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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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마지막 주말에 친한 교수님을 뵈러 논산에 놀러갔다 왔습니다.
가을에 접어드는 논은 선명한 연두빛 겨자색으로 반짝였고, 코스모스와 억새가 가을비에 젖어 청량하고 운치 있었습니다.
마침 '구본형 다시읽기'를 하고 있던 저에게 이번 여행은 나의 욕망과 목소리를 새롭게 발견하는 여행이었습니다.
여행 중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아주 우연히 계룡산 허리에 있는 수녀원을 가게되었는데,
천주교 성지가 지닌 일반적인 구성 세 가지를 독특한 디테일로 표현해낸 것을 보고는 이 곳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뒤집어놓은 둥근 그릇처럼 생긴 대성당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자궁 모양을 본따 만들었다고 하는데, 겉에서 보기에는 영락없는 황토 불가마 사우나였습니다.
실제로 어느 노부부가 계룡산 근처에 좋기로 소문난 불가마 사우나를 찾아왔다가 이곳 문을 두드린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캠벨이 말했듯 '미사'를 뜻하는 라틴어는 원래 우리를 일상성의 마당에서 '몰아낸다'는 뜻을 지닙니다. 마치 여행처럼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영적인 차원을 생각하며 숨통 틀 구석을 만들어주는 시간이란 뜻입니다. 일상의 피로를 풀러 가는 불가마 사우나와 영혼의 때를 벗기러 오는 자궁모양의 성당이 상당히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참 귀엽고 편안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16번째 장면까지 있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보통 성당의 계단이나 정원에는 예수가 죽기 직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과정을 14개의 장면으로 나눠놓는 상징물이 있습니다. 보통 이 상징물은 돌무덤에 예수의 주검을 뉘이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14처에서 계단을 조금 올라가면 탁 트인 풀밭 한 가운데 돌이 하나 있고 예수가 다시 부활하는 장면이 조각된 15처가 있더군요. 그리고 돌의 뒷면을 돌아보면 예수가 하늘로 승천하는 16처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십자가의 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한 사실 자체가 마음의 짐이 되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이 곳의 15처와 16처를 통해 죽음 이후의 구체적인 장면을 기억해내며 눈에 보이는고난의 길 뒤에 숨겨진 행복과 기쁨을 깨닫고는 곧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마지막은 미로가 있는 정원입니다.
이곳의 정원에는 1200년경 프랑스 샤트레스 성당의 미로를 재현한 둥근 미로가 있었는데, 미로의 중간에 커다란 검은 돌이 놓여있었습니다. 미로를 따라 걷다보면 중간의 검은 돌과 가까워 지다가도 멀어지고 멀어지다가도 가까워지면서 결국 검은 돌에 도달하게 설계되어 있더군요. 인간이 짠 계획표보다 더 큰 운명의 인도가 있다는 사실을 대단히 품격있게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치 아주 아름다운 오페라를 처음 들은 쇼생크의 죄수처럼 한동안 가만히 서있었습니다.
얼마전에 읽었던 '신화 읽는 시간'에는 이타카Ithaca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영웅 오디세우스의 모험담인 오딧세이아를 읽고 콘스탄티노스 카바피라는 그리스 시인이 아주 멋지게 쓴 감상문입니다. 나도 이번 여행의 여행기를 시로 써보면 어떨까 하고 한번 써보았습니다. 시처럼 어울리는 1박 2일을 보내고 나니 시가 절로 나오더군요.
가을비 맞는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들녘,
왼편에는 억새, 오른편에는 코스모스
쭉 뻗은 2차선 도로를 따라가면 그 앞에
물안개 사이로 듬성듬성 드러난 계룡산 봉우리.
산은 영웅처럼 넓은 어깨로 버티고 서있다.
산이 지키고 있는 것은 속세 밖의 영역
거룩함과 진리와 모든 것이 시작된 동시에 끝난 우주의 자궁.
그곳은 신과 영웅들의 세상.
살아서는 누구도 가볼 수 없는 곳이지만,
우리는 구름 사이로 아주 잠깐 신들의 연회를 훔쳐 보았지.
그곳에서는 영웅이 별이 되고,
사람의 죄를 위해 죽은 아들이 사흘만에 부활하고,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혈이 된다.
깊은 산은 침묵으로 외친다.
네 안의 신을 찾아라.
잠자는 영웅들을 깨워
네게 주어진 모험을 떠나라.
오늘을 사로잡아 너의 인생을 세워라.
그 실을 절대로 놓지 말라.
아주 높은 그곳에서 내 삶이 내려다보였지.
내 인생은 깊은 미로였어.
커다란 원, 그 중심에 검은 돌이 놓여있고,
원 바깥의 출발점에서 돌까지 가는 미로가
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
삶은 핵심으로 가까워지기 위한 여정이건만
목적지에 가까워졌다가도 멀어지고, 멀어졌다가도
가까워진다.
태산같은 목소리가 다시 쏟아진다.
신은 너를 사랑하신다.
너를 위해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신다.
네가 하는 모든 일을 씨줄처럼 늘어뜨리면
신은 우연이라는 날줄로 그것들을 엮어
아름다운 비단을 짜리라.
태어날때부터 네가 쥐고 있는 실을 따라가라.
그리하면 너는 죽어서도 영원히 살게 되리라.
신의 외침은 울림이 되어 침묵으로 나를 뒤흔들고,
어둠속에 잠겨있던 나의 무의식은
그의 선동에 대답했네.
신이시여, 뜻대로 하십시오.
순간 신이 오래전 내게 심어놓은 별 하나
섬광처럼 반짝이더니
뜨겁게 빛을 내기 시작해.
맨드라미와 단풍과 감나무와 나는 같이 춤을 추었네.
우리는 같은 우주에서 웃으며 어울리는 존재였고
각자의 춤으로 가장 멋진 군무를 추었다.
나는 신들의 땅을 뒤로한 채
나와 어깨동무를 하고 나란히
집으로 돌아왔지.
나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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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
사부님이
부활하셨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네.
계룡산 자락이 범상치 않구나.
나도 해언이의 글을 보니 시 한 수 읊고 싶구나.
한 남자가 있었네.
갸냘퍼.
모성애를 자극해.
심지는 대못처럼 단단해.
날마다
토사곽란에 시달리면서도
활을 쐈어.
바닷가에서
온갖 번민과 전략에 골몰했어.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어.
아니 죽음의 바다에 기꺼이, 장렬하게 던졌어.
그게 운명이라고 느낀게야.
그가 날 잡아 끌어.
운명을 거부하지 말라고.
운명은 숙명이 아니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
그걸 느끼는 순간 용기가 필요해.
거기에 용맹정진하게 뛰어들어야 해.
그게 진짜 삶이야.
한 남자가 있었어.
노모와 자식을 먼저 보내고
대성통곡해도
하나 알아 주는 이 없어도
묵묵이 운명을 받아들인 그 남자.
외로워, 외로워
하고 싶어도
명치에 힘을 주고
한 호흡 내쉬고
참았던 그 사내.
그 사내가 날 잡아 끄네.
거부하지 말라고.
두 팔 벌려 받아들이라고.
한 남자가 있었어.
외롭고 외로웠지만
장쾌한
역사를 바꾼 그 남자를
이제 사랑할 수 있을 거 같아.
고금도에 가길 참 잘했어.
VR 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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