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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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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17일 03시 35분 등록
 

글이 잘 써지지 않으면 시를 읽으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에 백퍼센트 공감한다.  글이 안 써지거나 재미가 없을 때 시집을 읽으며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실마리를 찾은 적이 두 어 번 있거니와, 시에서 배울 점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그 중 첫째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힘이다. 읽고 나서 그림이 그려지는 시가 좋은 시라고 한다. 김종삼의 ‘묵화’가 떠오른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묵화’-


불과 여섯 줄을 가지고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다니, 시는 정말 경제적인 장르이다. 나처럼 농촌을 직접 경험한 세대에게 이 시의 의미는 각별하다. 어릴 적 방학이면 가서 살다시피 하던 외가, 말년에도 다소곳한 모습을 잃지 않으셨던 외할머니의 모습을 한꺼번에 불러일으킨다. 이 시는 한 편의 회화이다.



북악은 창끝처럼 높이 솟았고

남산의 소나무는 검게 변했네.

송골매 지나가자 숲이 겁먹고

학 울음에 저 하늘은 새파래지네.

-박지원, ‘극한極寒’-


시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꼭 있어야 할 자리에 꼭 필요한 말만 쓴다. 그러면서도 하고싶은 말을 모두 전달한다. 박지원의 시 ‘극한’에는 ‘춥다’는 말 한 마디가 없지만, ‘쨍’ 하고 얼어붙은 겨울풍경이 저절로 느껴진다.


무심히 TV 채널을 돌리다가 개그맨 홍록기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여자들에게 절대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인즉,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럴듯하다 싶었다. 너무 소중하지만 너무나 흔해져버린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사랑을 느끼게 해 준다면, 내 감정이 보다 강렬하게 상대방에게 전달될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을 포함하여, 자유, 해방, 좌절, 희망, 도전 같은 어휘를 쓰지 않고도 그 감정들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좋은 글이 아닐까.


시는 바로 이런 것들을 도와준다.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고도 할 말을 다 하는 기술, 그 자리에 꼭 필요한 어휘를 배치하는 경제성, 널리 쓰이는 상투적인 말을 경계하고 늘 새로운 표현을 찾아 고심하는 치열함을 배우게 해 준다.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

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

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

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

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문인수, ‘쉬’-


이 시를 보라. 길지 않은 시에 인생이 다 들어 있다. 그래서 난 소설보다 시가 좋다. 소설은 간혹 장황하다. 하나의 메시지를 위해 너무나 긴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하지만 시는 몇 마디 말을 가지고 우리의 허를 찌른다. 지루할 정도로 평온한 일상에 숨어 있는 비정한 삶의 속성을 깨닫게 한다. 환갑이 지난 ‘그’가 아흔 넘은 아버지에게 그토록 극진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생명값, 몸 갚아 드리는 이유가 첫째겠지만 머지않아 ‘그’ 자신도 걸어가야 할 동병상련의 연민이 아니겠는가.


시 한 편으로 인생무상과 고령사회를 일깨우는, 이렇게 감동적이면서도 숙연해지는 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날 문득 발견한 ‘응’이라는 글자에서 장난스럽게 뻗쳐 가는 상상력을 보라. 가볍고 천연덕스러운 언어의 유희에 싱긋 웃음이 머금어진다. 시는  그야말로 언어의 교과서이다.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문정희, ‘응’ 부분-


 

■ 위에 인용한 시들은 모두 안도현의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에
   인용된 시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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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건친구
2010.02.18 00:34:28 *.180.96.4
오호..이런 우연이..정말 신기합니다.
제가 별 것도 아닌걸 자꾸 우연이라고 가져다 붙이는 걸까요? ^^
지난주에 저도 안도현님이 선별한 시를 골라놓은 책을 한 권 샀습니다.
아직 몇 페이지 못 읽었지만, 시가 가져오는 풍부한 이미지에 흠뻑 취했더랍니다.
여기 아래에 한 수 소개해 볼까요?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   ( 서정춘)

아버지는 새 봄맞이 남새밭에 똥 찌끌고 있고
어머니는 어덕배기 구덩이에 호박씨 놓고 있고
땋머리 정순이는 떽끼칼로 떽끼칼로 나물 캐고 있고
할머니는 복구를 불러서 손자 놈 똥이나 핥아 먹이고
나는 나는 나는
몽당손이 몽당손이 아재비를 따라
백석 시집 얻어보러 고개를 넘고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중에서..

유난히 춥고 눈도 많았던 겨울이라 그런지,
봄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시골의 봄맞이 모습이
너무나 반가운 시였습니다.
무엇보다 읍내서점으로 시 집을 얻어읽으러 가는 소년의 설렌 마음따라
내 마음도 덩달아 설레는 시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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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10.02.18 01:44:12 *.209.239.32
눈여겨 보아주시고  시까지 소개해주시니,
작은 우연이 더욱 정겹게 느껴지네요.
저는 시인들이 하도 백석, 백석 해서 읽어보려고 두 어 번 시도하다 포기한 적이 있거든요.
안도현이 소개하는 백석을 보고 조금은 친근해진 느낌이 들었는데
동건친구님이 옮겨주신 시도 참 좋네요.
그런데 아직 젊은 분 같으신데,
저와 정서가  비슷하십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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