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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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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2일 15시 25분 등록

자작나무, 로버트 프로스트, 시집 ‘휘파람새’ 중에서

반듯하고 거무스레한 나무 사이로 자작나무가 좌우로 휘어져 있으니
어느 꼬마가 자작나무를 흔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눈보라도 그렇지만
나무를 흔들어서 아주 휘게는 할 수 없다.
비 개인 어느 겨울 아침에
나뭇가지마다 얼음이 붙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 땐 흔들리면서 딸그락 소리를 내고
그 얼음에 금이 가서 갈라지면
거기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
햇살은 어느새 얼음을 녹여서는
굳은 눈 위에 수정 비늘처럼 쏟아 놓는다.
그 깨어진 유리더미를 쓸어버린다면
하늘의 천정이 무너졌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무들은 얼음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휘어져서 고사리 끝에 닿기도 하지만,
아주 부러지지는 않는다.
비록 한번 휜 나무는
다시 반듯하게 서지는 못하겠지만
세월이 흘러
머리 감은 색시가
머리를 말리려고 햇빛에
엎드려 머리를 풀어헤치듯
잎을 땅에 대고 허리는 굽은
나무를 볼 것이다.
얼음이 무거워 나무를 휘어 놓았다는 것을 사실로 말해야 하지만
그래도 나는 소 모는 꼬마가
나무를 휘어 놓았다고 믿고 싶어진다.
촌구석에 살아서 야구도 배우지 못하고
스스로 만들어낸 장난을 할 뿐
여름이고 겨울이고 혼자 장난하는 소년.
아버지께서 심어 놓은 나무를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오르면서
나무가 휘어져서 축 늘어질 때까지
되풀이하며 하나씩 정복해가는 소년.
그리하여 천천히 나무에 오르면
나무를 뿌리째 뽑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소년은 언제나 나무 꼭대기로 오를 자세를 취하지만
우리가 물이 가득 찬 잔을 다루듯이
조심하여 오른다.
나도 한때 저 소년처럼 자작나무를 휘어잡았었지.
그래서 나는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근심이 쌓이고
인생이 길도 없는 숲속 같고
얼굴에는 거미줄이 걸려서 근지럽고
그리고 작은 가지에 눈을 맞아
한쪽 눈에서 자꾸만 눈물이 흐를 때
더욱 더 어린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세상을 잠시 떠났다가 와서
새로 출발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운명의 신이 일부러
나의 소원을 반만큼만 들어 주셔서
나를 아주 데려가 다시는 못 돌아오게 하시지는 않을 거야.
세상은 사랑하기에 좋은 곳,
나는 어디에 이 세상보다 좋은 곳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자작나무를 기어오르듯 살고 싶어라.
하늘을 향해, 흰 눈이 덮인 거무스레한 줄기를 타고 올라
자작나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올랐다가
줄기의 끝이 휘어져 다시 땅 위에 내려서듯이 그렇게 살고 싶다.
돌아감도 돌아옴도 다 좋은 일이다.
자작나무를 흔들어대는 꼬마보다도 훨씬 못한 삶을 살 수도 있으니까.

- - - - -

지난주에 프로스트의 시집을 읽다가 이 시와 만났다.
아이들이 빨강노랑 물감으로 온 세상을 꽃으로 그려놓은 것만 같은 오월,
자꾸만 눈길을 주고 싶을 정도로 바깥 풍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내 마음은 무언가에 쫓기듯 여유가 없었다.
마음의 여유를 잃어서 그런지 삶의 생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누군가 ‘삶을 멈추고 듣는 것’을 시라고 했다.
생기를 잃으니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뒹굴 거릴 시간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한동안 시와 만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내 앞에 나타나 보란 듯이 ‘자작나무를 타는 소년’과 만나게 되었다.

사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몇 번 읽다보니 그 날 오후에 화약총을 사서 같이 놀던 꼬맹이들이 떠올랐다.
그 날 조카들이 졸라서 학교 앞 문방구에 가서 화약총을 사주기는 했지만,
처음에 나는 귀찮고 시큰둥했다.
그런데 조카들과 놀면서 화약총을 빵빵 쏘고 나니 뭔가가 내 마음을 건드렸다.
아, 나도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구나.
나도 빵빵 소리 나는 화약총을 쏘고 싶었구나.
그 순간 나는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무딘 어른이 된 나를 만났고,
잊고 있던 나의 동심과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이 떠오르면서 이 시는 내게 한층 더 와 닿았고, 더 잘 이해되었다.
처음에는 이 시를 내 인생의 시로 올릴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시와의 만남 속에는 조카들과 함께한 추억이 담겨 있어,
다른 어느 시보다 내게 정겹게 다가왔다.

앞으로 이 시를 접할 때마다 산골마을 뒷산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날 수 있겠지,
공부하느라 책 보느라 바쁘다는 핑계는 잠시 넣어두고
개구쟁이 조카들과도 좀 더 놀아주고 싶어질 거야,
어쩌면 세상에 대한 모험심으로 가득 차 두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처럼
싱싱하게 살아가고 싶은 나도 만날 수 있겠지,
아, 나도 ‘자작나무를 타는 소년’처럼 살아가고 싶다.

IP *.47.107.83

프로필 이미지
한희주
2008.05.23 10:19:08 *.221.78.72
대통령(케네디)의 취임식에 초청되어 자작시를 낭송할 만큼 미국 국민의 추앙을 받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저도 참 좋아합니다.

'세상을 잠시 떠났다가 와서
새로 출발하고 싶어진다.
...................
세상은 사랑하기에 좋은 곳....'

절실하게 공감 되는 대목입니다.

혹한의 시베리아에서 군락을 지어 늠름하게 서 있는 자작나무 숲은, 혁명의 냄새를 피우며 러시아 문학에 자주 등장하지요.
고요한 돈강에도 닥터 지바고에도....
프로필 이미지
김신웅
2008.05.23 21:58:37 *.47.107.83
프로스트.. 역시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시인이군요. 여유로움과 너그러움이 그의 시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라는데 저는 이번에 많은 시를 읽는데 급급해 그의 마음과는 잘 만나지 못한 느낌이 들어요. 앞으로 여러번 더 읽으면 한희주 님만큼 그의 시를 좋아할 수 있게 되겠지요? ^^ 한희주 님은 문학소녀셨나봐요. 이번에 자작나무에 호기심이 생겼는데 새로운 걸 알고 가네요.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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