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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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무래도 이 회사 그만둬야 할까 봐.”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는 푸석푸석했습니다. 생기라곤 전혀 없는 그 목소리가 녀석의 상황을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육 개월이 넘도록 직업 잃은 가장의 설움으로 몸서리를 치다가 다시 취직한지 이제 겨우 석 달입니다. 그런 그가 회사를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옅은 실망감과 그보다 조금 진한 배신감이 가슴에서 새어 나왔습니다.
기억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지난 봄, 취업을 알아보고 있던 친구의 이야기를 마음 편지에 담아 보냈습니다. 얼마나 어렵게 구직 활동을 했고 취직을 했는지, 그리고 취직이 결정된 그 날 얼마나 기뻐했는지 잘 알고 있기에 그만두려 한다는 녀석의 결정이 한결 더 섭섭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알았는지 녀석은 미안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냥 그만두라고 할 수 없어서 문제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친구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매일 12시가 다되어서 퇴근하는 일과가 견디기 힘들다고도 했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닌 듯 했습니다. 두서없이 쏟아져 나온 그의 대답을 이리저리 짜맞춰보니 대략의 윤곽이 그려졌습니다. 문제는 녀석의 자존감이 많이 낮아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외국계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해왔던 친구는 이번에 회사를 옮기면서 영업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택했습니다. 영업 분야에 경력직으로 입사를 한 친구는 당장 사면초가의 입장에 처했습니다. 경력직 영업맨에게 회사가 가지고 있는 기대감과 엔지니어 출신 영업 초보의 역량 사이엔 건너기 어려운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즐겁게 수영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적절히 수영을 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데, 이것은 바로 우리가 집중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수영과 관련된 생각과 동기, 감정 없이는 수영을 즐길 수 있을 만큼의 기술을 습득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 몰입 Flow,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쫓기듯 일자리를 찾아 들어간 제 친구에게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만 있었을 뿐, 그것을 즐기는데 필요한 요소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일을 즐기는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할 시간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자신에게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친구가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었더라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나빠지진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문제에 빠져 있는 당사자에게 객관적이라는 말은 너무 멀기 마련이지요.
세상은 늘 즉각적인 결과물을 내놓으라고 으르렁거립니다. 덕분에 우리는 노력이 곧장 성과로 연결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지쳐버립니다. 임계점을 넘어 본격적으로 대상을 즐길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을 습득하기 전까지 우리는 수련의 시간을 거치게 됩니다. 외부로부터 강제된 목표의 일환으로 기술을 터득하고자 한다면 그 시간이 고통스러울 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련의 지난함이 과정의 일부라는 당연한 사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고통은 어느새 견딜만한 경험으로 변합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끝에 친구는 어렵게, 그러나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조금 더 해보겠노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퍼붓는 제 말들에 질려버릴 법도 한데, 잘 새겨들어준 녀석이 고마울 뿐입니다. 전화를 끊고 여전히 답답한 가슴을 쓸며 나지막이 주문을 외워봅니다.
“친구야.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놈이야. 힘내라. 하쿠나 마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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