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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마음을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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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14일 09시 59분 등록
우리 연구원 45명은 지금 거진항을 오른쪽에 두고 동해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아있습니다.

거진항은 강원도 고성에 있습니다. 우리는 바다를 보러간다는 말에 버스를 내리자마자 항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한참을 걷다보니 여행자가 반대편 마을 어귀에서 우리를 불렀습니다. 더 멋진 바다는 항구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멋진 풍경을 보려면 바다에서 떨어진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몰랐습니다. 마을 골목길을 돌아 위로 올라갈 때마다 거진항의 다른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을을 벗어난 곳 언덕 모퉁이에는 두 그루의 해송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가지가 꺾이고 몸통이 휘어진 채로 세월을 묵묵히 견딘 소나무의 늠름한 기상이 느껴졌습니다.

다시 산자락을 타고 정상을 향해 올랐습니다. 걷다 보니 공사를 하느라 길의 어느 구간이 완전히 파헤쳐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파헤쳐진 흙을 조심스레 밟으며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오른쪽 산으로 길이 나 있지만 사람들은 그 길로 가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산 길로 접어 들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연스레 도로를 버리고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이제 길이 아니라 생각한 산 길이 그들의 길이 되었습니다.

산 정상에 선 순간, 눈 앞에 펼쳐진 절경에 모두들 놀랐습니다. 그곳에는 항구가 있었고,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가 있었습니다. 하얀 등대도 있었습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빠져 나온 순풍이 우리의 뺨을 부드럽게 건드릴 즈음 사부님의 10분 스피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이틀의 연구원 여행 동안 사부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교육하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이어 이 행사를 준비하며 나는 알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길 위에서 웃고 떠드는 동안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느낀다면 그것 자체로 훌륭한 여행이 된다고 믿는다는 것을, 되도록이면 자신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해치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것을, 자신도 한 사람의 여행자로 우리들 속에 섞여 웃고 떠들며 함께 배우기를 원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가 수업이라는 이름으로 욕심을 낸 시간은 단 10분, 그것도 가장 멋진 풍광 속에서 새로 길을 떠나는 5기 연구원들에게 축복의 말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10분 스피치를 위해 여행자 김성주는 머리를 싸매고 오늘 우리가 선 이 자리를 찾아냈습니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부님의 스피치를 위해 이보다 더 완벽한 풍광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바다를 등지고 선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멋진 소나무 사이로 항구를 보았지, 배들이 정박한 항구도 보았지, 등대도 보았지. 오다가 이정표를 봤나. 고성, 거진항, 동해바다. 어때 멋진 이정표지? 그래, 1904년에 어떤 사람이 태어났어. 그리고 그는 48년에 첫 책을 냈어. 1954년에 어떤 사람이 태어났어.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 첫 책을 98년에 냈어. 이 두 사람 사이의 연관에 대해 그 동안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어. 그러나 나는 했지. 그 둘은 조셉 캠벨과 나거든. 그와 나 사이에는 재능이나 살아간 시대, 일해온 분야 등 엄청난 차이가 있지. 그러나 내가 이 사람에게서 주목한 것은 바로 그의 우드스탁 시대(아래 각주 참고) 때문이야. 1929년부터 33년까지, 그는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시절을 보냈지. 그러나 그 시간이 그에겐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어. 자신이 보고 싶은 책을 다 읽을 수 있다는 것, 그것처럼 행복하고 자유로운 시간은 없겠지. 그러나 상황 상 여러분은 그런 시간을 갖기가 어려울거야. 그러나 지금 주어진 1년, 비록 보고 싶은 책만 읽는 것은 아니지만, 이 1 년이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시간이 될 거야. 2년째는 자신의 책을 써야지. 책을 읽는 것과 쓰는 것은 공연을 보는 것과 공연을 직접 하는 것처럼 달라. 책을 쓴다는 것은 작가라는 사람들에게는 행동이야, 무대의 공연 같은 것이지.

나는 그대들이 갖게 될 2년이라는 시간을 우리가 내려다 보는 이 풍경들의 상징성과 연관시켜 생각해보고 싶어. 먼저 바다가 보이지, 그리고 항구가 보이고, 등대도 보이지. 항구는 배에게 안전한 곳이야. 우리로 보면 월급, 보장된 미래 같은 거겠지. 그러나 배가 만들어진 이유는 항구에 정박해있기 위해서는 아니지. 프로그램되지 않은 모험을 떠날 때는 좌절, 실패,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의 상실, 의혹과 같은 걸림돌이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는 바다로 나가야 해. 멀리 떠나는 배들을 위해 등대가 존재하는 거야. 등대는 속삭이지, ‘내가 있으니 너희들은 안심하고 떠나!’. 등대의 존재 자체가 항구에 매어 떠나지 않는 배들에 대한 경고인 셈이지. 등대는 떠난 곳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떠나라고 선동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브레이크가 있어 자동차가 마음껏 질주할 수 있듯이, 등대가 있어 배는 떠날 수 있는 거야. 그게 삶의 역설이지. 스승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게 아닐까. 불안해 하지 말고 떠나라고 선동하는 것! 나는 내가 얼마의 촉광을 가진 등대인지는 몰라.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이 떠나서 돌아오게 하는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아.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이미 떠날 마음을 가지고 저 항구에 있기 때문이지. 떠날 힘은 내게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들 안에 이미 있어. 자 내 스피치는 여기서 끝이야.”

사부님의 스피치는 10분도 못되어서 끝났지만 그 누구도 금방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작년에 이어 또 다른 돌 하나가 ‘쿵’하고 제 가슴 속에 내려앉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사부는 자신의 촉광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고 겸손해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는 이미 자기 길을 내서 앞서간 사람이고,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 망망대해로 나가는 것은 두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등대가 우리의 돌아오는 길을 환히 비추어주는 한 우리는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우리의 길을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2008년 구본형의 진전사 10분 스피치 보기 : http://www.bhgoo.com/zbxe/56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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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캠벨의 우드스탁 시대: 캠벨은 독일 유학을 하던 중 대공황으로 어지럽던 미국으로 돌아온다. 취직이 어려운 그 때 그는 전통적인 대학의 학위 공부와는 결별하고 뉴욕 우드스탁 숲으로 들어가 이후 사라 로렌스 대학에 교편을 잡기 전까지 4년 간 (간간히 생활을 위해 재즈 밴드에서 섹소폰을 부는 것 외에는) 오로지 오두막에 쳐 박혀 강도 높은 독서를 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그의 책 ‘신화의 힘’ 189-190pp)

캠벨은 예술가, 심리학자, 인류학자, 영화감독, 소설가의 사고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시리즈로 펴낸 책과 영화,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와의 인터뷰 등 공중파 인기 프로그램으로 대중에게까지 널리 알려졌다. 신학, 인류학, 문학, 철학, 역사, 심리학, 종교, 예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캠벨의 해박함은 20세기에 따를 사람이 없었을 정도.

“책을 읽다 좋은 글을 보면 가슴이 뛴다. 좋은 글이란 벌써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 벌써 들어와 있지만 내가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보는 순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이미 낯익은 것이어서 그토록 반가운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 내는 작가의 재주에 경탄하지만 우리를 정말 기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표현을 얻었기 때문이다.” (구본형 ‘일상의 황홀’(34p))

아, 이런 통찰의 순간들과, 캠벨이 느낀 ‘세상이 열리는 기분’을 책을 통해 자주 마주한다면 이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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