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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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식당 밖에는 한참 커가는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습니다.
올해는 그 잎이 푸르다 못해 검습니다. 형태를 갖춰가는 새끼 감이 주렁주렁 귀엽습니다. 그 푸르름이 시원합니다.
내가 이 감나무를 특히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이 나무가 죽을 뻔하다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재작년에 골이 깊은 수피의 성긴 틈새마다 작은 벌레들이 딱지처럼 가득하여 약을 쳐 보았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습니다. 참깨만한 누에고치 속에 몸을 숨기고 수액을 빨아먹는 진드기 딱지들을 보다 못해 부탄가스로 작은 화염방사기를 만들어 수피에 붙은 벌레집들을 모두 태워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작년에는 그 일에 놀라고 힘들었던지 죽은 듯 겨우 명맥만을 유지했습니다. 감은 하나도 달리지 않았습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를 보는 것은 참 안된 일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저렇게 아름답게 되살아났군요.
비 오는 내내 창밖의 그 나무를 오래 동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넓고 두꺼운 녹색 잎을 타고 경쾌하게 굴러 떨어져 내립니다. 검푸른 색깔은 짙은 여름을 예고하고 작은 연두빛 새끼감은 이내 가을의 주황색 단감으로 순식간에 자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문득 이런 경이로운 것들은 오직 한가로운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킬머라는 시인이 ‘나 같은 바보들은 시를 짓고, 오로지 하나님만이 나무를 만든다’라고 말한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타고르가 ‘나무는 귀를 기울이고 있는 하늘에게 말을 걸려는 대지의 끝없는 노력’이라고 한 말을 너무도 잘 이해하게 됩니다. 땅이 나무를 통해 하늘에 전하려는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어느새 비는 그치고 햇빛이 나뭇잎에 쏟아집니다.
한가롭다는 것은 시간이 많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유의 한 방식이며 생활의 한 형태입니다. 재산이 많으면 번뇌도 깊듯 시간이 많아서 번잡해 질 수도 있습니다. 글자와 글자 사이, 뜻과 뜻 사이의 텅 빈 공간이 바로 시듯이 한가로움은 바쁨과 바쁨 사이의 텅 빈 공간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활 속의 시인 셈입니다. 이때 우리는 불현듯 텅 빈 공간 속에 존재하는 새로운 세상맛을 음미할 수 있게 됩니다.
시간이 굼뱅이처럼 느릿느릿 지나는 그윽한 주말 되세요.
(2007.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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