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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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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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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29일 00시 00분 등록

 

월요일부터 나흘간 먼 길을 달렸습니다. 진안에 생긴 치유의 공간 진안에코에듀센터에서 출발, 춘천 북쪽에 위치한 강원숲에서 월요일 밤과 화요일 아침을 보낸 뒤, 비내리는 부산에서 이틀을 보내고 의왕을 거친 뒤 이곳 덕유산에 도착했습니다. 덕유산의 밤은 확실히 살아있군요. 기온이 아직 한 자리 숫자에 머물고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은 초롱하고 밤 숲을 흐르는 공기는 서늘합니다.

 

나흘간 반도의 서남에서 동북으로, 북에서 다시 남으로, 남에서 다시 북서를 거쳐 정남을 내달린 여정의 거리는 어림잡아 2,000km, 국토의 남과 북, 동과 서를 오가고 달리는 동안 나는 숲이 빚어내는 찬란한 빛깔과 소리와 향기를 누렸습니다. 춘천 북쪽에는 이제야 겨우 자목련이 피고 있었는데, 부산 어귀의 숲에는 여름 입구에나 핀다는 오동나무 꽃이 벌써 피고 있었습니다. 오동나무에 꽃피는 남쪽과 달리 북쪽의 숲에는 봄의 증거 중에 하나인 귀룽나무가 연녹색잎사귀와 제 흰 빛깔 꽃을 뒤섞어 짙어가는 숲 색에서도 고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달려서 머물고 다시 달려가는 여정의 순간순간 국토의 산하에서 얼마 되지 않는 위도와 고도의 차이 때문에 펼쳐지고 있는 놀라운 풍경의 차이와 변화를 흠뻑 즐겼습니다.

 

호사로다, 호사로다!’ ‘신비하구나, 신비하구나!’ 홀로 감탄하고 감사하는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대의 지난 한 주는 어땠는지요? 주변에 펼쳐지는 봄의 향연, 그 빛깔과 소리와 향에 잠시라도 멈춰 젖어보았는지요? 부디 그러했기를 바랍니다. 나는 긴 여정 내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제라도 저 풍경들을 느리게 마주하고 누릴 수 있는 눈과 마음이 내게는 열렸으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동일성의 늪에 빠진 삶을 사는 사람들은 감탄의 시간이 적습니다. 삶에서 신비를 느끼는 순간도 사라집니다. 동일성은 너른 땅 위에 동그랗거나 네모나거나, 세모나거나 혹은 또 다른 모양의 선을 그어 폐쇄적 공간 혹은 세계를 구획하고 그 안에 있는 것과 그 밖에 있는 것의 차이를 포착하는 것입니다. 진보의 동그라미 안에서 진보주의자들은 동일성을 형성합니다. 그들은 동그라미 밖에 서 있는 이들을 보수주의자들로 분별합니다. 보수의 구획은 그 바깥의 모두를 다른 이름으로 타자화합니다. 이데올로기의 동일성 형성이 초래하게 되는 인식의 늪입니다. 인간 스스로 저에게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여한 생물 지위적 동일성에 포섭되면 인간 외의 모든 생명을 타자화하게 됩니다. 백인종이라는 구획은 다른 인종에 대한 동일성을 형성하고, 로얄 패밀리나 금수저라는 동일성의 늪에서는 타자를 잉여 혹은 흑수저라는 차이로까지 전락시킵니다. 이념, 인종, 종교, 소득수준, 성별, 지역적 연고, 학연, 세대. 동일성의 안온함은 헤어나기 어려운 늪을 형성하기 쉽고, 동일성의 늪에 빠진 개인이나 집단은 그 밖에 서 있는 이들을 분리하여 타자로 규정합니다. 동일성을 유지하고자 그들은 마침내 자신도 모르게 혹은 의식적으로 배제와 폭력을 서슴지 않게 됩니다.

 

나는 요즘 더러 가까운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내가 보수 같아? 진보 같아?”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를 모르겠습니다. 저 틀려 처먹은 생각을 가진 끔찍하고 쓰레기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 사라진 세계를 꿈꾸었던 시절, 누군가를 향해 뜨거운 심장만큼 선명하게 분노할 줄 알았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내가 구획한 원 밖의 누군가를 내가 쓰레기처럼 여긴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폭력인가? 이런 사유의 심화와 전개가 이 땅에서 불과 반세기 전쯤에 끔찍한 폭력, 전쟁을 불렀지 않은가? 내가 감히 타자를 이 구획 하나로 온전히 해석하고 이해하고 포괄할 수 있는가?’

 

남과 여, 반과 상으로 구획했던 흐름이, 좌와 우, 남과 북, 영남과 호남, 더 나아가 이제는 빈과 부 또는 winnerloser, 혹은 세대로 구획하여 동일성의 늪을 만들어가는 우리 인간 세계의 오늘, 동일성의 늪이 없는 숲의 세계에 흐르고 있는 다양성의 빛깔과 소리와 향이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무주의 밤 숲에는 소쩍새 노래 소리 몇몇 풀벌레 소리들 뚫고 들려오고 있습니다. 풀벌레들에게 입 닥치라 외치는 소쩍새가 한 마리도 없는 숲에 머물고 있습니다. 나흘을 달려 마주한 이곳에 지금 피고 있는 박태기나무 분홍 꽃더러 엊그제 본 북쪽의 귀룽나무 흰 꽃이 하얀 빛으로 물들라 악다구니를 쓰지 않는 세계에 머물고 있습니다. 누구도 물들이려 하지 않는 숲의 세계가 한 없이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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