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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2일 23시 35분 등록

가을

그때 졸고 있는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 제르자빈

 

                                      푸쉬킨

 

1.

10월이 되었다 이제 수풀은

마지막 나뭇잎을 벌거숭이의 가지에서 떨어내고 있다,

가을 추위가 몰려온다-길은 얼어붙는다,

물방앗간 뒤에서는 아직 개울이 소리를 내면서 달음질치고 있지만,

못은 벌써 얼어붙었다, 내 이웃은

들판으로 사냥을 떠날 채비를 하느라 부산스럽다,

가을보리는 사냥에 들뜬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고

개 짓는 소리가 잠에 빠진 참나무숲을 깨운다.

 

2

지금이 내 철이다 나는 봄을 좋아하지 않는다,

눈섞임은 따분하다, 고약한 냄새, 진창-봄에 나는 병을 앓는다.

피가 느릿느릿 움직이고 마음과 생각은 우수로 답답하다.

나는 오히려 준엄한 겨울을 오히려 좋아한다,

겨울눈을 사랑하다, 달빛을 받으며

사랑하는 여자와 단둘이 날쌔게 자유로이 가벼운 썰매를 몰 때,

따뜻하게 몸을 감싼 환한 얼굴로

활활 불타올라 몸을 떨며 그녀는 그대의 손을 꼭 쥐리라!

 

3

스케이트 신고

얼어붙은 반들반들한 강의 거울 위를 미끌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겨울 명절날의 찬란한 떠들썩함?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반년이나 눈에 덮여 있다 보면

겨울밤을 자는 곰도

급기야는 질려버린다. 한평생을 그처럼

사랑하는 젊은 처녀들과 설매만 타고 돌아다닐 수는 없다,

이중창을 꼭 닫고 날로 가에서 뒹굴며 나날을 보낼 수만도 없다.

 

4

, 아름다운 여름이여! 나는 사랑하리라,

무더위와 먼지와 모기와 파리가 없다면,

너는 마음의 능력을 모두 죽여

우리들은 괴롭힌다, 우리들은 가뭄으로 시달리는 들판처럼 괴로워하며,

물을 실컷 마시고 상쾌한 기분에 젖으려고만 생각한다,

부꾸미와 술과 함께 이별의 술자리를 가졌던

겨울의 노파를 그리워하며

아이스크림과 얼음을 먹으며 그 추억에 잠긴다.

 

5

사람들은 보통 늦가을의 나날을 두고 잔소리를 한다,

하지만 나는, 독자여, 얌전히 빛나는

늦가을의 조용한 아름다움이 자랑스럽다.

제집에서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어린애처럼

그것은 내 마음을 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 해 가운데서 나는 이 철만 좋아한다.

그것은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허영심이 없는 사랑하는 사람인

나는 변덕스러운 꿈을 쫓으며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찾았다.

 

6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랴?

당신네가 때때로 폐병을 앓은 처녀에게 마음 끌리듯이

늦가을은 내 마음을 끈다. 죽음을 선고받은

가련한 처녀는 투덜거리지도 않고 노여워하지도 않으며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이고 있다,

시든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그녀는 무덤 구덩이가 입을 벌리는 것도 모르고 있다,

얼굴에는 아직도 적자색의 빛이 뛰놀고 있다.

오늘은 살아 있지만 내일은 없어질 것이다.

 

7

쓸쓸한 계절이여! 두 눈에 담긴 절망이여!

나는 너의 이별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린다-

나는 자연이 화사하게 시들어감을 좋아한다,

적자색의 황금빛의 옷을 입은 숲을,

그 그늘에서 살랑거리는 바람소리와 산뜻한 숨결을,

안개와 물결에 덮힌 하늘을

희미한 햇빛을, 첫 서리를,

저 멀리 다가오는 있는 잿빛 겨울의 위협을 나는 사랑한다.

 

8

가을마다 나는 새로이 꽃핀다,

러시아의 추위는 내 건강에 이롭다,

나날의 삶에 새로이 사랑을 느낀다-

잇따라 꿈이 날아가고 시장기가 찾아든다,

가슴속에서는 피가 가볍고 기쁘게 뛰논다,

희망이 들끊는다 나는 다시 젊어지고 행복해진다,

나는 다시 삶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진다 내 몸은 그렇게 되어있다.

(쓸데없는 산문적 표현을 용서하시라.)

 

9

말이 끌려오고 있다, 갈기를 흔들며

확 트인 널따란 벌판으로 말은 기수를 돌린다,

반짝이는 골짜기가 큰소리로 울리며 얼음이 튄다,

그러나 짧은 하루 해가 지고 잊혀진 난로에선

다시 불이 탄다 환한 불길이 타오르기도 하고,

불길이 천천히 가라앉기도 하여 그 앞에서 나는 책을 읽거나

마음속에 떠오르는 긴긴 생각에 잠긴다.

 

10

세상일을 잊고 달콤한 정적 속에서

나는 달콤하게 상상에 취한다,

그러노라면 시가 마음속에서 잠을 깬다

마음은 시의 물결에 짓눌리며

떨리고 큰소리를 내며 꿈속에서처럼

자유로이 흘러넘칠 출구를 찾는다

그대 보이지 않는 손님들의 한 무리가 찾아든다,

옛 추억의 것들, 나의 꿈인 열매들이.

 

11

여러 생각이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가벼운 운치가 그것들을 맞으러 달려간다,

손가락이 붓을 찾으며 붓이 종이를 찾는다.

한 순간에- 시가 줄줄 흘러나온다.

잔잔한 수면에서 배가 꼼짝도 않고 졸고 있는 양,

그러나 자, 출범이다! – 뱃사람들이 갑자기 뛰어가고 기어 오르고

기어내린다 돛이 오르고 바람을 안는다,

큰 배는 물결을 가르며 움직였다.

 

12

배는 달린다. 우리들의 배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시집 모퉁이에 연필로 작은 글씨가 거꾸로 적혀 있었다. ‘우울한 책 같어..’ 나는 순간 피식 웃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말라는 희망의 시도, 조국을 찬양한 격양된 시도, 수많은 여인에게 보낸 사랑의 시도 우울하게 느껴졌나보다.  그런것 같다. 푸쉬킨의 시만 그런게 아니라 시는 대부분 우울하다.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들은 심각하고 무거운 것들이니 그럴 수 밖에. 나도 이 시간만 되며 우울해진다. 그리워서 우울해지고 바람이 되지 못해 우울해지고 진실을 마주해야 돼서 우울해진다. 누군지 모르지만 제대로 느낀듯하다.

푸쉬킨은 연애쟁이었던 듯하다. 수많은 여인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을 갈구하고 찬미하는 시가 한두 편이 아니다. 그런 그가 늦가을도 무척 좋아했나 보다. 그의 가슴속에 늦가을이 있어 시가 되고 사랑이 되었다. 가을남자와 시인, 잘 어울린다. 나도 그런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늦가을에 태어나 만추의 정취를 그대로 품은 시인 같은 사람. 그대에게 이 시를 바친다.

그대, 가을마다 깊고 넓은 마음에 시같은 사랑 가득 채워 설명할 수 없는 삶의 기쁨 누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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