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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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좋아하는 영화 몇 편을 참 오랜만에 다시 보았습니다. 한때 정말 좋아해서 수십 번을 돌려보았던 영화들이라 거의 모든 장면이 머릿속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영화가 시작하니 새로운 해석이 제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인물들의 다른 점이 보이고, 인상적인 장면이 새로 보였으며, 전에는 어색하다고 여긴 결말이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영화를 (상업적이긴 해도) 예술의 한 갈래로 본다면 전체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오갈 텐데, 그 최선을 찾아가는 여정을 단 한 번의 시청으로는 다 알아채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좋은 영화일수록 그렇겠죠.
볼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영화는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영화를 보는 제 시선과 상황도 달라져서 그럴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경험과 문제가 너무 크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것과 관련 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를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지금은 영화를 볼 때 조금 시야가 넓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문제와 영화에서 다루는 갈등의 비슷한 점을 찾아내기도 하고, 주인공 외 다른 등장인물들의 상황과 처지에도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게 됐습니다. 아마 예전보다 제가 다양한 상황 속 여러 처지에 놓여있던 경험이 늘면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인터뷰집 <진정한 장소>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글쓰기란 세상과 겨루는 일이며, 체험한 시간 외에 다른 시간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또 글 안에서 창조된 공간은 어느 곳이라고 지정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곳에 모든 장소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고도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모든 창작에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글을 쓴다, 콘티를 짠다는 등의 구체적인 활동을 주로 얘기하지만, 그 결과물은 시청자, 독자가 들어와 머무를 수 있는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영화나 소설에 나왔던 많은 공간들을 모방한 카페나 식당들이 생기는 것도 이 이야기에 푹 빠졌던 경험이 사람들에게 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움에 끌려 좋은 공간에 가볼 때마다 새로운 장면이 나오는 것처럼 멋진 선순환이 만들어진다면 그 글 안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깊은 감정이 시야를 흐린다는 표현을 많이 쓰지만, ‘빠져들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특히나 예술은 그것이 말하고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애정을 갖고 깊게 들여다보아야 더 잘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편지에서는 영화 이야기만 했지만, 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한때를 함께 했던 소중한 책들을 꺼내 다시 한번 읽어보는 시간을 가져봐야겠습니다. 여러분의 여러 번 읽은 책, 여러 번 본 영화는 어떤 것인지 궁금하네요.
"보는 것은 보이는 것 이상이다."
녹화한 선수 게임 영상을 계속 반복해서 보고있는 내게 아내가 말하기를
"아니, 같은 걸 도대체 몇번을 보는거예요 달달 외우고도 남았겠네 ! "
"한 번에 모든 것을 보기란 쉽지 않아요 ! 끊임없이 다시 보면서 양 선수의 움직임과 의도의 변화를 분석하고 정리하고 구분해내야만 보다 더 적절한 대응을 찾을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 것이지요!!
부처는 "우주란 무엇입니까 ?" 라고 묻는 대답에
"우주는 바닷가의 수많은 모래알로 이루어진 백사장과 같다. 그리고 그 한 알 한 알 속에는 온 우주가 있다."
그렇게 " 게임을 하는 무대 위에서 같은 순간, 같은 대상, 같은 공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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