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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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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15일 19시 10분 등록


적석(積石), 쌓는 자의 꿈

(마산/고성 적석산 497m) 창원시 진전면 일암리 (월간 사람과 산 기고문)


 

가장 가벼운 돌들로 만든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산





 세상에서 가장 묵직한 산은 이 나라에 있다. 생전의 간사함에 대한 벌로 시시포스(Sisyphus)는 집채만한 바위를 산 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일을 끊임 없이 반복한다. 세상은 이 신화를 빌려 의미 없이 반복하는 일을 형벌로 규정하고 사람들에게 일침 하려 들기도 한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의미 없음의 의미를 찾는 일은 의미를 좇고 쓸모만을 고집하는 이 세계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가치인지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아우르는 일은 의미와 쓸모를 더욱 가치 있게 한다. 시시포스가 받은 무의미의 형벌은 어쩌면 큰 산을 이루려는 인간에게 신이 주는 힌트였는지 모른다. 차곡차곡 쌓인 돌들이 결국, 큰 산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적석산에 올랐다. 적석(積石), 아주 작은 돌 하나도 놓치지 않고 품에 안아 주는 일, 그것은 자기가 가진 무량의 무게를 감당할 줄 아는 이의 마음이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돌들이 가장 무거운 산으로 바뀌는 변신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간다.


 


 가을이다. 선선한 바람이 반가우면서도 그 속에 뜨거움이 사라져 애잔하다. 밤낮으로 속 썩이던 여름과 막상 이별하려니 미운 정이 든 게다. 시간의 야속함을 절기가 바뀔 때마다 탓할 수야 있는가, 정 타령을 뒤로하고 적석의 정상을 바라본다. 햇빛에 찡그린 눈 사이로 정상부 구름다리가 선명하다. 아래에서 올려다 보니 오늘 오를 봉우리들이 영준하고 야무져 보여 제대로 된 한판이 되겠거니 했다. 어느 시인은 말한다.


 


산이 늘 그렇듯 일단 속으로 들면 길을 내어 품어준다. 우리 나라 사람들과 같다.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말 걸기도 어려워 보이지만 친해지면 속을 내줄 것처럼 정이 뚝뚝 흐른다. 이 나라 사람들은 산과 같다. 비둘기장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마음속으로 깊이 걸어 들어가면 산 냄새가 난다.’


 


나는 이 말을 맹신한다. 그리하여 산과 몸 섞는 일을 즐긴다. 오늘은 적석이다.


 


씹어 삼키듯 천천히 걷는 자가 정상에 닿고


 들머리는 성구사 (고려말 충신 변빈 선생, 임진왜란 때 의병장 변연수 장군과 그의 아들 변입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 . 성구사를 바라보고 왼쪽으로 나와, 돌면 밭둑길이 이어지고 산의 초입을 알리는 시그널이 무더기로 붙어있다. 산에 들어 1시간여는 족히 용을 써야 능선에 붙는다. 길은 외길이며 중간 중간에 쉼터가 있다. 가파르지만 간간이 시야가 트여 오르는 이를 외롭게 하진 않는다. 그러나 같이 간 초보 등산가는 능선에 붙기 까지를 견디지 못하고 빡빡해진 허벅지의 고통을 호소한다.


 


 오르막을 겁내면 산에 갈 수 없다. 그러나 산에 자주 가지 않고 또 오르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의 한결 같은 이유는 오르막의 고단함 때문이라 말한다. 오르막 길을 극복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체력이 좋든 좋지 않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아이건 어른이건 오르막을 걸을 땐 겸손해야 한다. 평소 보폭의 반으로 줄여 걷자. 줄어든 보폭만큼 힘듦도 준다. 그리고 천천히 걷자. 앞서 오르는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 없다. 씹어 삼키듯 천천히 걸으면 먼저 간 사람이 자신의 뒤에서 힘들어하며 오르는 모습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이 산은 적석(積石)이 아닌가, 소라의 등껍질처럼 애둘러가자. 첨단을 향해 돌을 쌓아 올리는 마음으로 오르면 결국 정상에 닿는다. 그곳이 어디든 닿을 수 있다. 쌓는 자의 꿈은 그래서 이미 이루어진 미래다.


 


능선 굴곡의 은밀한 아름다움, 바위 끝 혼자 앉아 만끽하는 여유


 여느 산들이 그러하듯 능선에 붙기 전까지 거친 길을 감당해야 진경에 접근할 수 있다. 길은 남진하며 거칠게 오르다가 능선을 만나 북동진하며 잦아진다. 능선에 올라서서 30여분을 가면 옥수곡 갈림길 표지판이 나온다. 여기서 정상 0.9km’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20여분을 더 걸어 국수봉에 닿는데 국수봉에서 이 산의 이름이 어째서 적석인지를 알아 차릴 수 있다. 이 장면은 직접 올라 확인 하시는 게 좋겠다. 신의 작품을 멀리서 웅크리고 바라볼 수 있는 이곳은 여자 같은 능선 굴곡의 은밀한 아름다움을 혼자 흠향하기에 딱 좋다. 신의 일을 인간이 이래저래 무어라 떠들어 본들 무엇 하겠는가, 이 장면은 고이 담아둔다. 그래도 첨언하자면 나는 이곳 국수봉에 서서야 적석을 아끼게 되었다. 좌측 남해 당동만이 꿈처럼 어른거리고 거제도 넓은 품에 안기는가 싶더니 이내 묵직한 준봉 하나가 앞에 서서 어디를 헤매다가 이제 오느냐하는 말을 나는 들었다. 서로 끌어안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애틋하게 담아 둔다.


 


국수봉을 내려서면 곧 바로 적석산 정상으로 이르는 오르막이 시작된다. 5m 정도 로프를 잡고 등반하듯 오르면 널찍한 바위 끝에 다다르는데, 이곳에서는 정신을 놓아두고 쉴 만 하다. 맑은 날, 흰 구름과 함께 이 바위 끝에 앉아 다리를 까딱 대고 있노라면 무거운 마음이 놓아진다. 전쟁 같은 사무실이 사라지고 매일 어깨에 얹혀 있던 피곤도 날아간다. 아마 그대도 무엇이었건 간에 그대를 짓누르던 무엇을 이 곳에 내려둘 수 있을 터다. 이 산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나의 근심을 튼튼하게 파묻고 다시 오른다. 5분여를 가면 볼더링이 가능한 바위들이 즐비하게 서있다. 꾼들은 한 바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겠다. 여기까지 오르면 정상은 눈 앞이다. 계단을 오르고 첩첩이 쌓인 바위들(積石)을 딛고 일어서면 497m, 정상에 이른다.


 


 


전설, 구름다리, 통천문... ”즉슥산참 재미나네~~’


 적석산에는 전설 하나가 전해져 온다. 지금은 구름다리로 이어진 이 산의 두 봉우리는 칼봉과 적삼봉이었다. 옛날 홍수가 크게 일어나 세상이 모두 물에 잠겼을 때에도 이 두 봉우리의 끝만은 물에 잠기지 않았는데 잠기지 않고 남은 봉우리가 칼 한 자루 길이만큼 된다 하여 칼봉이요, 한복 적삼의 길이만큼 된다 하여 적삼봉이라 한단다. 세상에는 적석산 보다 높은 봉우리가 많았음에도 이 산만 유독 물에 잠기지 않았던 이유는 두 봉우리의 중앙에 물에 잠길 땐 물을 빨아들이고, 물이 말랐을 땐 물을 내뿜는 구멍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구멍은 남해 바다로 이어져 있어 구멍에 뭔가를 빠트리면 남해 바다에서 그것이 떠오른다고 한다.


 


 대개 홍수 신화는 영웅의 탄생을 암시한다. 인간의 가장 오래된 영웅, 수메르 신화의 길가메시는 홍수를 극복하고 일어난 영웅이다. 세상을 잉태하는 깊고 은밀한 곳은 항상 홍수와 관련이 있는데 이 곳 적석에도 그 구멍이 있는 모양이다. 모를 일이다. 이곳을 지나친 사람이거나 이 산 언저리에 살고 있는 사람 중에 난세의 영웅이 나올지.


 


 정상 조망은 아름답다. 당동만, 당항포항, 남해가 출렁이는 모습이 보이고 서쪽으로 고성의 진산들 연화, 학남, 무량, 대곡산을 볼 수 있다. 남방으로는 거류, 구절, 응암산과 통영의 벽방산의 모습도 보인다. 바다와 산들이 한데 엉켜 출렁이는 풍광은 국보급이다. 이 광경을 놓아두고 돌아서야 한다. 많이 아쉬울 테지만 곧 이어 또 다른 출렁임이 기다리고 있으니 기대해도 좋다. 전설이 말하는 칼봉과 적삼봉을 잇는 구름다리는 2005 12월 설치되었다. 이전에는 긴 로프를 잡고 암벽등반 수준으로 오르던 길을 다리로 이었다. 바위 타며 올라가는 재미는 사라졌지만 구름다리에 서면 또 다른 아찔함이 있다. 정상에서 멀리 들리는 고함소리는 구름다리를 건너며 마구 흔들어 대는 남정네들을 향한 중년의 여성중창단이 내는 소프라노다. 더 흔들어 달라는 건지 이제 그만 해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즐거운 괴성이다. 지나가며 들었다. ‘즉슥산* 참 재미나네


(* ‘즉슥산은 적석산의 경상도 발음)


 


하산하다 만난 의젓한 가을 향기


 구름다리를 지나면 곧바로 통천문이 나온다. 남해로 뚫려 있다는 구멍이 이 통천문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른이 머리 숙여 들여가면 딱 알맞은 구멍인데 이 구멍을 지나는 동안은 내 몸이 급격하게 편안했고 몽환적이었고 기뻤다. 통천문을 지나 10분 정도 내려서면 첫 갈림길이 나온다. 이 길은 적석암()으로 이어진다. 10여분 더 가면 두 번째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계속 진행하면 음나무재를 거쳐 깃대봉에 가 닿을 수 있다. 깃대봉은 다음에 기약하고 우리는 우측 일암저수지로 하산하기로 결정한다. 일암의 푸른 논과 새파란 저수지 물이 얼른 보고 싶어 졌다. 갈림길에서 하산을 시작하고 40여분이 지나면 임도를 만난다. 임도를 따라 3분 정도 내려 가다 보면 우측에 하산길이 이어지는데 여기서 산길로 붙어야 임도를 둘러가는 노고를 피할 수 있다.


 


일암저수지가 보일까 말까 하는 지점에서 날아드는 꽃 향기가 내 짧은 목을 쭉 빼게 만들었다. 향기가 어찌 이리도 은은하고 얌전할 수 있는가. 그 꽃을 따고 계시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칡넝쿨 꽃이라 하는데 향기는 길가에 아무렇게 얽혀 자라있는 칡 나무의 것이었다. 그 모습과 처지가 진흙에서 피는 연꽃과 비길만하고 거칠게 말해, 암흑이 혁명을 잉태하는 것과 닮아 있다. 이맘때 제철을 알고 피우는 모든 꽃들이 어찌 대견스럽지 않겠냐마는 지난 봄, 여름, 왁자지껄 틔워대는 꽃들을 시기하지 않고 참아낸 녀석의 향기는 의젓하여 더 진하다.


 


 저수지를 내려와 가을 논을 비켜 걸으며 멀리 하늘에 걸친 구름다리를 보았다. 저 곳에 버려두고 온 내 근심과 저 곳을 올려다 보는 나 사이에, 이끼 쌓인 돌의 질감만큼 먼 시간을 느끼게 한다. 정신을 놓고 마음을 놓고 걸으니 시간 모르게 여유로웠던 게다. 이 산에 몸뚱이째 들어갔다 허물 벗고 나온 것 같다. 그대도 이럴려나. 어찌 되었든 다시 가을이 왔으니 우리는 벗은 발로 두 손 들어 맞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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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7 07:02:11 *.52.38.80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단지 관심과 즐거움만으로 갈 수 있는 바다와는 달리

인내심과 노력이 필요해서, 산을 오르는 사람들로 부터 받는 느낌은

차이가 있다고 늘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라는 베테랑의 모토를 평생 곁에 두고 살았네요 ! ^^

저도 산을 좋아하거든요 !

오늘은 나를 좋아했던 대만 친구가 들려주던 왕지환의 싯구가 생각나네요,

오랜만에 옛 친구 생각이 나네요, 술이나 한 잔 해야 겠네요 !

 

등관작루(登鸛雀樓) -관작루에 올라 (鸛鵲樓라고도 한다)

- 왕지환(王之渙)-

白日依山盡 백일의산진

黃河入海流 황하입해류

欲窮千里目 욕궁천리목

更上一層樓 경상일층루

 

해는 산에 기대 서쪽으로 지고

황하는 도도히 동쪽 바다로 드네

천 리 밖 세상 끝을 내다보고 싶어

다시 한 층을 더 올라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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