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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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 선생은 생전에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특히 ‘내가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하며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이 말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남에게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닌데 자신의 경험이 그렇기에 확신을 가지고 말한 듯합니다. 이윤기 선생의 주장에 나는 이 정도로 말하지만 신화 연구가 조지프 캠벨이라면 “옳거니!” 할 겁니다. 캠벨은 일찍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숲으로 들어가라. 그곳에는 어떤 길도 나 있지 않다.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길이다. 각각의 인간 존재는 고유하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블리스(bliss)를 향해 가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윤기 선생은 조지프 캠벨의 책 두 권을 번역했습니다. <신화의 힘>과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이윤기 선생과 조지프 캠벨은 또 다른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말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바로 아래 문장은 이윤기 선생, 그 아래 것은 조지프 캠벨의 글입니다.
“그대들이 좋아하는 일에 매진하라. 좋아하면 자주,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면 전문가가 된다. 좋아하는 일의 전문가가 되는 길, 골드칼라로 통하는 고속도로다. 날마다 하는 일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삶의 골수다.”
“블리스(bliss)를 따라가자. 그러면 당신을 위해 보이지 않는 길을 인도하는 헤르메스를 만나게 될 것이다. 당신의 길, 당신의 신화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윤기 선생이 ‘삶의 골수’라고 부른 것은 캠벨의 표현을 빌리면 ‘블리스(bliss)’입니다. 캠벨의 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이윤기 선생은 ‘블리스’를 ‘천복(天福)’이라 번역했고, 또 다른 캠벨의 책 <블리스, 내 인생의 신화를 찾아서>의 번역자 노혜숙 씨는 ‘희열’로 옮겼습니다. 그렇다면 ‘천복’ 혹은 ‘희열’은 무엇일까요? 캠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온전하게 현재에 존재하는 느낌,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해 해야 하는 어떤 것을 하고 있을 때의 느낌이다.”
캠벨의 천복은 ‘신화’, 칼 융이 창안한 ‘분석 심리학’, ‘독서’와 ‘글쓰기’였습니다. 그는 분석 심리학으로 신화를 들여다보고, 신화를 통해 인간의 정신과 삶의 심층을 탐구했습니다. 그리고 관심 있는 저자 한 명을 정해 그 사람이 쓴 책을 모두 읽는 ‘전작주의(全作主義)’ 방식으로 융과 쇼펜하우어, 제임스 조이스 등의 책을 섭렵하고, 이것들을 한데 모아 글을 썼습니다. 이 점이 캠벨이 다른 신화 연구가와 다른 점이고, 그가 깊이 있으면서도 방대한 지식 체계를 형성한 방법입니다.
이윤기 선생은 어떨까요? 그의 블리스는 무엇일까요? <무지개와 프리즘>의 맨 마지막에는 ‘후기를 대신해서’ 이윤기 선생과 문학 평론가 문흥술 씨의 대담이 실려 있습니다. 1998년 <소설과 사상> 가을호에도 실린 이 대담에서 이윤기 선생은 말합니다.
“최근에 점선으로 삼각형을 하나 그렸습니다. 한 변은 안 쓰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소설쓰기’, 또 한 변은 내가 가 본 산길을 독자들에게 일러주는 일련의 작업으로 이루어질 ‘저술 행위’, 나머지 한 변은, 옛 사람들이 간 길을 오늘 사람들에게 일러줄 ‘고전 번역’이 차지합니다. 앞으로 한 20년 동안 이 삼각형을 실제로 그리는 일에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이윤기 선생의 천복은 ‘소설 집필’과 에세이 형태의 ‘글쓰기’와 고전 ‘번역’입니다. 그가 그린 삼각형에 따르면 <무지개와 프리즘>은 두 번째 변에 속합니다. 그런데 나는 엉뚱하게도 삼각형을 왜 ‘점선’으로 그렸는지 궁금합니다. ‘실선’으로 그리는 게 더 편한데 굳이 점선으로 그린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점선의 의미를 ‘가능성’으로 추측합니다. 여기서 ‘가능성’은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먼저 삼각형이 사각형이나 오각형으로 수정 될 수 있다는 ‘변경 가능성’입니다. 실제로 그의 삼각형은 시간이 흐르며 사각형으로 확장됩니다. 추가된 한 변은 ‘신화’입니다. 그의 저서와 번역서 목록에서 신화 관련 서적이 차지하는 비중이 4분의 1이 넘습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삼각형을 이루는 세 점이 직간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결합 가능성’입니다. 이윤기 선생의 소설과 수필, 그리고 신화 책을 읽다보면 책들 사이에 맥놀이가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그의 소설에는 <무지개와 프리즘>과 같은 에세이에 나오는 소재와 내용이 변용되어 담겨 있고, 자신의 신화 책에서 다룬 모티프가 그가 쓴 소설과 종종 중첩됩니다. 그리고 그가 쓴 거의 대부분의 수필집에는 신화적 관점으로 인간과 모듬살이를 들여다 본 글의 비중이 적지 않습니다.
나는 이윤기 선생과 조지프 캠벨이 멋진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 모두 가면의 삶이 아닌 자기다운 삶을 살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지프 캠벨과 이윤기 선생의 책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다짐합니다.
“삶의 골수를 맛볼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나는 블리스(bliss)에 집중하자. 나의 천복을 발견하자. 그것을 따르자. 그 과정에 충실한 만큼 삶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스스로를 깊이 알 수 있고 일상은 풍요로워질 수 있다. 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고, 나는 내가 바라는 ‘그 사람’이 되어 살 수 있을 것이다.”
* 이윤기 저, 무지개와 프리즘, 미래인, 2007년
* 조지프 캠벨 저, 노혜숙 역, 블리스, 내 인생의 신화를 찾아서, 아니마,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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