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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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로버트 프로스트, 시집 ‘휘파람새’ 중에서
반듯하고 거무스레한 나무 사이로 자작나무가 좌우로 휘어져 있으니
어느 꼬마가 자작나무를 흔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눈보라도 그렇지만
나무를 흔들어서 아주 휘게는 할 수 없다.
비 개인 어느 겨울 아침에
나뭇가지마다 얼음이 붙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 땐 흔들리면서 딸그락 소리를 내고
그 얼음에 금이 가서 갈라지면
거기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
햇살은 어느새 얼음을 녹여서는
굳은 눈 위에 수정 비늘처럼 쏟아 놓는다.
그 깨어진 유리더미를 쓸어버린다면
하늘의 천정이 무너졌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무들은 얼음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휘어져서 고사리 끝에 닿기도 하지만,
아주 부러지지는 않는다.
비록 한번 휜 나무는
다시 반듯하게 서지는 못하겠지만
세월이 흘러
머리 감은 색시가
머리를 말리려고 햇빛에
엎드려 머리를 풀어헤치듯
잎을 땅에 대고 허리는 굽은
나무를 볼 것이다.
얼음이 무거워 나무를 휘어 놓았다는 것을 사실로 말해야 하지만
그래도 나는 소 모는 꼬마가
나무를 휘어 놓았다고 믿고 싶어진다.
촌구석에 살아서 야구도 배우지 못하고
스스로 만들어낸 장난을 할 뿐
여름이고 겨울이고 혼자 장난하는 소년.
아버지께서 심어 놓은 나무를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오르면서
나무가 휘어져서 축 늘어질 때까지
되풀이하며 하나씩 정복해가는 소년.
그리하여 천천히 나무에 오르면
나무를 뿌리째 뽑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소년은 언제나 나무 꼭대기로 오를 자세를 취하지만
우리가 물이 가득 찬 잔을 다루듯이
조심하여 오른다.
나도 한때 저 소년처럼 자작나무를 휘어잡았었지.
그래서 나는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근심이 쌓이고
인생이 길도 없는 숲속 같고
얼굴에는 거미줄이 걸려서 근지럽고
그리고 작은 가지에 눈을 맞아
한쪽 눈에서 자꾸만 눈물이 흐를 때
더욱 더 어린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세상을 잠시 떠났다가 와서
새로 출발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운명의 신이 일부러
나의 소원을 반만큼만 들어 주셔서
나를 아주 데려가 다시는 못 돌아오게 하시지는 않을 거야.
세상은 사랑하기에 좋은 곳,
나는 어디에 이 세상보다 좋은 곳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자작나무를 기어오르듯 살고 싶어라.
하늘을 향해, 흰 눈이 덮인 거무스레한 줄기를 타고 올라
자작나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올랐다가
줄기의 끝이 휘어져 다시 땅 위에 내려서듯이 그렇게 살고 싶다.
돌아감도 돌아옴도 다 좋은 일이다.
자작나무를 흔들어대는 꼬마보다도 훨씬 못한 삶을 살 수도 있으니까.
- - - - -
지난주에 프로스트의 시집을 읽다가 이 시와 만났다.
아이들이 빨강노랑 물감으로 온 세상을 꽃으로 그려놓은 것만 같은 오월,
자꾸만 눈길을 주고 싶을 정도로 바깥 풍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내 마음은 무언가에 쫓기듯 여유가 없었다.
마음의 여유를 잃어서 그런지 삶의 생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누군가 ‘삶을 멈추고 듣는 것’을 시라고 했다.
생기를 잃으니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뒹굴 거릴 시간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한동안 시와 만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내 앞에 나타나 보란 듯이 ‘자작나무를 타는 소년’과 만나게 되었다.
사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몇 번 읽다보니 그 날 오후에 화약총을 사서 같이 놀던 꼬맹이들이 떠올랐다.
그 날 조카들이 졸라서 학교 앞 문방구에 가서 화약총을 사주기는 했지만,
처음에 나는 귀찮고 시큰둥했다.
그런데 조카들과 놀면서 화약총을 빵빵 쏘고 나니 뭔가가 내 마음을 건드렸다.
아, 나도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구나.
나도 빵빵 소리 나는 화약총을 쏘고 싶었구나.
그 순간 나는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무딘 어른이 된 나를 만났고,
잊고 있던 나의 동심과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이 떠오르면서 이 시는 내게 한층 더 와 닿았고, 더 잘 이해되었다.
처음에는 이 시를 내 인생의 시로 올릴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시와의 만남 속에는 조카들과 함께한 추억이 담겨 있어,
다른 어느 시보다 내게 정겹게 다가왔다.
앞으로 이 시를 접할 때마다 산골마을 뒷산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날 수 있겠지,
공부하느라 책 보느라 바쁘다는 핑계는 잠시 넣어두고
개구쟁이 조카들과도 좀 더 놀아주고 싶어질 거야,
어쩌면 세상에 대한 모험심으로 가득 차 두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처럼
싱싱하게 살아가고 싶은 나도 만날 수 있겠지,
아, 나도 ‘자작나무를 타는 소년’처럼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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