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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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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20일 10시 04분 등록
복지관 옆에 마련된 작은 공터에 십여 명 남짓한 회사 동료들이 모였습니다. 다들 앞치마를 입고, 고무장갑을 끼고, 장화를 신었습니다. 거기다가 머리에는 위생모자까지 썼습니다. 실력들은 어떤지 몰라도 차림새 하나만큼은 그럴싸합니다. 우리는 수북하게 쌓인 무와 배추 그리고 열무를 씻고, 자르고,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엉터리 실력은 금새 들통났습니다. 한참을 우왕좌왕하던 오합지졸들은 중심을 잡고 진두지휘를 하는 사회복지사님의 명령에 따라 조금씩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처음에는 어렵기만 하던 일이 서서히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조금 여유가 생기자 여기저기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허리가 뻐근하게 아파오고, 온몸은 고춧가루로 범벅이 되었지만 모두들 즐겁게 일했습니다. 매일 사무실에만 앉아있다가 기분 좋은 바람 사이에서 땀을 흘리니 힘이 들어도 기분은 날아갈 듯 상쾌했습니다. 그렇게 웃고 떠드는 사이에 제법 먹음직스러운 김치가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직접 만든 김치를 반찬 삼아 꿀 맛 같은 식사를 했습니다.

배를 든든히 채운 우리는 김치를 짊어지고 두 명씩 짝을 지어 배달할 집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잘 정리된 지도가 있었기에 만만하게 생각하고 출발했는데, 그 길이 의외로 호락호락하지가 않았습니다. 김치를 배달해야 하는 두 집 중에 한 곳은 오르막의 맨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계단도 아닌 오르막길이 얼마나 가파른지 연신 신발이 벗겨졌습니다. 한참을 걸어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릴 무렵에서야 겨우 유정이네 연립주택 앞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문 앞에 서서 인기척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우당탕거리는 아이들의 소란에 이어 벌컥 문이 열렸습니다. 네 식구가 다 누울 수는 있을지 의심스러운 좁고 어두운 공간에 낡은 세간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습니다. 낯선 손님의 방문이 마냥 반가운 두 아이의 천진한 미소에 대한 안쓰러움과,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아이들 엄마의 흔들리는 눈빛에 대한 미안함과, 눈길 한번 주지 않고 TV만을 응시하는 아이들 아빠의 무심한 등판에 대한 섭섭함이 묘하게 뒤섞였습니다.

가지고 간 쌀과 김치 그리고 약간의 생필품을 던지듯이 내려놓고 보니 할 말이 궁했습니다.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물질적인 도움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이르던 복지관 관장님의 말씀은 몽땅 잊고 먹먹해진 마음으로 한참 동안 아이들의 머리통만 쓰다듬다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 나왔습니다.

허울좋은 봉사활동을 마치고 거리로 나오니 쏟아지는 봄볕은 눈물 나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서글픈 꿈을 꾼 듯 아이들의 미소가 눈 앞에 아른거렸습니다. 원래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오늘따라 야속하게 떠오릅니다. 행복한 얼굴로 스쳐가는 이들에게 무거운 마음을 들킬 새라 고개를 숙인 채로 황홀한 봄날의 오후를 거닐었습니다.



*** 공지사항 ***

구본형 변화경영 연구소 연구원 1기이며 '굿바이 게으름'의 저자인 문요한 연구원의 새 책이 나왔습니다. '그로잉Growing - 내 안의 성장본능을 깨워라'라는 제목으로 웅진지식하우스에서 발행되었습니다. 더 자세한 안내(클릭!)를 원하시는 분은 링크를 눌러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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