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 조회 수 2040
- 댓글 수 0
- 추천 수 0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나의 이 시에는 두 남자가 들어 있다. 이 시를 찾기 위해 책꽂이를 앞을 서성이는 목소리 좋은 한 남자와 그 모습을 보고 시집을 들고 오겠노라고 말한 훌륭한 준마 같은 또 한 남자. 나도 덩달아 책들을 노려보며 느리게 책장을 뒤졌었다. 한 편의 시로 각기 다른 곳에서 똑같은 슬로모션으로 시집을 찾는 모습이 들어있는 시. 그립고 그립다, 7년 전 봄날.
요즘같이 쨍쨍한 겨울이면 쌓인 눈 사이로 겨우 나뭇가지만 손 내민 세상에 갇히고 싶다. 눈 한 바가지 떠다가 눈밥 해먹고 뜨끈한 아랫목에 갇혀 있고 싶다. 사평역에 갇혀 낯선 이들 속에 딩글딩글 겉돌고 싶다. 모두들 불꽃을 향해 그리움을 던질 때 나는 언덕으로 올라가 덜그럭거리는 그리운 가슴 눈 속에 처박고 뒹구르르 굴러 내려오고 싶다.
그대, 별 가득한 하늘과 푹푹 쌓인 눈 속에 갇혀 이 시 한 편 낭송하지 않으려오? 그러고 있다 보면 아름다운 나타샤를 태운 당나귀도 당도하리니.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3958 | 글 쓸 때의 기분 [1] | 신재동 | 2007.12.17 | 1472 |
3957 | 믿음은 본능이 아니다. [2] | 김성렬 | 2005.08.10 | 1473 |
3956 | 명상과 마음... [1] | 이종승 | 2006.06.11 | 1473 |
3955 | 인사 [2] | 珏山 | 2007.12.04 | 1473 |
3954 | 사랑을 좋아하는 이유 | 사랑의 기원 | 2006.01.07 | 1474 |
3953 | 11월 시간분석 [3] | 박노진 | 2005.12.01 | 1475 |
3952 | 기적 [4] | 오병곤 | 2005.12.01 | 1476 |
3951 | 책 한권 고르는 것의 어려움 [5] | 김도윤 | 2007.04.22 | 1476 |
3950 | 어떤 사람에 대한 생각 [3] | 이종승 | 2006.04.05 | 1477 |
3949 | 성장이란 화두 | 박노진 | 2006.09.24 | 1477 |
3948 | 내 인생은 회사와 함께 끝나는 게 아니에요 [1] | 임효신 | 2007.03.25 | 1477 |
3947 | [29] 하늘 보며 걷는 5월 [4] | 써니 | 2007.05.05 | 1478 |
3946 | 레슬리 파나스의 첼로독주회를 다녀온 후 [1] | 박미영 | 2006.02.18 | 1481 |
3945 | 심리적 스트레스 | 빈잔 | 2023.06.20 | 1481 |
3944 | 내린천 래프팅 수난기 (4) [1] | 원아이드잭 | 2006.08.24 | 1487 |
3943 | 가장 싫어하는 말... | 김성렬 | 2006.03.08 | 1488 |
3942 | 어려운 이야기는 안 한다. [3] | 김성렬 | 2005.07.09 | 1489 |
3941 | [56] 그리다 | 써니 | 2007.11.13 | 1491 |
3940 | 무제 | idgie | 2008.01.29 | 1492 |
3939 | 봄을 닮은 아들 이야기 [3] | 이은미 | 2006.03.10 | 14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