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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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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2일 08시 11분 등록

우리의 유일한 안식처는 서로의 선(善) 안에 있다.

- 레이첼 나오미 레멘 (Rachel Naomi Remen) -

 

커다란 눈과 밝은 웃음이 매력적인 그녀는 고객민원을 담당합니다. 저는 그녀를 ‘응급 소방수’라고 부릅니다. 병원에 오면 화를 내는 고객이 많습니다. 의사의 설명이 부족하거나, 입원실의 청소상태가 불량하거나, 주차요금이 비싸다고 생각해도 화를 냅니다. 내 몸이 아프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사소한 것들도 아픈 환자들에게는 짜증으로 다가옵니다.

 

여러 가지 문제로 잔뜩 화가 난 고객을 그녀는 밝은 에너지와 풍부한 감수성, 타고난 공감력으로 쉽게 가라앉혀 줍니다. 많은 환자를 겪었던 그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냐?’고 물었더니, 산재(산업재해) 업무를 담당할 때 겪었던,‘소중한 고객’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

 

나를 찾아왔던 그녀의 남편은 사진사 입니다. 중,고등학교의 수련회, 수학여행, 졸업여행을 따라다니며 학생들의 사진을 찍고 졸업앨범을 만드는 사진관에서 근무했습니다. 두 아들을 키우는데 사진사의 벌이가 시원치 않았던가 봅니다. 지나친 과로 탓인지 심장에 무리가 와서 중환자실에 입원했습니다.

 

그녀는 서럽게 울었습니다. 그리고 환자가 산재로 승인될 수 있도록 부탁했습니다. 아이들 교육비 때문에라도 산재처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조금 의아했습니다. “아이가 어떤 교육을 받는데 교육비가 많이 드냐?”고 묻자, 두 아들 중에 작은 아이가 자폐아라고 했습니다. 같이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부모님들이 반대하신 결혼이었다고 합니다. 친정 부모님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택한 결혼이었지만, 자폐아 아이를 낳았고, 거기에 남편까지 쓰러지자, 차마 염치가 없어서 가슴 아파하실 친정 부모님께 알리지도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산재승인을 받아야 치료비도 해결되고 휴업급여라도 보조 받아야 아이교육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연을 듣고 보니 할 말도 드릴 말도 없었습니다. 보호자에게 기댈 곳이라고는 아무 곳도 없었습니다. 아니, 솔직히 나 밖에는 없었습니다. 최대한 도와드리겠다고 말씀 드리고 산재 요양신청을 위해, 의사에게 소견서를 받으러 다녔지만 일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심장내과 교수님의 ‘심장마비’라는 진단명으로는, 산재 승인이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을 전화로 미리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교수님을 찾아가서 혹시 다른 병명으로 수정해 주실 수 있는지 물어보았으나, 교수님의 소견은 확고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두어 번 더 찾아갔으나 교수님은‘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는 말과 함께 크게 화를 내셨고, 진료실에서 쫓겨나기까지 했습니다.

 

승인되지 못할 것 같아 산재 신청은 하지도 못한 채, 후불로 처리해 준 치료비는 쌓여갔고 시간도 하염없이 흘러갔습니다. 보호자는 애쓰는 나를 보고 ‘미안하다.’며 눈물을 보였지만, 나 역시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치료경과에 따라 환자가 심장내과에서 재활의학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산재 소견서를 받기 위해 재활의학과 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간의 상황과 환자와 보호자의 애틋한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교수님이 적어주신 소견은 ‘심장마비로 인한 저산소증 뇌손상’이었습니다.

 

어쩌면‘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8월 1일, 마침내 중환자실에 입원한지 4개월 만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산재 승인이 되었습니다. 승인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병동에서 뛰어 내려 온 보호자와 나는 서로 부둥켜 안고 같이 울었습니다.

 

**********

 

그때를 회상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붉게 물들었습니다.

한 가정을 송두리 채 흔들리게 하고, 파탄의 위기로 내 몰았던 커다란 화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 준 그녀는, 응급 소방수가 분명합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언제 있었던 일이에요?”

“벌써 10년 전 이네요.”

 

“그런데 왜 소중한 고객이에요? 환자 쪽에서 더 고마워해야 할 것 같은데...”

“자폐아였던 작은 아이가 벌써 고등학교를 다니고, 환자도 퇴원해서 통원치료 중이에요. 지금도 올 때마다 제게 인사를 해요. 환자는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의식은 3~4살 아이 수준 밖에는 안 되거든요. 어찌 보면 최악의 상황이잖아요. 그래도 늘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살려고 애쓰는 보호자를 보면서, 저 역시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거든요. 그래서 저에겐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고객이에요.”

 

사진사의 아내와 응급 소방수인 그녀 둘 중, 누가 더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을지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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