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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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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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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4일 14시 16분 등록

 

<월든>의 소로우가 아버지가 세운 연필회사를 직접 운영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1844년 그는 연구 끝에 최상의 연필을 만들었다. 스승이자 친구인 랄프 왈도 에머슨이 그 연필이 뛰어나다며 예술가들에게 보내 추천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후에 흥미를 잃고 18453월부터 그 유명한 월든 호숫가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마침 연필보다 흑연 판매로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자 소로우 집안은 연필 사업을 접었다고.

 

1887년에 창립된 일본의 미쓰비시 연필주식회사는 독특한 입사식을 가진다. 신입사원이 회사 임원과 선배들이 보는 앞에서 은장도로 연필을 깎는 것. 신입사원들이 긴장 속에 연필 한 자루를 들고 씨름하는 동안 선배들이 돌아다니며 연필과 칼날의 이상적인 각도 같은 것에 대해 조언해 준다니 동화 같은 풍경이다. 마침내 연필을 다 깎은 신입사원은 그 연필을 똑바로 세워 5년 뒤의 자신에게 남기는 메시지를 쓴다. 그리고 사장은 마음이 꺾일 것 같을 때, 깎은 연필을 보고 다시 꿈을 가다듬어 노력해달라.”는 말을 건넨다.

 

이렇게 깨알같은 연필의 삽화는 정희재의 <다시 소중한 것들이 말을 건다>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녀는 놀랍게도 연필이라는, 지극히 작고 흔한 물품에 기대어 책 한 권을 썼다. 연필을 둘러싼 추억과 수집벽, 샤파 사랑에 이르기까지 조근조근 풀려나오는 이야기가 끝이 없는데, 어찌나 지극하고 애틋한지 연필테라피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글을 잘 쓰는 저자라고 익히 알고 있었으니 유려한 문체는 둘째 치고, 연필에 대한 갖가지 삽화를 수집한 정성만 보아도 그녀의 연필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 그녀의 독자였을 J가 자신이 쓴 책을 보내오며 처음 맞대면한 자리에서, 조금은 서먹하던 분위기를 완연히 부드럽게 해 준 것은 이 한 마디였다.

 

많이 바빴나 봐요. 내가 깎아도 될까요?”

 

J의 필통을 보여달라더니 거기에서 뭉툭한 연필을 발견한 저자가 그걸 깎아 보고 싶어한 것이다. 저자는 그 때 귀 파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귓밥 가득한 귀를 발견한 것만큼이나 설레고 흥분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이와 똑같은 장면에 접한 적이 있다. <남자의 취미>에 나오는 김보한 역시 낯선 이가 신은 구두를 닦아봐도 되냐고 말을 건넨다.


왜요?”

그냥.신발 가죽이 좀 상한 것 같아서. 좀 만져주면 살아날 것 같아서요.”

 

구두애호가인 그는, 식당에서 나가며 구두 주걱없이 발부터 막무가내로 밀어 넣는 사람을 보면 그러지 마세요 하고 달려 나가기도 했다고 하니, 흔하디흔한 것에 쏟는 그들의 애정이 경이롭다.

 

 

이 편벽된 병을 의미하지만 고독하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전문적 기예를 익히는 자는 오직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

--박제가, ‘궁핍한 날의 벗

 

벽이 없는 사람과는 사귀지 말라. 깊은 정이 없기 때문이다. 흠이 없는 사람과는 사귀지 말라. 진실한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 장대, 명나라 말기의 문인

 

저자가 동원한 인용구는 화려하기 그지없는데, 뜻밖에도 저자는 자신의 연필사랑을 좌절로 이해한다.

 

분명 삶은 지리멸렬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더 외로워졌다. 어떤 위로제도 없이 이 삶을 견딜 수 있으려면 얼마나 강해야 할까. 얼마만한 무감각으로 마음을 마취시켜야 할까. 따뜻한 피가 돌고 있는 한 그럴 수는 없다. 일상을 다른 빛깔로 채색해 마음의 윤기와 습도를 유지해야 살아 있다는 실감을 느낀다. 어른의 얼굴을 한 아이로 살아내기 위해, 일상의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기 위해 선택한 전략들은 이처럼 조금은 서글픈 진실을 담고 있다.”

 

설령 그렇다해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벽을 가진 사람은 폭력적인 세상과의 사이에 완충지대를 가질 수 있다. 그 땅은 꼭 그래야 한다는 이유도 의무도 없기에  온갖 역할과 책임에 갇힌 어른들이 아이로 돌아가는 마법이 가능한 곳이다. 연필과 구두를 가지고도 저토록 극진한 사랑이 가능하니 무엇엔들 마음을 얹지 못하랴.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 살아있음의 정수를 맛볼 수 있으니 서둘러 취미영역을 키워 볼 일이다.  그래도 마음을 쏟는 것을 힘들어 하는 이들을 위해 저자는 사랑은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경험하는 것일뿐이라는 말로 이 책을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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