눈망울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었네.

두 사람이 뺨과 뺨을 마주할 때
필립은 상처 입은 생명체처럼 신음하며
수풀 속에 몸을 숨겼네.

사람들은 모두 흥겨워 떠들었지만
필립은 가슴속에 평생을 두고 못 잊을 갈망을 품은 채,
슬그머니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네.

마침내 이녹과 애니는
사랑의 열매 맺어
성당의 종소리 멀리멀리 울려 퍼졌네.
그리고 금방 7년의 세월이 흘렀네.

아무런 근심 걱정 없는 행복한 나날이었네.
서로 사랑하고 아낀 덕택에,
귀여운 아기도 태어났네.

첫애는 귀여운 공주 아기님.
그 갓난아기 울음 듣던 이녹은
열심히 땀 흘려 일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싶었네.
그리고 2년 뒤,
그를 쏙 빼닮은 사내아이 태어나자
그의 소망은 더더욱 새로워졌네.

두 아이의 노니는 모습은,
이녹에게 풍랑의 바다 떠날 때나 들과 산을 여행할 때
힘과 용기를 더하여 주고 두 주먹 불끈 쥐게 하였다네.

나무 십자가가 선 시장터는 말할 나위 없고
저쪽 언덕 나무 사이 숨어든 오솔길
금요일이면 이녹이 생선을 대주곤 하는
고즈넉한 저택의 어린 사자 새겨진 문설주에서,
공작 날개 모양의 수송나무 뜰까지
이녹의 흰 말과 갯냄새 나는 바구니 속에 든 수산물,

겨울 바닷바람에 그은
그의 구릿빛 얼굴을 모르는 이 없었네.
세상사가 항상 그렇듯이
그때 난데없이 불행한 사고가 찾아왔네.

물길이나 바닷길을 너무나 잘 아는 이녹이
포구에서 백리쯤 떨어진 북쪽의 큰 항구에
정박한 배의 돛대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 그만 굴러 떨어진 것이었네.

사람들이 그를 안아 일으켰지만
가엾게도 한쪽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네.
이녹이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애니는 허약한 사내아이를 낳았네.

그 사이 다른 뱃사람들이 손을 뻗쳐
이녹의 단골들을 가로채어
삶의 터전을 빼앗아버렸네.

그처럼 씩씩하고 의젓하던 이녹도 몸져누워 있으니
하느님의 은혜야 버릴까마는
회의와 불안함이 그의 마음을 온통 채웠네.

한밤중에 덮치는 악몽처럼
그의 아이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그의 아내는 거지 되어 헤매는 모습 눈에 어른거렸네.
이녹은 하나님께 기도 드렸네.

‘비록 제 몸은 거두실지라도
불쌍한 아내와 아이들만은 이 비참함 속에서
구해주시옵소서.’

때마침 이녹을 잘 아는 배의 선장이
그의 불운을 소문으로 듣고 찾아와 하는 말이,
‘내 배가 멀리 중국을 향해 떠날 걸세.
수부장( 水夫長) 자리가 비어 있는데
자네 가보지 않겠나?

이 포구를 떠날 때까지는 몇 주일 여유가 있네.
이녹, 자네가 그 자리를 맡아주면 좋겠네만.’
이 말을 들은 이녹은 즉시
자신이 그 자리를 맡겠노라 나섰네.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이런 도움을 베풀어주시는 것이라 기뻐하면서.
이제야 불행의 그림자가 자취를 감추었네.

조각구름이 해를 가려서
난바다 멀리 떠 있는 섬들은 빛을 잃지않았고,
인고의 마음도 차차 개었네.
그러나 막상 떠나려니 아내 생각, 어린아이들 생각에
마음 한켠에서 조바심이 일었네.

이녹은 한밤중 고뇌에 젖어
깊은 생각에 빠져들기도 했네.
배를 팔아버릴까? 하지만 내게 너무 소중한 배가 아닌가.
내가 저 배로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얼마나 누비고 다녔던가!
기사들이 말을 사랑하듯, 나도 저 배를 사랑한다.

배를 팔아 물건을 사서
아내에게 장사를 시켜보는 건 어떨까?
그러면 내가 없는 동안 살아갈 수 있으리라.
나는 나대로 먼 뱃길 떠나 장사를 하리라.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세 번
몇 번이고 뜻을 이룰 때까지 따라 다니리라.
후에 돈을 벌어 돌아오면
나도 의젓한 선장이 될 수 있을 테지.
수입도 늘고 차츰 생활도 풍족해지리라.
귀여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아내와 오순도순 꿈을 가꾸어 가리라.


이녹이 마음속으로 모든 걸 결정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갓난아기를 보듬고 있는 창백한 애니 모습이 눈에 띄었네.
애니는 반가이 소리치며
그의 품에 갓난아기를 안겨주었네.
이녹은 아이를 품에 안고
몸무게를 어림잡으며 얼러주었네.
그러나 차마 마음속의 계획을 말할 수 없어
다음날 아침에야 아내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네.


결혼반지를 받아 낀 그날 이후
애니는 처음 남편의 뜻에 반대했네.
소리치고 두 눈 부릅뜬 게 아니라
눈물을 글썽거리며 호소하며 매달리듯 되뇌기를,
‘만일 당신이 저와 아이들을 두고 간다면
온갖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요.
당신이 저와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제발 가지 말아요.’
애니가 이렇게 간절히 호소하였지만,
‘내 한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라오.’
그녀의 만류를 귓전으로 흘려버리고
이녹은 굳은 결심을 굽히지 않았네.


마침내 이녹은 자신의 오랜 친구인 배를 팔아
여러 가지 물건을 사들여
길가에 잇닿은 거실에 있는 선반과 구석에
사들인 물건을 진열하였네.
이녹은 고향을 떠나는 그날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도끼질, 망치질, 톱질 소리 내어가며
온 집안이 떠나가도록 일했네.
그러나 애니에게는
마치 자신의 교수대를 세우는 소리처럼 들렸네.
이녹은 이 모든 일이 끝나자
자연의 여신이 씨앗을 뿌리고 꽃을 가꾸듯
세심한 손길로 가게를 가지런하게 꾸민 뒤 일손을 놓았네.
애니를 위해 마지막까지 열심히 일한 이녹은
지칠 대로 지쳐 이층으로 올라가서
세상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네.


이녹은 이별의 아침을 담담하게 맞으며
애니의 걱정을 덜어주려 했네.
애니도 그의 걱정을 잘 알던 터라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녹은
몸을 숙이고 엎드려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이 통하는 신앙심으로
비록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언정
아내와 아이들에게만은 축복이 내리길 기도했네.

그리고나서 애니에게 말하기를
‘이번 항해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행운이 찾아올 거요.
애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난로에 불을 밝게 피워 나를 기다려주오.’
한편 어린 젖먹이의 요람을 흔들며,
‘귀엽지만 병약한 우리 아기야-
나는 이 아이를 너무도 사랑하오-
하느님, 이 아기를 보살펴주소서.
내가 돌아오는 날 무릎에 앉히고
낯선 나라의 이야기 들려주어 너를 기쁘게 해주마’
‘자, 애니! 이리 오시오.
그리고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오.’


애니가 이녹의 희망 섞인 말을 들었을 때
가까스로 힘이 솟는 듯했네.
하지만 이녹이 이야기를 돌려
하나님의 신앙심에 대해 거친 목소리로 설교할 때
애니는 귀담아들으려고 하지않았네.
마치 시골처녀가 물동이를 샘터에 놓고
자신을 위해 물을 그득히 채워주던
사나이를 바라보면서
소리는 듣는 둥 마는 둥
물이 넘쳐도 내버려두는 모습 같았네.


마침내 애니는 입을 열었네.
‘오 이녹, 당신은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아무리 지혜롭다 해도,
나는 당신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알아요.’


‘그렇다면 내가 당신 얼굴을 보겠소.
애니, 내가 타는 배는 이곳을 지나가오.
선원들이 쓰는 망원경을 빌려서
나를 찾아내어 당신의 근심을 지워버리시오.’
이녹은 배가 이곳을 지나는 날을 알려주었네.


작별의 순간이 다하려 할 때
‘애니, 기운 내시오!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오!
내가 돌아오는 날까지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시고,
모든 것을 잘 정리하시오.
내 걱정은 하지 마시오.
그래도 걱정이 되면, 하나님께 의지하시오.
그분은 우리의 닻, 항상 곁에 함께 하오.
저 동쪽 끝 아침해 뜨는 곳에도 함께 하오.
그러니 내가 아무리 도망치고 싶다 해도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벗어날 수가 있겠소?
바다는 하느님의 것, 바다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이 바다를 만드셨기 때문이오.’


이녹은 일어나 흐느껴 우는 아내를 힘껏 끌어안고
의아해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입맞춤을 했네.
병약한 막내아이는 열 때문에 밤새도록 보채다가
겨우 잠이 들어 있었네.
이녹은 그 아이 깨우려는 아내를 말리며


‘깨우지 마시오. 잠이 든 아이를 깨울 필요 없소.
이 아이가 이 일을 어떻게 기억하겠소?’
하고 잠자는 아기 볼에 키스해주었네.
애니는 아이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한 움큼 잘라 그의 손에 쥐어주었네.
이 머리칼 한 움큼을 이녹은 목숨이 붙어 있는 날까지
잠시도 몸에서 떼지 않고 지니고 다녔네.
이녹은 서둘러 짐꾸러미를 어깨에 메고
손을 흔들며 먼 길을 떠났네.


이녹이 알려준 그 날
애니는 망원경을 빌렸지만 소용없었네.
아마도 망원경을 조절할 수 없었든지,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흐릿해졌던 탓인지,
망원경을 든 손마저 떨렸던 탓인지,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네.
이녹은 갑판 위에 서서 손을 마구 흔들었지만
이윽고 배는 멀리 사라져버렸네.
2
애니는 수평선 너머로 배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이녹을 떠나보냈네.
마치 남편과 사별(死別)이라도 한 것처럼 슬펐지만,
애니는 남편 뜻에 따르려고 안간힘을 다했네.
하지만 애니는 장사는 데 서툴렀네.
물건을 흥정할 줄도 잔재주 부릴 줄도 모르고
거짓부렁할 줄도 몰랐네.
게다가 적당히 과장하거나 깎는 것도 할 줄 몰랐으니
‘이녹이 이걸 보고 뭐라고 말할까?’하는 생각뿐이었네.
어려움과 생활이 쪼들리는 가운데에도
물건을 자신이 산 것보다 더 싸게
내어주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네.

애니도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슬픔에 잠겨
언제 올지 모르는 소식을 낙으로 삼고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고 쓸쓸한 나날을 보냈네.

태어날 때부터 병약한 막내아이,
엄마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자꾸 쇠약해져 가기만 했네.
어미의 정성인들 어찌 변했을까마는
가게 일로 간호를 제대로 못한 탓인지,
병에 너무 지쳐버린 탓인지,
아니면 의사를 불러올 만한 돈이 없었던 탓인지,
아이는 바둥바둥 그냥 지내오는 동안
애니가 미처 모르는 순간에
새장에서 빠져나온 새처럼,
그 귀여운 아이는 애처롭게도
저 세상으로 날아가버렸네.
아무 말도 없이.


애니가 막내아들을 묻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마음씨 착한 필립은 그녀가 몹시 걱정되었네.
이녹이 떠난 후 한 번도 애니를 찾아간 적이 없었던 것이네.
‘그래, 한 번쯤 찾아가자.
어쩌면 위안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리하여 그는 애니를 찾아갔네.
텅 빈 가게를 지나
안으로 들어간 그는 방문 앞에 잠시 머뭇거렸네.
문을 세 번이나 노크했으나
인기척이 없기에 들어가보니,
애니는 막내아들을 묻은 슬픔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사람들을 대할 마음마저 버리고
얼굴을 돌려 벽을 향해 흐느끼고 있었네.
필립은 선 채로 더듬더듬 말을 꺼냈네.
‘애니,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소.’

‘이토록 슬픔에 겨운 나에게 부탁이라고요?’
애니의 탄식하는 소리에 필립은 그만 부끄러워졌네.
그러나 그는 가엾은 생각을 억누를 수 없어서
애니 곁으로 다가가며 말을 이었네.

‘당신의 남편 이녹이 평소 바라던 것을
이야기하려고 찾아온 거요.
당신은 우리들 중 가장 훌륭한 남자를 남편으로 삼았소-
한번 뜻을 세워 나가면
끝가지 해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나이를 말이오.
그런 그가 왜 당신을 홀로 남겨놓고 떠났을까요?
즐기기 위해서일까요? 아니오, 결코 아니오.
돈을 벌어서 아이들을 더욱 훌륭히 기르기 위해서요.
그래요, 그것이 그의 희망이자 기쁨일 거요.

만일 그가 돌아와 소중한 시간이
이처럼 헛되이 흐른 것을 안다면
여단 서운하고 섭섭하지 않을 것이오.
설령 죽어서 무덤 속에 묻혀 있다 해도,
들에 놓아먹이는 망아지처럼
아이들이 거칠게 자라는 것을 안다면
더더욱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오.

애니,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는 어릴 적 동무 아니오?
남편과 아이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돈이 필요하다면 내게 부탁하시오, 부디 사양 말고.
이녹이 돌아왔을 때 갚아도 좋으니 말이오-
애니, 알다시피 나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지 않소?
내가 당신의 자녀를 학교에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오.
이 부탁을 들어달라고 당신을 찾아온 것이오.’

그때 벽을 향하고 있던 애니는 대답했네.
‘저는 당신 얼굴을 도무지 대할 수가 없어요.
제가 어리석은 여자로 보일까봐서요.
당신은 저를 찾아주셨을 때,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어요.
이젠 당신의 친절한 마음이 제 가슴을 매이게 하네요.
하지만 이녹은 꼭 살아 있을 거예요.
꼭 살아 있다고 믿어져요.
돈은 어느 때고 남편이 갚아드리겠죠.
하지만 이 친절을 어찌 돈으로 갚을 수 있을까요?’
필립은 애니의 말을 듣고 물었네.
‘그럼, 내 부탁을 들어주는 거요?’

애니는 몸을 일으켜 필립의 얼굴을
눈물어린 눈으로 정말 상냥한 그 얼굴을 쳐다보았네.
애니는 그에게 은총이 내리길 기원하면서
필립의 손을 열정적으로 잡고는
다른 방으로 도망치듯이 사라져버렸네.
여기에 기운을 얻어 필립은 집으로 돌아왔네.

필립은 애니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필요한 책 가지를 사주었네.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었네.
하지만 필립은 애니를 위해
포구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소문을 걱정해서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집을 찾아가지 않았네.
하지만 철따라 야채며 과일이며,
울타리에 일찍 핀, 또는 늦게 핀 장미꽃이며,
토끼 모피를 아이들 편에 보냈네.
또한 생색을 내는 말을 삼가고
얼마나 곱게 찧어졌나 보아 달라면서
방앗간 밀가루도 자주 보내주었네.


필립은 그녀의 속마음을 알 길이 없었네.
애니는 그가 찾아와도
고마운 마음 넘쳤으나 차마 털어놓지 못하고
한 마디도 않고 그저 잠자코 있었네.
그러나 아이들은 필립을 더없이 좋아하며 따랐네.
집들이 늘어선 길모퉁이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는
뛰어와 기뻐해주는 그를 진정 좋아하고 따랐네.
아이들은 필립의 방앗간과 집이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여겼네.
아이들은 언짢은 일, 기쁜 일 모두 이야기하며
그를 ‘필립 아빠’라 부르게 되었네.
아이들이 아빠 이녹을 잊어버리고
필립을 따르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네-

이녹은 마치 꿈이나 환영처럼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새벽녘 길가에 흐릿하게 보이는
사람의 그림자처럼 덧없이 여겨졌기 때문이네.
이렇게 이녹이 집을 뒤로 하고
고국을 떠난 지 어언 10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그의 소식 전혀 알 바 없었네.

어느날 저녁놀이 질 무렵,
아이들이 개암나무 열매를 주우러
숲 속에 가겠다고 졸라대어 애니도 마지못해 나섰네.
또 여느 때처럼 아이들이 ‘필립 아빠’와 같이 가자고 조르려고 가보니,
필립은 온통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하얗게 되어 있었네.
‘필립 아빠, 같이 가요, 네?’
아이들이 졸라대자 그가 싫다고 대답했네.
그러자 아이들이 그의 소매를 끌고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짓궂게 졸라대므로
껄껄 웃으며 못 이긴 척 그들 일행을 따라나섰네.

산길 중턱쯤 올라 비스듬히 비탈진 가장자리 부근
골짜기의 수풀 성긴 곳에 이르자
다리가 아픈 애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네.
‘잠깐만 쉬어 가요’
필립은 나란히 앉아 쉬었지만,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마치 다람쥐새끼처럼
그들의 곁을 떠나 골짜기 아래로,
조그만 잎새를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개암나무 숲으로 뛰어가 뿔뿔이 흩어졌네.
저마다 쭈그러든 황갈색 열매를 따기 위해
휘어든 나뭇가지를 휘어잡기도 하고 꺾어대면서
수풀 이쪽저쪽에서 소리치고 떠들었네.

그러나 필립은 애니가 곁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 옛날 상처 입은 생명체처럼 몸을 숨겨야 했던 옛 슬픔을
마음에 되새기고 있었네.
드디어 필립이 고개를 들어 애니를 바라보았네.
‘애니, 아이들이 저 숲에서 뛰어놀고 있는 것을 보오.’
그가 말했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네.
‘피곤하오, 애니?’
필립이 거듭 묻자, 애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네.
그 까닭을 눈치챈 필립은 어떤 노여움을 느끼면서 말을 이었네.
‘이녹이 탄 배는 바다에 침몰한 거요. 침몰-
왜 당신은 돌아오지 않는 배를 기다리면서 탄식하며
자기 몸을 망치고,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려는 거요.’
그러자 애니가 대답했네.
‘그렇지 않아요. 배는 돌아올 거예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웬일인지 아이들 목소리를 들으니 더 쓸쓸해지네요.’

필립이 애니에게 다가앉으며 말했네.
‘애니, 내가 한 가지 생각하고 있는 일이 있오.
예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일이오.
언제부터 내 가슴속에 깃들였는지 모르지만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소.
애니, 10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이녹이
아직 살아 있다고는 도무지 바랄 수 없는 일,
그러니 ? 내 말을 들어보오.
의지할 곳 없이 가난하게 살고 있는 당신을 보면
내 마음은 쓰리고 아프오.
솔직히 마음껏 도와주지도 못하고-
여자들은 남자의 마음을 잘 알아차리니까
아마도 내 말뜻을 잘 알 거요.
자, 나의 아내가 되어주지 않으려오, 애니?
알다시피 아이들은 나를 아빠처럼 따르고,
나도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다오.
만일 당신이 나의 아내가 되어준다면,
이처럼 슬프고 괴로운 세월을 보내지 않아도 되오.
하느님도 분명 허락하실 거요.
잘 생각해보오, 애니.
나는 넉넉한 데다 모실 부모도, 아이도, 귀찮은 연고자도 없다오.
마음 아픈 것은 당신과 당신의 아이들뿐
더욱이 우린 소꿉동무이지 않소?
그리고 난 당신을 오래 전부터 사모해왔고.’
애니는 상냥하고 나직하게 말했네.
‘당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보내주신 천사예요.
하나님의 은총이 당신에게 깃들이길 간절히 빌어요.
필립,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나보다
더 어여쁘고 행복한 분을 점지해주실 거예요.
사람이 한평생 두 번씩이나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내게서 뭘 바라는 거지요?’
‘이녹처럼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나는 만족하오.’
필립이 말하자 애니는 겁에 질려 크게 소리쳤네.
‘오, 필립, 그만.
만일 이녹이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래요, 이녹이 안 돌아올지도 몰라요.
하지만 1년만 기다려 주세요. 1년은 그리 긴 세월도 아니에요.
1년이 지나면 나도 좀더 현명해지겠죠.
그러니 1년만 기다려주세요.’
필립은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네.
‘애니, 이제껏 긴 세월을 기다려왔소.
1년쯤은 얼마든지 더 기다릴 수 있소.’
애니가 외쳤네.
‘그래요, 약속해요. 1년만 지나면…….’
필립이 대답했네.
‘얼마든지 기다리겠소.’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네.
필립은 문득 고개를 들어
서산으로 희미한 저녁놀이 덴마크 사람들의 무덤가로 스러져가는 것을 바라보았네.
이윽고 밤공기가 차가워지자 애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멀리 수풀 속에 있는 아이들을 불렀네.
아이들이 개암나무 열매를 한 아름씩 안고서 올라오자
그들은 모두 포구 마을로 내려갔네.
필립이 애니의 집 앞에 이르자 발걸음을 멈추고
손을 잡으며 상냥하게 말했네.
‘애니, 아까 내가 한 말 대문에 마음이 심란했을 것이오. 내 잘못이오.
당신에 대한 나의 마음은 언제나 그대로요. 하지만 당신은 자유요.’
애니가 울면서 대답했네.
‘제 마음도 그대로예요.’

애니는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일처럼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살림살이를 꾸려나가야 했네.
그녀가 필립이 자신을 오래 전부터 사모해왔다는 말을,
그 말을 되새기고 있는 동안에 세월은 어느덧 화살처럼 흘러서
또다시 가을이 찾아왔네.
필립은 그때의 약속을 떠올리며 애니를 찾아왔네.
‘벌써 1년이 지나갔나요?’
애니가 묻자 필립이 대답했네.
‘개암나무 열매가 다시 여물었소.
자, 나와 보시오.’
그러자 애니가 말했네.
‘기다려주세요. 생각할 일도 많으니 한 달만 기다려주세요.
꼭 약속해요. 한 달만 참아주세요.’
평생을 두고 못 잊을 갈망 눈빛에 가득 담고
필립은 술 취한 사람의 손처럼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네.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소.
당신 마음이 내킬 때까지 기다리겠소.’
애니는 그에 대한 연민 때문에 울고 싶었네.
그 뒤로도 그녀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하루이틀 미루었네.
필립의 진심을 시험하는 동안
어느새 반년이 꿈처럼 지나가버렸네.

이렇게 되니 남의 말 좋아하는 포구 사람들도
자기 걱정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초조해하기 시작했네.
어떤 사람은 필립이 애니를 조롱하는 거라고,
어떤 사람은 애니가 필립의 마음을 끌려는 수작이라 생각했네.
또 어떤 사람은 두 사람을 비웃으며
서로의 마음조차 알지 못하는 바보들이라고 웃어넘겼네.
또 어떤 사람은, 뱀처럼 악한 마음이 똬리를 틀고 있는 사람은
두 사람간의 정사 정도로 치부했네.
애니의 아들은 잠자코 있었지만,
딸은 엄마에게 필립 아빠와 결혼하여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라고 권했네.
필립의 장미빛 얼굴이 눈에 띄게 여위어갔네.
애니는 이 모든 것이 자기 탓이라 여겨져
마음이 저리고 아팠네.

마침내 어느 날 밤이었네.
애니는 자지 않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네.
‘이녹은 도대체 어디에 있나요?’
밤이 깊어 어둠에 싸이자
애니는 마음의 공포 못 이겨 자리에서 일어나 등불을 켜고는
필사적으로 성서를 움켜쥐고 확 펼쳐들었네.
우연히 그녀의 손가락으로 짚은 구절에

‘종려나무 아래에’라고 씌어 있었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네.
아무런 뜻도 없는 구절이라 여겨
그녀는 성서를 덮고 잠이 들어버렸네.
꿈속에는 이녹이 언덕의
종려나무 아래에 자리잡고 앉아
태양을 머리 위에 이고 있었네.
그걸 보고 애니는 생각했네.
‘남편은 이미 죽은 거야.
남편은 천국에서 호산나를 부르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
거기에는 천국의 태양이 빛나고 있고, 종려나무 주위에는
행복한 사람들이 모여 천국의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 거야.’
이때 애니는 꿈에서 깨어났네.
그녀는 마음을 정하고 필립을 불러 말했네.
‘우리 결혼을 책망할 사람은 없다고 봐요’
그러자 필립은 대답했네.
‘하나님을 위해, 우리 둘을 위해 가까운 날 식을 올립시다.’

이리하여 마침내 필립과 애니는 결혼했네.
축복의 종소리는 온 거리에 울려 퍼졌네.
그러나 애니의 마음은 여전히 개운하지 않았네.
길을 걸을 때 어디선가 가벼운 발소리가 다가오는 듯하고,
또 무언지 모르지만 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네.

애니는 집에 홀로 남아 있는 것도
또 혼자서 밖에 나가는 것도 싫었네.
집으로 돌아와선 안으로 들어가기 두려워
대문 자물쇠에 손을 대고 머뭇거리기도 했네.
필립은 그녀의 상태로 보아서
그와 같은 불안감과 두려움은 흔히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네.
더욱이 아기까지 가졌으니……
머지않아 필립의 아기가 태어났네.
그러자 애니의 마음도 한결 새로워지고
엄마로서의 새 마음도 우러났네.
마음씨 착한 필립이 더없이 좋게 느껴지고
그전의 개운치 못한 기분은 가시고 말았네.
3
이녹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가 탄 배 ‘행운호’는 평온한 항해를 계속했네.
동쪽 방향으로 부서지는 비스케이만의 거친 파도에
한때 배가 휩쓸릴 뻔도 했네.
열대지방의 바다는 잔잔하여 미끄러지듯 지나쳤네.
하지만 희망봉 근처에서는 변덕스럽게 불어대는 바람에
오랫동안 배가 요동을 쳤고,
또다시 열대지방의 넓은 바다를 지나고 나니
하늘의 은혜로운 입김처럼 바람이 불어와
여러 섬들을 지나쳐 드디어 동양의 항구에 닻을 내렸네.
이녹은 거기서 장사를 시작했네.
그곳 시장에서 인기 있는 인형을 사들이기도 하고
또 아이들을 위해 금박을 입힌 장난감 용을 사기도 했네.

돌아가는 여정은 고생이 아주 심했네.
처음엔 끝없이 넓고 잔잔한 바다에
위풍당당한 뱃머리를 앞으로 하면서
일체의 흔들림도 없이 노깃 너머를 응시하면서 나아갔네.
얼마 안 되어 야릇한 바람이 일더니
이내 광풍이 되고 급기야 폭풍이 되어
컴컴한 하늘 아래 배를 사정없이 휘몰아쳤네.
그리곤 ‘암초다!’하고 소리지를 사이도 없이
배는 수많은 사람들과 침몰하고 말았네.
겨우 이녹과 그의 동료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을 뿐이네.

어두컴컴한 한밤에서 새벽까지 그 세 사람은
물에 뜬 통나무 조각에 매달려 몸을 싣고 둥둥 떠돌아다니다
아침 무렵 어느 조그만 섬 기슭으로 떼밀려왔네.
그 섬은 호젓한 바닷가의 적막하기 그지없는 작은 섬이었네.
이 무인도에는 탐스런 과일이며,
밤 같은 토실한 열매며, 자양분 있는 푸나무 뿌리도 있고,
또 사람을 두려워 않는 새와 짐승들이 우글거렸네.
얼마든지 손쉽게 잡을 수 있었으므로
먹을 것에는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곳이었네.
드넓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골짜기에
세 사람은 오두막을 짓고
널따란 종려나무 입사귀를 따서 지붕을 이었네.
오두막이라고 하나 절반은 자연 그대로의 암굴,
그리하여 의지할 곳 없는 세 사람은
이 섬을 에덴동산이라 여기며
끝없는 여름을 부족함 없이 보내고 있었네.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어린 소년이
갑작스레 배가 침몰하던 날 밤 부상으로
송장처럼 3년의 세월을 앓아누워 있었으므로
그 소년을 혼자 내버려두고 갈 수가 없었네.
그 소년이 죽은 뒤 남은 두 사람은
땅에 묻혀 있는 통나무 하나를 발견했네.
이녹의 동료는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인디언들의 방법대로 통나무 한가운데를 파서
배를 만들려다가 일사병에 걸려 죽고 말았네.
이녹만이 그곳에 외톨이로 살아남아
동료의 죽음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고로 읽었네.

산마루까지 나무로 숲을 이룬 산,
하늘로 오르는 길이라 여겨질 만큼 높고 아득한 저 초원,
숲 아래로 구불구불 휘도는 길,
하늘거리는 야자나무 끝에 늘어진 새털 깃,
번갯불처럼 날아가버리는 벌레며 새들,
혹은 굵은 나무줄기를 감거나
바다 기슭까지 넝쿨 뻗는 활짝 핀 배꽃의 화려하고 아롱진 색채,
이 모든 것들이 이녹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네.
하지만 이녹이 너무나 그리워하는 얼굴은 아무 데도 없고
그리운 목소리 또한 들을 수 없었네.

난파 선원이라도 있을까 여기저기 바다 기슭을 헤매고,
멀리 지나는 배라도 있을까 바다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다볼 때에도,
들리는 건 가없는 하늘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나는
물새들의 우짖는 소리뿐이었네.
암초에 부딪쳐 굽이쳐 도는 파도의 울림,
머리 위로 뻗친 가지 끝으로 꽃 냄새를 풍기는 미풍의 속삭임,
혹은 산골짜기에서 바위틈으로 흘러내려
바다로 들어가는 물소리뿐이었네.

하루해가 가고 또 하루해가 가도
기다리는 배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네.
날마다 종려나무며 전나무 잎 사이로
아침해는 햇살을 쏟아 부으며
동쪽 바다위로 타오르고, 서쪽 바다 위로 스러졌네.
이윽고 밤하늘 반짝이는 큰 별들 빛나고
공허하게 울리는 해조음 소리 떠들썩하며,
아침해가 붉게 타오르고-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배는 보이지 않았네.
때로는 놀라기 잘하는 금빛 도마뱀조차
그의 몸으로 기어오른 채 달아나지 않을 정도였네.

몸 하나 까닥 않고 빤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온갖 환영(幻影)이, 고향의 많은 환영이
얽히고 설킨 채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네.
아니, 그 스스로가 하나의 환영으로 나타나
적도 너머 아득히 먼 북녘 땅에서
햇빛 침침한 하늘 밑 섬 부근,
친한 사람, 그리운 일들이 추억 속에 떠올랐네.
천진스럽고 귀여운 자식들, 그 더듬거리는 말소리,
그리고 사랑하는 애니, 자그만한 나의 집
길거리의 옛날 그 언덕, 풍차 도는 방앗간,
나무 사이로 뻗어나가는 비좁은 길,
공작새 모양의 푸르디푸른 수송나무,
조는 듯한 고요한 저택, 타고 돌아다니던 말,
어쩔 수 없이 팔아버린 조그만 배,
살갗에 스며드는 차가운 동짓날 새벽녘,
촉촉이 이슬비 젖는 어둠침침한 골짜기,
갑작스럽게 퍼붓는 소나기에 한 잎 두 잎 지는 마른 잎새들,
남빛 바닷물의 들고나는 나직한 신음소리,
이녹은 이 모든 것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네.

또 어느날,
이녹은 귓결에 아득히 먼 곳에서 희미하게
고향의 성당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네.
종소리를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이녹은 부들부들 떨며 벌떡 일어났네.
그러나 이 섬에 살게 된 저주스러운 자기 신세를 생각하고
너무 고독하고 적막함을 참고 견뎌내기 어려워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네.
그러나 어디를 가나 기도드리는 이를 위로하시고
쓸쓸한 생각을 지워주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고뇌를 호소하며
살아 있는 목숨만을 지탱해가고 있었네.

이리하여 1년 또 1년, 가뭄과 장마가 여러 번 오가고
이녹의 머리칼은 희끗희끗해져 갔네.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고,
그리운 고향의 흙을 밟고 싶은 그의 희망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네.
이녹이 뜻밖의 구조를 받아
쓸쓸한 운명을 면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네.

‘행운호’처럼 뜻하지 않은 역풍에 휩쓸려서
식수마저 떨어져 허둥대던 배 한 척이 파도 길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이 섬의 난바다 부근에 닻을 내렸네.
동녘 하늘이 환히 트인 새벽녘
배의 키잡이가 섬을 둘러싼 아침 안개 속에서
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산턱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찾아내었네.
그리하여 한 무리의 뱃사람들이 섬으로 보내졌으며,
섬에 오른 뱃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맑은 냇물이며 샘터를 찾아 바닷가에서 떠들고 있을 때,
산골짜기에서 홀로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사람을 보았네.
텁수룩한 머리칼을 헝클어뜨리고 긴 수염 휘날리며
검게 탄 몸에는 야릇한 것을 걸치고 있었네.

아무리 보아도 이세상 사람같이 생각되지 않았네.
말도 똑똑히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다가
까닭 모를 소리 온갖 손짓 발짓으로 하는 모습은
바보 천치가 아닌가 여길 정도였네.
그러나 이녹은 앞장서서 사람들을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곳으로 데리고 갔네.
사람들 틈에 끼여 이야기 듣는 동안 오래도록 굳은 혀가 돌아서
그는 가까스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게 되었네.
큰 통 작은 통에 물을 가득 채워 배로 돌아갈 때
사람들은 이녹을 같이 데리고 갔네.

그는 그다지 신통치 않은 목소리로
그간 겪었던 일을 더듬더듬 이야기했네.
처음엔 모두들 이녹의 이야기가 믿기 어려웠지만
차츰 흥미로워지고 나중엔 감동하여 가엾게 생각되었네.
뱃사람들은 자기 옷을 벗어 입혀주고,
뱃삯도 받지 않고 그를 고국으로 데려다 주겠노라 나섰네.
그리하여 이녹은 뱃사람들과 어울려 부지런히 일했네.
고독감과 지루한 생각 떨쳐버리기 위해서……
고향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고
뭔가 궁금한 걸 물어보아도
이녹이 알고 싶어하는 걸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네.

게다가 풍랑에 견디기 어려운 낡은 배라서
이모저모로 잔손만 가고 항해는 사뭇 지루하기만 했네.
짜증스러운 열풍 불어올 때마다
바람보다도 배보다도 그의 생각은 앞질러 가지만 했네.
달도 별도 없는 어두운 밤하늘 아래
훤한 해안선 벼랑 저쪽에서 불어오는
고향 땅 이슬 젖은 풀잎의 향긋한 아침 바람을
미칠 듯이 가슴속 깊이 들이마시니,
열띤 가람처럼 온몸 핏속에 스며드는 듯싶었네.
바로 그날 아침,
배의 선장과 선원들이 이녹을 가엾게 여겨
저마다 몇 푼씩 거두어서
외로운 인고의 손에 쥐어주며 위로하는 것이었네.
그러고 나서 해안을 따라 항로를 잡아 나섰네.
이녹을 내려준 곳은 몇 해전
자신이 출항했던 바로 그 항구였네.
4
이녹은 누구에게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집 쪽으로 향했네-
아아, 집이라…..대체 그에게 집이 있단 말인가?
밝은 오후 햇빛은 따사로웠지만
추위는 뼛속 깊이 스며들었네.
이윽고 두 군데 언덕이 끊어져 나가
항구 둘이 바다로 열린 부근으로부터
바다 건너온 안개가 밀려오고 있었네.
안개가 주위를 잿빛으로 덮어 앞길을 막고,
양편으로 늘어선 숲과 밭, 거친 들의
시들어 빠진 모양이 조금씩 보일 따름이었네.
벌거벗은 나뭇가지 위 방울새 슬피 우짖고
마른 잎새는 자기 무게를 못 견디고 땅에 떨어져 나뒹굴었네.
안개비는 점점 짙게 내리고 어둠도 더욱 깊어갈 무렵.
안개비에 희미해진 커다란 등불들이 환히 눈앞에 비치자
이녹은 그토록 그리던 고향 땅에 들어서 있었네.

이녹은 가슴속에 온갖 불길한 일을 더듬으며
돌길 내려다보며 언덕의 좁은 길을 천천히 내려갔네.
사랑하는 애니와 같이 살던 집으로.
아이들이 태어난 집으로 돌아왔지만,
창가엔 불빛조차 비치지 않고 사람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네.
안개비를 통하여 바라보니,
‘팔 집’이라는 흰 종이쪽만 나붙어 있었네.
‘죽어버린 걸까, 아니면 다른 이에게 시집이라도 간 걸까?’

이녹은 옛날 자구 다니던 선술집을 찾으려고
좁은 선창을 행해 내려갔네.
그 선술집은 앞면을 세모난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낡은 집이었네.
받침대로 여기저기 괴어 놓고 벌레 자국도 눈에 띄어
이제는 헐어버렸으리라 여겼네.
하지만 이 선술집 주인은 돌아가고
과부 미리엄 레인이 날로 줄어드는 영업이나마
가게를 그대로 꾸려나가고 있었네.
한때는 단골 뱃사람들이 드나들던 가게로 번창했지만,
예전의 경기 어디 갔는지 지금은 시들할 뿐이었네.
그러나 아직도 나그네를 위한
잠자리는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이녹은 이 선술집에 며칠 동안 머물렀네.

미리엄 레인은 사람 좋고 싹싹하였네.
이녹이 말도 없이 종일 방에만 있는 게 딱했던지
어느 날 방으로 찾아와서는
해마다 포구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네.
구릿빛으로 그은 데다 허리조차 구부정하여
그가 이녹인 줄 미처 모르고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그녀는 이녹의 집안 이야기도 들려주었네.
어린 젖먹이가 죽은 이야기며
날로 궁핍해진 애니의 신새를 보다 못해
필립이 애니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 공부시켜준 이야기며
또 오랜 세월에 걸친 애니에 대한 필립의 사랑,
애니는 애써 결혼을 미루었으나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고 필립의 아기까지 낳았다는
긴 이야길 실꾸리 풀 듯 늘어놓았네.

하지만 이녹은 아무런 표정없이 그 긴 이야기를 듣고 있었네.
이 모습을 보아서는 얘기하는 노파는 재미있는 듯 싶으나
듣고 있는 사내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네.
‘가엾게도 이녹은 배가 난파해서 지금 행방불명이랍니다’하고
노파가 그 긴 이야기를 끝맺었을 때,
이녹은 희끗희끗한 머리를 슬프게 흔들며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되뇌었네.
‘난파해서 행방불명이다’
가슴속 깊이 한 번 더 이 말을 되뇌었네.
‘행방불명이다’라고.

그러나 이녹은 한 번만이라도 아내의 얼굴이 다시 보고 싶었네.
‘단 한 번 만이라도 아내의 사랑스런 얼굴을 보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네.
어느 날 저녁 이녹은 언덕 쪽으로 올라갔네.
구름 한 점 없고 바람도 불지 않으며
동짓달 해도 저물어갈 무렵,
언덕에 올라 풀밭에 앉아서
산기슭으로 퍼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칠 줄 모르는 추억의 물결이
가슴속으로 밀려들어
그는 참을 수 없는 기분에 빠져들었네.

필립네 집은 앞으로 길이 나 있고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네.
뒤쪽엔 들판으로 통하는 작은 사립문.
네모나게 벽을 둘러싼 아담한 뜰에는
잡초와 상록수들이 무성히 자라나 있었네.
그 안에는 늙은 수송나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자갈을 딴 오솔길이 그 둘레로 뻗어
뜰 한복판엔 또 하나의 좁은 길이 나 있었네.
그러나 이녹은 뜰 한복판에 있는 길을 피하고
수송나무 뒤쪽으로 숨어 벽을 끼고서
발자국 소리 죽여 창문으로 들여다보았네.
아아, 그 광경은 보지 말 것을!
하긴 이녹과 같이 슬픈 운명을 타고난 사나이에게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을지 모르지만……

깨끗이 닦은 테이블 위에는
도자기며 은그릇 등이 눈부시게 반짝이었네.
난로에는 장작불이 벌겋게 타오르고
그 오른쪽에는 옛날 자신이 업신여겼던 구혼자 필립이
뚱뚱보 몸과 윤기나는 얼굴로
자기 아기를 무릎에 앉혀 어르고 있는 것이었네.
정말 의붓 아빠라도 낯이 익으면 아빠인가?
이 아버지 등뒤엔 키가 크고 예쁜
그 옛날 애니의 모습을 닮은 금발의 소녀가,
소녀는 높이 쳐든 손끝에 고리를 단 한 줄의 실을 흔들며
젖먹이 꼬마를 필립과 어르고 있었네.
젖먹이는 작은 두 손을 내밀어서
구슬로 된 고리를 붙들었다가는
그만 놓치고 또 놓쳐 가족들을 웃기고 있었네.

난로 왼편엔 그 아이를 낳은 애니가
이따금 젖먹이 꼬마를 건너다보며,
이따금 자기 곁에 앉아 있는
키 크고 튼튼한 사내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뭐라고 속삭이며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네.
이녹은 죽음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이제는 자신의 아내가 아닌 그녀를 바라다보았네.
그 아비 무릎에 안긴 아내의 아이이면서도
또한 그의 아기가 아닌 젖먹이 꼬마를 바라보았네.

평화롭고 즐거운 가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네.
그의 아들이 늠름하게 자란 모습도 보았네.
자기와 자리를 바꿔 자기 권리를 손에 쥐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으며
집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사나이도 바라보았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그 말,
진작에 미리엄 레인으로부터 들어 알고는 있었네.
그때 이녹은 몸을 부르르 떨며 비틀거리다
나뭇가지를 손으로 움켜잡고 꺼질 듯한 소리로 외치고 싶었네.
만일 소리라도 친다면 심판 날의 나팔 소리와 같이
난롯가의 즐거운 꿈을 짓밟아 놓고 말았을 것이네.

한 발 두 발 물러나는 발걸음에도
자갈 소리 내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도둑과 같이 발길을 돌렸네.
만일 슬픔이 눈에 아득해 그만 쓰러져
그 바람에 자기를 알아본다면 큰일이라
벽을 끼고 더듬더듬 사립문께로 물러 나왔네.
마치 병자의 방문이라도 다루듯
넌지시 열었다 닫아놓고
황량한 들판으로 뛰쳐 나갔네.
들판으로 나와서 그는 무릎 꿇고 기도 드리려 했으나
무릎 힘도 빠져 그만 땅바닥에 쓰러져
손끝을 진흙땅에 파묻은 채
마음속으로 울부짖으며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네.

‘오오, 참으려야 참을 수 없는 이 괴로움이여,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저 사람들은
나를 섬에서 이 포구로 데려왔는가?
오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은혜로운 구세주여,
당신은 내가 무인도에 홀로 있을 때
나의 출렁이는 마음 붙들어주셨습니다.
이제 잠시만이라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여,
쓸쓸해서 견딜 수 없는 나에게 힘을 주소서.
나를 도와주시고 내 마음을 격려해주시어
내 아내에게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그런 마음을 죽는 날까지 지니게 해주소서.
아내의 평온한 마음을 헝클어놓지 않도록 힘을 주소서.
나의 아이들에게 조금쯤 말을 붙여도 괜찮을까?
사랑하는 아이들은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아냐, 아냐, 결코 그래서는 안 돼.
그러면 내 정체가 드러날 것이 뻔해.
어미의 얼굴을 닮은 딸에게도, 아들에게도
아비로서의 키스는 허락되지 않을 거야.’

순간 이녹은 말과 생각이 뒤섞이며 체력을 소진하여
잠시 정신을 놓고 쓰러졌네.
얼마 후 이녹은 다시 몸을 일으켜 선술집을 향하여
무거운 발길을 끌며 터벅터벅 걸어갔네.
이녹은 길고 좁다란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마치 노래 후렴구라도 부르듯 이 말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네.
‘그래, 아내에게 알리지 말자, 결코 알리지 말자.’

이녹은 슬픔에만 젖어 있는 것은 아니었네.
그이 굳은 결심이 그를 버티게 해주었네.
확고하고 깊은 신앙이 있고,
가슴속 맑은 목숨의 샘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그칠 줄 모르는 기도의 마음이
이 세상 거친 파도 이루는 바닷물 속에서
솟구치는 맑은 물과도 같이
쓰라린 세상을 참고 견딜 수 있도록
그에게 차분한 생각을 갖게 했었네.

이녹은 선술집 노파 미리엄에게 말했네.
‘당신이 언젠가 얘기한 저 방앗간 여인은
전남편이 아직 살아 있지나 않을까 걱정하지는 않나요?’
‘걱정이라……가엾게도 너무나 걱정해서 고통스러울 정도라오.
이녹이 죽은 것을 똑똑히 보았노라고
당신이 말해줄 수만 있다면, 애니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겠소.’
노파의 이 말을 듣고 이녹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내 죽고 나서야 알려주리라.
그때까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기로 하자.’
이렇게 다짐하고 이녹은 생활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네.
남의 도움받는 것을 사나이답지 않게 여기며,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그였기 때문에
어느 때는 통(桶)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목수 노릇을 하기도 했네.
또 어느 때는 어부들을 위해 그물을 짜기도 했네.
그 시절만 해도 옛날-
하찮은 짐을 싣고 오는 뱃전 높은 범선(帆船)의
짐을 실어주기도 하고 부려주기도 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겨우 꾸려 나갔네.

이렇게 꾸려가고는 있었지만 이 짓은
자기 몸 하나를 위해서 하는 노동이었으며,
희망도 없고 살아가는 보람도 없는
목숨이 없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네.
이리하여 1년의 세월이 흘러갔네.
이녹이 고국에 돌아온 지 1년쯤엔
까닭 없이 몸이 고달프고 시름시름 앓는 날이 많아졌네.
언제부터인지 부쩍 쇠약해지더니
오래지 않아 일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네.

바깥출입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은 채 세월을 보내다가
끝내 병석에 눕고 말았네.
그러나 이녹은 마음마저 약해지지는 않았네.
그는 용케 그 병을 견뎌내었네.
일체의 종말을 알리는 죽음의 새벽을 엿본 그의 기쁨은,
점점 높이 오르는 질풍에 휩쓸려,
검은 구름 사이로 단념했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구원의 노를 저어오는 작은 쪽배를 발견했을 때의
난파선에 매달린 사람들의 기쁨인들
지금의 이녹의 기쁨을 앞지를 수는 없었네.

자기에게 지새어 오는 죽음의 하늘에서
맑은 희망이 비쳐왔기 때문이었네.
‘ 내 목숨이 다한 뒤, 아내에게 알리기로 하자.
죽을 때까지도 지극히 그리워하며 사랑했었음을!’
이녹은 이렇게 생각한 끝에 큰소리로
선술집 노파 미리엄 레인을 방으로 불렀네.
‘이제 내 가슴속 비밀을 말씀드리려 하니,
말하기 전에 맹세해주시겠소?

성서에 걸고 내가 죽은 것을 눈으로 볼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겠노라고 말이오.’
‘죽다니오?’
사람 좋은 노파 미리엄이 놀라 소리질렀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당신 병은
내 반드시 낫게 해주리다.’
‘맹세해주시오, 성서에 걸고.’
엄숙히 이녹이 말하는 바람에
지레 겁먹은 노파 미리엄은 성서에 손을 얹고 맹세했네.
검은 눈동자 굴리며 이녹은 노파를 바라보았네.
‘이 포구에 살던 이녹 아든을 아시오?’
‘알다 뿐이오, 먼 데서도 그 사람이면 금방 알아볼 수 있지.
옳지, 길을 걷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뒤로 고개를 젖히고 앞만 보고 걷는 사나이였다오.’
그러자 이녹은 슬픈 목소리로 말했네.

‘그의 고개는 이미 높지가 않소.
지금은 그를 돌보아줄 사람도 없고요.
앞으로 사흘도 남아 있지 않은 목숨이니까 말하지만,
내가 바로 그 이녹이오.’
이 말을 듣자 너무 뜻밖의 일인지라
미리엄은 소스라쳐 소리질렀네.

‘아든이라고, 당신이? 거짓말이겠지.
아든은 당신보다 적어도 한 자는 더 키가 컸었는데.’
‘하느님께서 지금처럼 내 고개를 낮추셨습니다.
너무 슬프고 너무 쓸쓸해 나는 이렇게 풀이 죽어버렸지만,
그러나 의심 마시오, 나는 이녹이란 사나이요.
나의 아내는- 저 성(姓)이 두 번이나 바뀌어 지금
필립 레이의 아내가 된 그 여자를 나는 아내로 삼았소.
자, 앉아서 내 얘길 들어주시오. ‘
그러고서 이녹은 항해했던 이야기, 파선했던 이야기,
막막한 세월을 무인도에서 보냈던 이야기,
포구로 돌아와 창 너머로 애니의 행복한 모습을 몰래 본 이야기,
그런 뒤 그의 결심, 그 결심을 지켜온
처음부터 지금까지 긴 이야기를 미리엄에게 들려주었네.

이녹의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난 미리엄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네.
생각 같아선 이녹 아든이 이 포구로 돌아와
운명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괴로워한다고.
온 포구를 돌며 외치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이녹의 위엄에 눌리고 맹세에 묶여 그만두었네.
‘그러나 만일 할 수 있다면’하고 노파는 말했네.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당신의 귀여운 아이들을 만나보오.
아든, 내 가서 만나게 해주리다!’
노파는 일어나서 부랴부랴 밖으로 나가려 했네.
노파의 말에 잠시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녹은 생각을 고쳐먹고 대답했네.

‘미리엄, 죽을 날도 머지 않은 때에
내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아주시오.
눈을 감기 전에 한 가지 내 소원이나 들어주시오.
자, 똑바로 앉아서
이제부터 내 말하려는 것을 들어주시오.
부탁하거니와, 만일 애니를 만나거든
이렇게 전해주시오.
애니를 마음껏 축복하면서,
애니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이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가로놓였으나
그런 대로-신혼 때처럼 그녀를 연모하면서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났노라고 말이오.

엄마의 모습의 닮은 나의 딸에게는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까지 그녀의 앞길을 축복하며
부디 행복하게 살라고 기도했노라 전해주시오.
또 아들에게도 축복의 말 거듭했노라 전해주오.
내 집의 행복을 걱정해준 필립에게는
그의 앞날을 위해 기도드렸노라 전해주시오.
사랑하는 아이들이 내 죽은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 하거든
두 아이 다 산 아비의 얼굴 모를 테니
와서 보아도 괜찮겠지요.

그러나 애니만은 절대로 오지 말도록…….
죽은 모습을 보면 먼 훗날까지도
나를 회상하고 탄식하며 괴로워할 테니까요.
생각하면 나의 피를 나눈 사랑하는 아이가…….그렇지요.
저 세상에서 이 못난 아비를 맞이해줄
아이가 하나 있군요.
이 한 움큼의 머리칼은 그 아이의 것이오.
내가 출항할 때 애니가 가위로 잘라 쥐어준 이 머리칼을
나는 이제껏 몸에 지니고 다녔다오.
이 머리칼을 무덤에까지 가지고 가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무릎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을
그 귀여운 아이를 곧 만날 수 있겠기에
나는 생각을 바꿨다오.
그러니 내가 죽거든 이것을 애니에게 건넸으면 합니다.
애니에게는 위안도 될 뿐 아니라, 그보다도 내가
정작 이녹 아든이라는 증거가 될 테니까요.’

그는 말을 맺었네.
미리엄은 모두 그러마 했지만, 그래도 못 미더워
이녹은 다시 한 번 눈을 크게 떠 노파를 바라보고
앞의 말 되풀이하며 자기 소원을 말했네.
다시 한 번 노파는 이녹에게 굳게 약속했네.

그로부터 사흘 밤-
이녹은 창백한 얼굴로 잠들었으며
미리엄은 밤새워 간호하면서 깜박깜박 졸았네.
그때 난바다 저 멀리에서 우르르…….
바다가 우는 소리가 들리며
이 조그만 포구의 집들을 흔들어 깨웠네.
이녹은 눈을 뜨고 일어나 두 손 내밀어
큰 소리로 외쳤네.
‘배다, 배다! 나는 구조되었다’
그러고는 벌렁 뒤로 넘어져 다시는 입을 열지 못했네.

그리하여 용감한 한 사나이의 영혼이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났네.
사람들은 이 포구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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