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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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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3일 00시 35분 등록

헤르만 헤세의 소설 <클링조어의 여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화가 클링조어는 마흔두 살이 되던 해에, 그가 전부터 좋아했고 종종 방문한 적이 있는 팜팜비오, 카레노, 라구노 근처의 남쪽 지방으로 가서 생에 마지막 여름을 보냈다.”

 

헤세도 그랬습니다. 1919년 마흔두 살의 그는 스위스 남쪽의 한적한 마을 몬타뇰라로 이주했습니다. 상처 입은 짐승이 은신처를 찾듯이, 사회적 역할을 버리고 가족들마저 떼어 놓은 채 혼자.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거기에서 그는 마지막 그림들을 그렸다. 현상세계의 형식들을 자유롭게 해석한, 비틀어진 나무와 식물 같은 집을 그린, 기이하고도 빛나는, 그러면서도 고요한, 꿈처럼 고요한 그림들, 전문가들이 그의 ‘전성기’ 그림보다 더 선호하는 그림들이 창작되었다.”

 

헤세도 그랬습니다. 몇 년 전부터 틈틈이 그려온 그의 그림은 몬타뇰라에서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았습니다. 그림과 함께 글쓰기에도 몰두해서 이곳에 온 첫 여름, 헤세는 두 편의 소설을 폭풍처럼 써내려갔습니다. 이 소설들은 과거의 그것들과 달랐습니다. 그의 소설은 이전의 낭만과 부드러움이 사라지고 한결 대담해지고 깊어졌습니다. <클링조어의 여름>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한 소설가 헤세를 알리는 전조였습니다. 이후부터 <싯다르타>, <황야의 이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등의 걸작이 탄생합니다.

 

다시 이어지는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의 ‘머리말’ 한 토막.

 

“많은 사람들은 클링조어가 이미 죽기 몇 달 전부터 정신병을 앓아 왔노라고 수군댔으며, (...) 이러한 풍문들보다 더 신빙성 있는 근거는 클링조어의 음주벽에 대한 수많은 일화들이다. 이러한 성향은 그가 분명 가지고 있던 것이었으며, 누구보다도 클링조어 자신이 이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한동안, 그리고 생의 마지막 몇 달 동안에도 역시, 자주 폭음을 함으로써 즐거움을 느꼈을 뿐 아니라, 간신히 이겨내고 있던 우수와 고통을 마비시키는 방편으로서 종종 의식적으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려고 했다.”

 

헤세는 1916년 처음으로 정신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내면을 향한 탐험은 거부할 수 없는 평생의 작업이 되었습니다. 몬타뇰라에서 맞은 첫 여름 동안 헤세는 시도 때도 없이 그림을 그리고 포도주를 마시고 글을 썼습니다. 클링조어가 포도주에 취해 붉은색을 붓에 묻혀 그림을 그렸듯이, 그 역시 포도주에 취해 붓질하듯 붉은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의 문장이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표현주의적 화풍(風)의 문체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보입니다.

 

“클링조어가 죽었다는 소식은 늦가을에 그의 친구들을 경악시켰다. 그의 편지 가운데 상당수에 죽음에 대한 예감 또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그 때문에 그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이즈음 헤세의 내면과 현실 세계는 혼란 속에서 해체되고 몰락했습니다. 그는 여러 번 자살을 생각하면서 자연과 포도주와 그림의 마술로 견뎠습니다.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은 헤르만 헤세의 마지막 여름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을 쓴 1919년 여름은 ‘전쟁에서 삶으로 귀환한’ 계절,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은’ 계절, 요컨대 이전의 헤세와 이후의 헤세를 가르는 계절입니다. 이 전환의 계절에 클링조어와 마찬가지로 헤세는 스스로를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클링조어의 죽음은 과거 헤세의 죽음이자 새로운 헤세로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클링조어와 헤세는 하나입니다. 클링조어의 치열함, 고뇌와 성찰, 위기와 창조적 승화는 헤세의 정신적 죽음과 부활의 과정과 같습니다. <클링조어의 여름>은 헤세의 삶을 알고 읽어야 깊이 맛볼 수 있습니다. 책의 끝에 담긴 옮긴이의 ‘작품 해설’을 먼저 읽고 소설을 읽으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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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헤세 저, 황승환 역,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민음사,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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