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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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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5일 09시 56분 등록

잠들지 않는 유년


아비는 자식이 커갈 때 모종의 상황에 끼어들고 싶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멀리서 그 아이가 스스로 해쳐 나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만 봐야 할 때가 있다. 낯선 나라에서, 어린 나이에 이방인이라는 자각을 들 씌우게 한 건 아닌가 하는 자괴가 들 때마다, 아비가 되어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도무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비이커 속에 용액이 조용히 침잠해 가는 것을 잠자코 지켜봐야 하는 화학자처럼, 온갖 시나리오와 나와선 안 될 결과를 예측하지만 바라만 봐야 하는 속수무책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공부라는 것을 해야 할 테고 학교 친구들과 같이 놀기 위해선 일종의 텃세를 경험하게 될 텐데, 나는 오로지 내 앞 일에 정신이 빼앗겨 11살 아들의 고통을 감지하지 못했다. 낯선 외국의 학교에서, 놀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보며 혼자 난간에 기대선 아들을 나는 멀리서 본 적이 있다.


어느 날, 아들은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며 얘기했다. 학교에서 불편한 일을 당한 모양이다. 같이 축구를 하려는데 친구들이 기다리라 하곤 1시간을 넘게 들여 주지 않았다 한다. 마냥 기다렸다 한다. 그날 결국 축구를 하지 못했다. 아직은 말이 어설퍼 누군가에게 하소연 할 수 없고 그렇다고 감히 싸울 수도 없는 내성적인 아이여서, 혼자 손가락으로 벽을 그어가며 울었을 것이다. 거기다 대고 기껏 아들에게 한다는 말이 다른 친구들하고 더 재미있게 놀면 돼.” 하며 바보 같은 말을 나는 지껄였다. 그런데, 친구와 축구를 하고 싶어 하는 아들에게 아비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아비는 친구가 되어 줄 수 없다. 위로한답시고 공연히 말을 덧붙이는 건 공허함만 가중시킨다. 그날 밤, 아들의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아들의 옛추억들을 들었다. 1시간을 넘게 쏟아내는 이야기들 속에 아들이 겪고 있는 외로움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한국에서 있었던 친구들과의 에피소드를 모두 기억해 내고 표정까지 묘사해 내는 걸 보면 간직하고 싶은 소중함의 정도가 느껴진다. 지금 그는 그네들을 놔두고 낯선 이곳에, 어느 날, 느닷없이 와 있는 것이다.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생각보다 아들은 자기 앞에 생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관계라는 것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고 아비로 인해 맞닥뜨리게 된 고난을 감내하는 의젓함이 있었다. 태어난 이후로 아들의 얘기를 가장 오래 들어본 날이다. 그는 외롭다 하지 않았고 힘들다 말하지 않았지만 오롯이 기억하고 있는 아름다운 추억 얘기가 지금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지를 웅변했다.


참새의 아픈 다리를 후시딘으로 발라가며 살리려 했으나 결국 죽은 참새를 양지 바른 곳에 묻어 두었던 일, 이튿날 참새 위로 파리들이 날아들어 그 참새의 죽음을 직감했던 일, 자전거를 타고 장유(창원과 인접한 김해시의 면소재지)까지 갔다가 돌아온 일, 멀리 피어 오르는 심상치 않은 연기를 보곤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난생처음 가장 멀리 해반천 끝까지 친구들과 걸었던 일, 다시 돌아오는 길을 잃었으나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친구들을 이끌어 결국 연지공원을 발견하고 집에 돌아온 일, 미끄럼틀을 한번 무너뜨려 보자는 의기투합으로 미끄럼틀 기둥을 덥고 있는 모래를 팠으나 육중한 콘크리트 기초를 발견하곤 포기한 일, 학교를 탐험하며 귀신이 드나든다는 지하 체육실에 들어갔다가 문이 닫혀 나오지 못했던 일, 원대(한국의 베프)와 친한 친구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다툼이 있었는지 모른다며 치고 박으며 싸우며 친해 졌던 일, 학교 옆 병설 유치원 놀이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담임 선생님께 혼났던 일, 자기보다 형인 동네 친구에게 말을 놓으며 친해졌던 사연,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익혔던 길과 특유의 냄새,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 갑자기 라오스로 가게 됐다며 자신이 보물처럼 아끼던 유희왕 카드를 나눠주며 주변을 하나씩 정리했던 일, 그 친구들의 표정, 버릇들을 곱씹으며 언젠가 돌아가 그 친구들을 꼭 다시 보고 싶다며 나지막이 되 내이던 그 밤.


잠들지 않는 그의 유년은 그가 살아가는 힘이 될 거란 걸 직감한다. 고맙게도 아들은 나의 유년까지 끄집어 낸다. 하루 종일 숫자와 표를 정리하며 키보드를 두드려대는 손 위로 신나게 딱지치기를 하고 낙엽을 줍고 흙을 파내고 흥에 겨워다망구를 외치던 조봇한 내 작은 손을 잡고 깊은 밤을 날아 간다. 잠들지 않는 유년과 잠들 수 없었던 밤. 그렇다.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다. 중요하다 여기는 것들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축구는 언제든 다시 할 수 있다. 아비는 다만 꿋꿋하게 잘 이겨 나가길 바랄 뿐이다. 텃세를 경험했으니 훗날 텃세 부릴 위치에서 텃세를 부리는 대신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는 배움을 얻었으리. 힘내거라, 삶은 기묘하게 전진하니 그 믿음을 잃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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