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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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2월 초순에 베트남에 다녀왔다. 여행은 서바이벌이었다. 이제껏 살아온 연륜대신 여행에서 요구되는 감각에 기초하여 새로운 권력관계가 형성된다.^^ 우리 가족 중에서는 단연코 딸이 제왕이다. 딸은 스스로 말하길 ‘치사할 정도로 빠른 돈계산’을 필두로, 기획력과 공간감각이 뛰어나다. 그런 강점에 기초하여 게스트하우스 운영이 꿈이라니, 이번 여행은 그녀의 워밍업에 다름아니었다. 거기에 비하면 순둥이 아들이나 귀찮은 것 딱 질색인 나는 그저 딸애의 결정을 따르는 신민일 뿐이었다. 그렇다보니 판도는 딸의 총감독아래 아들은 진행을 맡고, 나는 방관자적인 참여자로 정해졌다.
아들과 딸은 여행을 떠나기전 경쟁적으로 여행지에 대한 조사를 해댔다. 나는 아이들이 짠 코스를 브리핑받고 길을 나섰다. 세밀한 계획보다 낯선 풍광에 맞닥뜨리는 의외성을 즐기는 쪽인데다 아이들을 믿거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현지에서 애들 뒤를 따라다니다 보니 이건 아니었다. 매사를 아이들의 정보에 의지하다 보니 자주 의기소침해지곤 했다. 지리나 교통 같은 초보적인 것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은 노약자가 된 것같은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가끔 개인적인 선물을 살 때라든지 회계를 맡은 아들에게서 돈을 타낼 때는 특히 기분이 묘했다. -안되겠어서 따로 환전을 해서 쓰고 다니다가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 20불 정도로 많지는 않았지만 이래저래 죽을 맛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주머니를 찰 수도 없었던 것이, 워낙 계산이 느리고 귀찮았기 때문이다. 베트남 화폐 2만‘동’이 1달러이다 보니, 단위가 너무 커서 헷갈렸다. 식사 한 번 잘 하고 나면 백만동이 나오는 식이었다. 호텔 같은 곳에서는 달러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돈과 달러, 베트남돈이 섞여 끝까지 말이 헛나오곤 했다. 좋아하지 않는 일이라 해도 책임을 맡았으면 그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아예 신경을 끄고 따라다녀서 그랬을 것이다. 꼼꼼한 아들도 신경깨나 쓰이는듯 했다. 여기에 비하면 딸은 우리가 겨우 하나를 보는 사이에 서너가지를 동시에 보거나 우리에게 장기배낭여행자 수준의 근검절약과 극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숙소를 정할 때 나는 서너군데만 돌아보면 충분하다. 그 정도면 시세가 나오고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수위가 나온다. 나는 후딱 정하고 기분좋게 만족한다. 딸애는 무려 열군데도 좋았다. 어지간한 곳이 나와도 또 다른 곳을 보고 싶어했다. 딸애의 기질과 결정을 존중해주다가 나중에는 화가 나서 내맘대로 정해 버렸다. 그러다보니 조금 나은 곳으로 결정하면 딸애가 조용해지고, 후진 곳에 묵게 되면 내가 짜증을 냈다.
엄마가 딸에 비해서 소비성이 높은 것이 켕겨서 처음엔 내 성향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의견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그쪽도 명절 직후의 연휴가 성수기인지라 숙소를 잡기가 쉽지 않았는데, 죽어라하고 돌아다니다가 같은 가격에 그중 못 한 곳을 고르는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 본 곳이 제일 괜찮아서 돌아갔지만 이미 차버렸고, 후반에도 괜찮은 곳이 있었지만 너무 멀어서 돌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때다 하고 한 마디 했다. “무조건 사례를 많이 모으고 신중한 결정을 하는 것이 늘 옳은 것은 아니야. 일에는 경중이라는 게 있으니, 오랫동안 살 집을 구하는 것과 2,3일 묵을 숙소를 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지. 능소능대라고 하듯이 일의 비중에 따라 유연한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하고, 이만하면 되었다 싶은 기준을 빨리 정하고 시간을 활용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살다보면 네 기질상 이런 상황에 자주 부딪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나대로 너무 빠른 결정 때문에 힘들 수도 있겠지. 결국 자기스타일대로 살되 자기가 결정한 것에 책임지고 누릴 수 있으면 되겠지만, 네가 너무 강하니 이번 일을 잘 기억해두면 좋겠어.”
그 때는 이렇게 우아하게 말하지 못했다. 딸의 현실감각과 신중함, 준비능력- 빨랫줄까지 준비해왔다-에 한참 못 미치는 내가 돌아봐지고, 주도성이 넘어가는 데 대해 예민해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지금 글을 쓰다 보니 확연하게 정리가 된다.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내가 딸에게 어떤 역할을 해 줄 수 있을지 좋은 경험을 한 느낌이다. 딸에 비하면 아들은 자기주장이 너무 없었다. 내키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상대방의 의견에 따라주는 타입이어서 문제를 일으키진 않지만 그 또한 답답한 노릇이었다. 늘 양보만 하다보면 자기욕구는 어떻게 풀 것이며, 자기표현과 주도성은 또 어디에서 배운단 말인가. 조용히 자기 일을 알아서 하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줄은 몰랐다. 아직 아들에게는 이런 우려를 표현하지 못했다. 아이들 또한 내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는 못했으리라. 여행을 통해 서로의 모습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어디쯤에서 멈춰야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좋은 일이다.
여행후반부에 이르자 우리는 서로의 취향을 인정하고 배려하는데 아주 능숙해졌다. 그리하여 여행은 자기표현의 기술, 소통의 기술을 훈련시켜준다는 두 번째 정의가 떠올랐다. 그밖에도 여행은 나의 무지와 게으름을 아프게 깨닫게 해 주었다. 늘 책을 가까이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탐구심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부쩍 여행에 대한 우선순위가 높아졌다. 앞으로 자주 떠나고 싶어질 것 같다. 여행은 몸을 다른 데로 옮기는 게 아니라 생각을 옮기는 것이라고 하니, 계속해서 자기를 혁신하고 싶은 사람은 기꺼이 여행과 친해져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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