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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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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8일 17시 59분 등록
서른번째 날

마지막 포도밥을 먹었다. 배가 고프거나, 먹고 싶어 먹는 게 아니다. 그저 때가 돼서 몇 알 입에 넣는다. 성경은 늘 배가 고프다 아우성을 치고, 내가 남긴 포도밥을 맛있게 해치운다. 나는 대신 엊그제 통영서 가져온 브로셔의 음식사진들을 감상하며 저녁을 대신하고 있다. 행복해진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저 사진감상 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해 질 수도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아마도 며칠 후면 먹을 수 있을 거란 기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보식을 하며 몸 상태를 잘 살펴야겠지만, 세상 모든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는 상태인지라 혀에 닿는 감촉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것 같다. 통영에서의 식사 메뉴도 이미 별표 꽁해놓았다. 저녁에는 생선횟집거리에서 청정해역의 푸른 통영바다를 보면서 싱싱한 생선회와 굴요리를 먹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엔 통영근해에서 잡히는 졸복으로 육질이 쫄깃하고 피를 맑게 한다는 복국이다. 통영서민들의 속풀이 음식이라는 시락국도 맛 볼 예정이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점심으론 충무김밥 도시락을 싸 올 것이고, 오는 길에 고속도로휴게소감자를 필히 맛볼 것이다. 맛을 본다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 내 몸과 마음까지 안달이 났다. 아~ 먹고 싶다.

옆방 사람들의 보식 식단을 가끔 들여다 보고 참고를 해 앞으로의 식단을 짜 보았다. 살 것들도 많고, 준비해야 할 것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혼자 사는 방에서는 거의 식사를 하지 않은 관계로 기껏 라면이나 끓여 먹을 수 있는 정도다. 매번 밖에서 먹고 들어오는 게 너무나 당연했기에 냉장고엔 생수들과 술, 화장품 정도가 들어있을 뿐이다. 가끔 엄마의 압력으로 반찬이 들어오긴 하지만, 상해서 버리기 일쑤다. 자발적으로 밥을 해 먹는다면 엄마도 반겨 반찬을 나르실 것이다. 우선 작은 압력솥을 사야겠다. 현미 멥쌀과 찹쌀을 반씩 섞고 조나 콩을 살짝 얹어, 10분간 불린 후 압력솥에 밥을 하면 된단다. 우선 가스렌지와 그릇들을 장만하고 엄마에겐 나물 무치는 법을 전수 받아야겠다. 현미와 잡곡들, 들기름, 올리브유, 볶은 곡식, 죽염, 된장, 고추장, 고춧가루, 간장, 후추, 각종 버섯, 산나물, 마늘, 생강, 양파, 무, 대파, 다시마, 고구마, 감자, 채소, 두부, 콩고기, 미역 등을 살 품목에 넣었다. 평상시 현미밥에 기본 찬으로는 버섯, 피망, 양파 볶음, 김치, 나물(시금치, 콩나물, 참나물, 고사리, 숙주, 도라지, 계절나물들), 양념된장, 고추장, 미역국, 된장국, 김칫국, 묵, 두부, 콩고기, 해초류와 매 끼니 먹을 채소로는 양상추, 상추, 토마토, 배추, 고추, 오이, 당근, 삶은 콩 등이다. 할머니께서 나물과 볶음과 국을 끓일 때 맹물 대신 다시마 국물을 사용하란다. 다시마, 표고, 양파, 무, 대파를 넣고 죽염으로 간을 해 끓인 후 그 국물을 냉장고에 넣고 요리 때마다 사용하면 음식의 깊은 맛이 난단다. 더 바쁘고, 긴장되는 월요일 아침에는 볶은 곡식과 채소로 간단히 속을 달래고, 현미밥을 해 놓고 냉동실에 한 끼씩 싸 두었다가 두 덩이를 꺼내 도시락통에 담아 다녀야겠다. 식당에 가더라도 자동해동된 현미밥을 먹고, 가끔 점심엔 쌀국수 같은 면 류와 통밀빵으로 된 샌드위치를 먹을 것이다. 가끔 아침 식사로 고구마와 감자를 현미밥 대신하고, 금요일 저녁은 간소하게 볶은 곡식으로 위를 달래준 후 토요일은 조금 푸짐한 듯 야채찜과 특별식을 만들어 먹어야겠다. 일요일 저녁도 월요일의 상쾌한 출발을 위해 볶은 곡식으로 간단히 하겠다. 이렇게 식단까지 만들어 놓고 보니, 그 동안 한번도 제대로 요리를 해 본적이 없는 내가 요리사라도 된 듯 자신감이 생긴다. 차츰 맛있게 다양한 나물과 음식을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 곳에서야 고기는 절대 안 된다 하시지만, 한 달에 두 서너번은 생선과 고기를 먹어줘야 만족이 될 것 같다. 당장이라도 보신탕이 무지하게 먹고 싶다. 파를 길죽하게 썰어 식초와 고춧가루로 버무린 파골뱅이 무침도 먹고 싶다. 방금 무친 겉절이를 곁들인 멸치국물로 만든 칼국수와 김치를 송송 썰어 넣고 주먹만하게 만든 왕만두도 함께 먹고 싶다. 야채와 고기를 끓는 물에 살짝 스쳐 먹고는 천연육수에 국수를 말아 먹는 샤브샤브도…….

구본형 선생님께서 일기의 날짜보다 열흘이나 늦은 댓글을 다셨다. 일차 그로기 상태였던 그 날의 일기가 댓글도 없이 외로워 보여 달래주신단다. 제법 긴 댓글에 ‘yes, sir!’이란 짧은 화답을 했다. 서서히 무언가 변했고, 변하고 있다. 지난 경험치들이 육체를 얻어 현실의 나와 마주 앉아 통하는 날, 혹 득도를 하는 건 아닐는지.
2007-11-08 10: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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