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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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여유산 讀書如遊山
마르크스의 자본 첫 장을
다시 펼쳐 들었다. 한때 인화성 짙은 불의 책이어서 사람들이 읽지 못했다면 지금은 다 탄 재가 되어서
사람들이 읽지 않는 책이다.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한때 지구상 가장 전면적이고 살육으로 가득 찬
전쟁과 냉전을 낳을 만큼 강력하게 현대 역사의 인간의 몸과 마음을 빨아들였던 책은 역할을 다한 수컷처럼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한 채 누군가의 책꽂이서만
가는 호흡으로 연명하고 있을 테다.
그러나 산의 날씨 같은
인간의 변덕과는 무관하게 책 안에는 여전히 까마득히 높은 산이 처음부터 직벽처럼 의연히 서 있다. 산을
오르는 초입 길에서부터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길고 험한 길을 오를 수 없는데 저자는 이 사태를 예감한듯 짐짓 근엄한 경고장 같은 격언을 책 서문에
걸어 두었다. “가파른 길을 기어올라가는 사람만이 (학문의) 빛나는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산에 들어가는 일이 반드시
그 산 정수리 밟고자 함은 아니라고 생각한 지 오래다. 산꼭대기에 올라가거나 말았거나 하루를 산과 놀다
들어온 뒤 내 방 낡은 책상에 낮에 같이 놀던 그 산을 풀어놓으면 나는 마치 오래 묵은 책을 펴 들고 이리 저리 넘겨보고 냄새 맡아보고 가슴에
안았다가 종이를 촤라락 거리는 기쁨처럼 새롭고 아득하고, 좋을 뿐이다.
그러나 가끔 끝까지 올라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광을 똑똑히 기억하고 내려와 다시 그 아름다움을 곱씹어 보고 싶은 산이 있다.
산의 깊은 골짜기를 건너고
구비구비 돌아가는 오솔길을 걸어가다 날 선 능선을 만나 두려움과 아찔함도 느끼며 마침내 오른 꼭대기에 털썩 주저앉아 세상을 지겨울 때까지 마음껏
내려다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산을 온 몸으로 끌어안고 내려선 뒤에는 올라가기 전과 내려온 다음의
나는 달라진다. 내가 볼 수 있는 가장 먼 곳의 설계도가 내 몸에 새겨지고 지금 발 디디고 선 이 땅이
영 낯설고 새롭게 보이는 것처럼 활자와 활자를 건너는 동안 새로운 눈동자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오르고 싶은 것이다. 이제는 재가 되어 버린 책 속에 거대한 콩나무의 발아력을 가진 씨앗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讀書如遊山, 독서는 산과 함께 노니는 것과 같다. ‘힘쓴 뒤 원래 자리로 스스로 내려오는 것이 같고(工力盡時元自下), 천천히 그러나 얕고 깊은 곳을 모두 살펴봐야 함이 또한 같다(淺深得處摠由渠)’. 조선의 대제학 퇴계가 유소백산록 遊小白山錄에서 ‘처음에 울적하게
막혔던 것이 나중에는 시원함을 얻는다’ 라고 한 것은 책 읽고 공부하는 과정을 산행의 과정에 빗대어
한 말이다. 산에 오르듯 불의 책을 씹어 삼키며 걸어보려 한다. 그
꼭대기에 올라 가장 멀리까지 날아간 재먼지를 눈썹 위에 손을 얹고 한참을 지켜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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