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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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자연 다음으로는 예술을 사랑했다.
나는 삶의 모닥불 앞에서 두 손을 쬐었다.
이제 그 불길 가라앉으니, 나 떠날 준비가 되었노라.
- 월터 새비지 랜더, <죽음을 앞둔 어느 노철학자의 말>
얼마 전 어머니께서 가져다 주신 베트남 쌈이 아주 맛있었기에, 한번 스스로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저녁때 있을 친구들과의 모임에 가져나갈 요량으로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집 근처의 재래시장으로 향했지요. 초록색과 붉은색의 야채들과 알록달록한 주황색의 맛살, 하얀 계란과 닭 가슴살을 샀습니다. 시장 안은 사람냄새로 가득합니다. 오전부터 내리다 말다 하던 비가 다시 내리자, 지나가던 배달부가 걸쭉하게 한마디 농을 던집니다. “아따 거 참, 날씨가 싸가지가 없구마이.”
콧노래를 부르며 시작합니다. 야채들을 다듬어 채를 썰고, 닭고기는 양파 즙에 버무려 프라이팬에 볶습니다. 물을 끓여 라이스 페이퍼를 삶아 재료들을 가지런히 넣고 돌돌 말았습니다. 땀이 비 오듯 합니다. 정오에 준비를 시작하여 저녁이 되어서야 마무리할 수 있었지요. 예쁘게 만들어진 것들만 골라내어 도시락 통에 담고, 시원해지라고 잠시 냉동실에 넣어두었습니다. 친구녀석들은 이런 정성을 모른 채 입맛만 다실 것이기에 조금 억울했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어준다면 감사한 일이지요. 약속시간에 조금 늦게 도착하여 한창 연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한 식탁 위에 요리를 꺼내놓으니 탄성들이 터져 나옵니다. 한입 먹어보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어주니 제 어깨가 들썩입니다. 술을 곁들이고 웃고 떠들며 밥을 먹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설거지 그릇들이 수북이 쌓여있습니다. 여름이라 날파리까지 가세하여 잔치 뒤의 피곤을 더합니다.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먹고 나면 뼈만 앙상히 남은 생선처럼 허망한 것을, 왜 그렇게 공을 들여 하루 종일 장만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인생은 요리를 만들어 먹는 것과 같다는 구본형 선생님의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삶은 그렇게 공을 들이고 잠시 즐기고 다시 깨끗하게 복원하여 내일을 맞이하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먹고 살 수도 있지만, 정갈하고 아름답게 먹고 살 수도 있다. 먹고 나면 다 똥이 되는 것이지만 아름다운 식탁을 차리기 위해 정성을 쏟는다. 손님이 돌아간 만찬처럼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그러나 잔치를 준비하는 것은 늘 마음 설레는 일이었다.”
설거지를 하며 홀로 중얼거립니다. ‘인생은 잔치며 요리다. 잔치 끝이 허무하다 하여 요리가 허무한 것은 아니다. 시장통의 사람냄새와, 행인의 우스개 소리, 흥얼거린 콧노래와 촉촉한 땀, 친구들의 탄성과 엄지손가락, 그리고 우리들의 웃음소리면 충분하다.’ 라고 말입니다. 곧 잦아들 것이기에 모닥불을 쬐듯 따스하고 아름답게, 사는 듯싶게 인생을 살아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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