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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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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30일 18시 39분 등록

욕지 이야기(1)


느닷없이 욕지로 가고 싶었다. 그래, 욕지도는 내 길고 하염없는 얘기를 말없이 들어 줄 터. 삼덕항, 여름과 가을 사이 빛나던 햇살이 난반사하던 날, 홀로 욕지로 들어가는 배의 흘수선에 모여든 잔챙이 물고기와 내 눈을 마주치며 날아갔다 돌아오는 갈매기 날갯짓은 어찌 이제사 왔는가 하는 욕지가 보낸 전령 같다. 사느라, 오래 전 욕지가 제 온 몸으로 건넸던 선물을 잊고 살았던 게다. 지금은 아내가 된 당시 여자친구와의 밀월 여행, 첫 아이 첫 돌 직후에 떠났던 여름 휴가, 해녀촌 전복죽 맛을 잊지 못해 느긋한 일요일 오전 TV를 보다 갑자기 출발했던 욕지, 서울 친구 감탄을 자아내던 출렁다리, 장모님 입맛을 돌려놓은 고구마. 욕지도가 나를 살게 했었다. 삶의 곡절에서 불현듯 떠오른 욕지도는 우연이 아니었고 갑작스런 일이 아니었다. 욕지는 줄곧 나에게 시그널을 보냈던 것이다.

 

선미에 홀로 서서 물보라 일으키며 삼덕항을 출발할 때 짙은 벙커C유 냄새가 내 앞날과도 같이 사납게 코를 찌른다. 내 월급쟁이 정체성은 같잖았지만 삶은 같잖치가 않았다. 징글징글하게 따라다니는 엑셀과 파워포인트를 3초간 생각하다 머리를 흔들며 얼른 지웠다. 피해갈 순 없는 것들은 돌파하는 것이다. 늘 다른 길을 가겠노라 길을 나섰지만 같은 길로 들어서는 어리석음을 매번 저질렀다. 밥의 덫에 걸려든 나는 나를 극복할 수 있는가, 욕지에 안겨 나는 물어볼 참이다. 매일 저녁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좋았고, 가끔 하는 낯선 이국의 여행도 아름다웠지만, 내 인생을 드론 뷰로 봤을 땐 거대한 삶 안에 갇힌 미물에 다름 아니었다. 나는 오로지 내가 내린 나의 결정으로 내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선수 램프가 땅에 끌리며 접안됐고 배에 실려 꼼짝않던 차들이 기지개를 켜며 뭍으로 내린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리며 수천 년 인류가 살며 흠향했던 갯내음을 오래된 나의 냄새처럼 폐부 깊숙이 빨아 당겼다.

 

 

어쩌나, 배가 끊겼어

 

1997년 겨울이었다. 대통령은 김영삼이었고 TV 개그 프로그램에는 신인 박명수가 나왔고 9시 뉴스에서 처음 들었던 IMF라는 말은 나오자마자 모든 이의 입에 오르내렸다. 대학교 1학년, 그 모든 것들은 알 바가 아니었다. 내 눈 앞에 있는 여자친구와 지난 주 받은 입영통지서가 젊은 날을 온통 흔들고 있었으니 여자친구가 곁에 없을 땐 폭풍 속이었고 여자친구와 함께 있을 땐 태풍의 중심에 있는 듯 고요한 날들이었다. 그 뿐이었다. 천둥벌거숭이.

 

추억과 현실의 간격을 뚫어지게 인지하고 있는 지금의 내가, 감정과 실재를 뚫어지게 인지하고 있는 그때의 나에게 동지애를 느낀다고 한다면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재수 없다 할까. 그때 그 불만 투성이의 

노여움과 서러움으로 가득한 내 눈빛을 보고 희미한 갈색 눈 알이라고 말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빠져 들었다. 더더욱. 우리는 아무것도 위험해 하지 않았다. 감정을 일일이 실천해내는 무모한 맛으로 사는 거다. IMF에 모두가 겁먹고 있을 때 내 보기에 세상은 겁먹을 필요도, 그리 대단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떠벌이고 요란했다. 그때 나는 잔잔한 먼 바다와 그럭저럭 흘러와 안벽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 들으며 욕지도에 있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 마음에 드는 지역을 고르고 차 시간을 보니 10분 뒤 출발이었다. 갑자기 황급해졌고 우리는 즐거웠다. 통영으로 가는 버스 안은 바깥 모두가 휘몰아치며 쓸려나가던 태풍의 중심, 그 고요함이 함께 하는 것 같았다. 군대 가면, 우리는 지금 이대로일까 같은 질문을 목구멍에 가득 채웠으면서도 묻지 않았다. 통영은 활기찼다. 서호시장 앞 줄줄이 세워진 어선들이 우리를 도열했고 선수에 낡은 타이어와 하이파이브하며 우리는 걸었다. 중앙시장, 빨간 다라이를 기어코 뛰쳐나온 뽈락을 아주머니는 손님과 흥정하면서 붉은 고무장갑으로 우악스레 잡아 다시 넣었다. 우리, 섬으로 가볼까? 남자친구를 군대 보내고 외로움을 견뎌야 할 고운 입술이 물었다.

 

욕지도 선창가 고깃집(2021년, 지금은 자장면 집으로 바뀌어 있었다)에서 삼겹살을 먹으며 봤던 TV에 김영삼, 박명수, IMF가 나왔던 것이다. 손님은 단 둘이었고, TV 소리를 빼면 적막했다.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TV를 보고 있었지만 우리 쪽을 힐끔 쳐다보는 소리가 휙휙 들릴 지경이었다. 고깃집을 나서는 길에 마지막 배 시간을 물었고 아주머니는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막배 끊긴지 오래지. 날씨가 이래가 내일도 뜨것나.‘ ...


(다음 주 수요편지에서 계속 이어갑니다)





IP *.161.53.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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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1 04:12:10 *.134.201.23

눈 앞에 그림처럼  그 순간들이 떠 오르네요 ! ^^ 

그리고 나의 기억도 쬐금은... 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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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1 08:59:08 *.138.247.98

IMF 때 은행을 다니고 있었는데, 동원된 은행원들이 지하철 입구에서
"안녕하십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은행을 그만둬야 했습니다.
온실에서 나오니 삭풍이 불었지만
지금도 직장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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