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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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에서 만난 여우
김백겸
아무도 없는 외딴 밤거리를 홀로 걸어야
여우를 만날 수 있다
가로등 불빛을 지우는 안개이거나 이정표를 어둡게 하는 어둠을
무언가 알 수 없는 매혹이 발길을 으슥한 골목으로 끌어당긴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계속 같은 지역을 돌고 있지나 않는지 불안한 마음을
그 여우는 기차역광장에서 짙은 화장을 하고 팔을 붙드는
여자들은 물론 아니다
새벽에 대합실에서 인생과 신의 의미에 대해 전도하는
진지한 얼굴의 처녀도 역시 아니다
모양도 아니요 정신도 아니면서
심장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는 무언가 이상한 유혹이다
실눈을 해야 보이는 첫사랑의 암시 같은 것이다
어느 가을 날
인생의 늦은 등산길에서 문득 여우를 만났다
인기척이 뚝 끊어진 검은 숲 오솔길 한 복판에서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계속 같은 지역을 돌고 있지나 않는지 불안한 마음이었으나
여우는 이상한 미소와 슬픔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음 생에서라도 찾아가야 할 내 무의식 속의 당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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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외딴길, 한여름에도 봄을 타는 여우가 밤마다 산길를 배회하고 있었다. 이를 측은히 여겨 신은 연애권을 주었다. 여우는 기뻐하며 ‘인품이 있을 것, 진실될 것, 마음이 깊을 것, 가슴에 별을 품고 있을 것, 그대로 봐줄 것’ 이라고 써 두었다. 그러나 신의 조건은 심장이 먼저 터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이른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던 날,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 시간에 우산을 쓴 한 신사가 산길로 들어섰다. 신사는 그 곳이 매우 낯선지 우산을 높이 든 채 주변을 살폈다. 여우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그의 걸음걸이는 정갈했고 자태는 반듯했으며 어둠을 응시하는 눈길은 깊었다. 신사가 가까이 올수록 여우는 자신이 찾던 사람임을 직감했다. 오래 전부터 본 듯한 친숙함과 우주의 흐름마저 느껴졌다.
여우는 미리 저만치 가 서서 신사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신사는 고독한 산길에서 만난 인기척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여우의 심장은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이상한 감정으로 터질듯 쿵쾅거렸다. 신사가 매너있게 무언가를 물으려 할 때 여우는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황급히 일으켜 세웠으나 이미 소용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 심장이 터져 죽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랑이 처음인 여우였던 것이다. 본디 먼저 사랑에 빠지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그리워하는 사람이 먼저 심장이 터지는 법이거늘. 그러나 여우는 여한이 없었다. 다음 생에 만나게 될 무의식 속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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