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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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단어장]
El Condor Pasa :
철새는 날아가고, 나는 편안하고
자주 이 노래를 듣는다. 단조 음률에 마음이 더 편해지는 까닭인지 슬픈 곡조에 마음을 숨기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쯤 되면 해가 지는 걸 마흔세 번 보았다는 어린 왕자가 생각난다. 슬플 때면 어린 왕자는 해가 지는 걸 보았다지. 생텍쥐베리는 말했다. “그럼, 그날 그만큼 슬펐단 말이야?”
팬플룻으로 연주된 버전을 난 좋아하는데 페루, 잉카의 민중가요라는 이 곡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스페인 여행에서 팬플룻 연주를 접하고 난 후였다. 스페인에서 이 곡을 알게 되다니, 마치 일본에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알게 된 것과도 같다는 생각에 실소가 난다. 동학농민운동과 녹두 장군 전봉준에 얽힌 이 구전 민요도 El Condor Pasa도 ‘새’가 나온다. 미국의 팝가수 사이먼 앤 가펑글 버전은 가사에 ‘참새’가 나오고 우리나라에서 ‘철새는 날아가고’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잉카 민요로 알려진 El Condor Pasa는 ‘콘도르는 날아가고’라는 뜻이다. ‘콘도르’는 중남미, 안데스 산맥 등에서 서식하는 전설적인 잉카의 새로 날 수 있는 조류 가운데 가장 큰 종이자 희귀종이라 한다. 잉카에는 영웅이 죽으면 콘도르로 부활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는데, 어쩌면 콘도르가 희귀종인 이유도 그래서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본다.
또한 ‘콘도르(condor)’는 잉카 말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라는 뜻이라는데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산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여러 가지 감정이 휘몰아치는데 높은 산꼭대기를 무한히 질주한다는 느낌,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는 애통한 슬픔, 그리고 깊은 슬픔에 절여졌다 나온 후의 후련함, 하지만 끝없는 안타까움과 답답함에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민요에 얽힌 사연을 알기 전에 느꼈던 감정이건만 사람의 마음이란 그런 걸까. 최후, 소멸, 마지막이란 말이 주는 어감에 자꾸 더 감정의 우물을 파게 되는 건.
잉카에서 콘도르로 부활한 대표적인 영웅의 이름도 전설에 맞춰진 이름처럼 ‘콘도르칸키‘다. 전설이 먼저 있던 건지 콘도르칸키 사후 전설이 지어진 것인지 모를 만큼 운명적이다. 태어날 때부터 콘도르칸키는 ’영웅‘으로서의 삶을 살게 될 운명이었던 건가. 콘도르칸키의 본명은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Jose Gabriel Condorcanque). 그리고 또 다른 이름 투팍아마루 2세. 스스로 잉카 마지막 황제 투팍아마루의 후예를 자청하며 당시 스페인의 폭정에 맞서 1780년 페루 농민 혁명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잉카인이 잉카 제국의 멸망과 함께 스페인으로부터 식민지배를 받게 된 건 1533년부터이다. 콘도르칸키의 혁명이 1780년에 일어났으니 200여년의 긴 세월을 노예로 살던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어떠했을지 감히 가늠해 본다. 그리고 그 처절함을 잔인하게 짓밟았을 침략자의 그 잔혹이란 말에 담을 수 없을 행태들도.
안타깝게도 이 농민 혁명가는 체포되어 능지처참당한다. 잉카 제국의 중심지인 쿠스코 광장에서……. 혁명은 실패했고 이후로도 100여년이 지나서야 페루의 독립이 이루어졌으니 그 긴 세월, 콘도르는 하늘에서 자유를 누렸을까. 콘도르의 날개짓은 가벼웠을까.
영웅이란 호칭은 쉽게 부여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쉽게 알 수 있다. ’나‘를 중심으로 매우 좁은 관계에 한정된 이들의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움직이는 이가 아닌, ’나‘뿐만 아니라 더 멀리까지 더 많은 이의 삶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이에게 붙인다는 것 말이다. 억압받고 피폐한 민중의 삶을 깨우기 위해 힘썼던 이들, 콘도르칸키와 같은 이에게 붙는다는 것을. 인류가 탄생했다는 시간부터 지금까지 ’영웅‘은 ’혁명‘의 전사들에게 붙여져 왔다. 민족의 영웅이란 호칭이 제법 어울리는데 결국 ’인간‘이란 그 누구로부터 억압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영웅‘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어렸을 적 상상한 과학이 엄청나게 발전한 미래 시대 2024년은 이런 상태가 아니었다. 최첨단은 무슨. 여전히 세계는 빈부격차가 심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는 지상 전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네 나라의 전쟁이 끝나기를 때때로 바라지만, 내게 시급한 건 여전히 독립되지 못한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다. 전쟁이 났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분명 작년 78주년 광복절 기념식도 열렸고 그러니까 독립한 지 78년이 지났는데 왜 겪어보지도 못한 식민 시대를 살고 있어야 하는가. 그러니 나는 마흔 세 번의 El Condor Pasa를 듣는다. 그럼, 비행기로 하늘을 날았던 생텍쥐베리는 내가 어린 왕자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말해야지. “그렇게나 오늘 하루도 속이 터지는 일이 많았단 말이야?”
영웅이 그러하다면 난 결코 내가 사는 동안 영웅을 고대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결국 영웅을 기다리는 삶이야말로 내가 처한 현실이 얼마나 황폐하고 숨막히는지, 처참한지를 알려주는 것과 다름아니니 말이다. 허나, 결국 그러한 현실이 닥쳤다면 그러한 현실에서 왜 그토록 영웅을 고대하는지, 알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웅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저 기다리고 기다리기만 할 수야 없다. 지구 탄생의 억겁이 지난 2024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영웅‘을 만들어도 좋지 않은가! 영웅 콘도르가 얼른 날아올라 내 자유를 향한 이 갈망을 채워줄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
철새 따위야 어디로든 가서 시끄럽게 떠들라 하고, 오라 콘도르여! 개혁적이어도 좋다. 가히 혁명적이어도 좋다. 쿠스코 광장에서 사라졌지만 그만큼 강하게 부활하여 시장경제에서나 써먹을 자유가 아닌 사람이기에 가져야 하는 당연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나는 새처럼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그러한 날개짓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디디고 있는 이 땅에서 편안하고 싶을 뿐이다. El Condor Pasa!를 들으며 이제껏 한번도 느꺼보지 못한 하나의 감정, 편안함에 휩싸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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