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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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홀딱 벗고 욕실로 들어섰는데 따뜻한 물이 안나옵니다. 아침 기온이 영하 20도 가까운데. 보일러 조작장치를 보니 점검등이 들어와 있습니다. 주섬주섬 옷을 다시 입습니다. 밖으로 나와 보일러실로 가봅니다. 이런! 난방유가 방금 똑 떨어진 모양입니다. 200리터 한 드럼을 가득 채운 게 한달도 안된 것 같은데, 이 숲에 오고 가장 추운 12월을 보낸 것이 맞는가 봅니다. 온도에 따라 자동으로 가동되도록 해둔 보일러가 예년에 비해 이번 겨울에는 거의 두 배 빠르게 기름을 소진한 꼴입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산방은 지금 눈에 완전히 갇힌 상태. 사륜구동인 내 차도 올라올 수 없는 상황이니 등유 배달 차는 더더욱 올라올 방법이 없는 상태입니다. 최근 열흘 동안 눈을 쓸고 또 쓰는 날을 보냈지만 이틀이 멀다하고 내리는 눈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낮 동안 쓸어서 길을 터넣고 잠들면 밤새 또 눈이 내리고, 어떤 날은 쓸고 돌아서면 다시 눈이 쏟아지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차가 다닐 수 있도록 두 줄로 길을 뚫던 것을 사람이 다닐 수 있는 폭의 길만 터놓는 방향으로 어제부터 바꾸고 말았지요. 결국 저 눈이 다 녹기 전에는 난방유 배달 차를 오게 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구들방에 뜨끈하게 장작 지피면 잠이야 춥지 않게 자겠지만, 침실보다 너른 면적을 차지하는 거실과 주방, 욕실에 난방을 하지 않고 겨울을 보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입니다. 3주 동안 집을 떠나는 딸 녀석을 배웅하고, 신년맞이 영화도 한 편 보기로 했는데 당장 머리도 감지 못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또 폭설이 쏟아집니다. 우선 오늘은 그렇게 모처럼 가족과 하루를 묵으며 보내기로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두 말의 등유를 사서 돌아올 작정입니다. 지게에 기름을 져서 올리면 당장 급한 냉기는 지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 잊고 그렇게 기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돌아오는 길, 아내가 작은 보따리 하나를 건넵니다. 김치와 다른 반찬 두어 가지라며 무사하라 눈인사도 함께 보냅니다.
여우숲 입구에 차를 세우고 하루 사이에 또 쌓인 눈을 빗자루로 쓸어내며 길을 텄습니다. 겨울 해는 참 빠르게 떨어집니다. 해가 떨어지는 시간에는 늘 마을로 내려갔던 바람을 숲이 다시 긁어 모읍니다. 겨우 장독대까지 밖에 길을 트지 못했는데, 벌써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중입니다. 서둘러 지게에 등유 한 통을 얹고 푹푹 눈을 밟으며 산방으로 올라왔습니다. 보일러실 기름 탱크에 져 올린 기름 한 말을 쏟아부었습니다. 유량 게이지에 별 반응이 없습니다. 그래도 보일러를 가동하자 부웅 소리를 내며 연소를 시작합니다. 지게를 세워놓고 우선 아궁이에 불을 지핍니다. 다시 지게를 지고 내려가 남은 기름 한 통을 지게에 얹었습니다. 아내가 챙겨준 반찬 보따리와 작은 책가방을 지게 끝에 꿰어 달았습니다. 돌아와 다시 기름을 붓고 아궁이에 장작 몇 개를 또 집어 넣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 불 앞에 앉아 시린 발을 녹이며 상념에 잠겼습니다. 참 추운 날이 계속되고 있으니 다시 곧 기름이 떨어질 것이고 나는 기약없이 기름을 지게로 져 날라야 할 것입니다. 이런 추세라면 눈을 치우는 일의 끝도 기약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이 상황이 나쁘지가 않습니다. 종일 비질을 해대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픕니다. 다른 일을 할 시간을 내기도 어렵습니다. 기름을 말통에 담아 지게로 져올려야 하는 상황도 낭만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이런 상황들이 암담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의 내면은 ‘이만하면 족하지?’ 라고 묻습니다. 내가 또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합니다. 그래 이만하면 족하다. 족하다. 패 놓은 장작 있어 다행이고, 물 데울 편리한 보일러 있어 다행이고, 어둠 밝힐 전기가 아직 있으니 또 다행이다. 물 얼지 않아서 다행이고, 허리까지 눈 쌓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렇습니다. 숲에 사는 즐거움은 이만하면 족합니다. 우리 불행이 모자람에서 연유하지 않고, 또 불편에 그 뿌리를 두지 않았으므로, 이만하면 족합니다. 그대도 올 한 해 이만하면 족하다 싶은 나날 만드시기 빌며... 여우숲에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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