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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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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7일 20시 01분 등록
 

아들이 하루 종일 빵만 만든다. 말도 없이 밀가루 반죽을 치대고 가스를 빼고 잘 부풀어 올랐는지 오븐 안을 들여다본다.  어떨 때는 빵 세 개를 만들어 꾸역꾸역 혼자 먹고 앉아 있다. 종일 그러고 있는 것이 갑갑해 보여 휘몰고 나가 산책을 다녀왔다. 배드민턴 조금 치는 척하고, 도서관 두 군데에 책을 반납하느라 두 세 시간이나 걸렸나? 이번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다고 비실비실 자리에 누워 버린다. 안 그래도 산책할 때 삐쩍 마른 뒷모습에 깜짝 놀란 터였다. 아니, 요즘 휴학하고 알바 다니면서 식사량이 제법 늘었는데 이게 웬 일이람. 평소에 잔소리로 비칠만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터라 딱 한 마디만 했다.


“너 이래 가지고는 한옥 건축 못 해.  조심조심 하면서 회사만 다녀도 장하겠는 걸.”


스물다섯 살,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고 제 마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 혼돈의 시기를 다 안다고는 못하리라. 나도 거쳐 왔으되 기질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니까 말이다. 내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진로문제나 정체성 같이 막연한 영역이지,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잘 먹어도 자꾸 마르고, 비장한 침묵 속에 밀가루만 치대는지 그것을 알 재간이 없다. 나와 사이가 나쁘지는 않지만 말수가 적은 편이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누구든 슬럼프에 첨벙 빠져 있을 때는 주위 사람의 배려도 귀찮지 않든가. 헤맬 만큼 헤맨 후에 우울과 무기력의 심연에 발이 닿으면 ‘엇! 뜨거라!’ 싶어 바닥을 차고 올라오리라.


아들의 혼란은 당연한 것이다. 젊은 날은 시간과 가능성이 무한정 있다고 느끼는 때이므로, 어느 방향으로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할 지 혼란스러운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 시간이라는 것이 절대로 무한한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사라지는 자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엄마의 마음은 쫄밋거리기만 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삶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고심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루하루 사라지고 있는 것이 삶인 것을 어쩌면 좋으냐. 사람들은 언제고 진짜 사는 것처럼 살아보는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진짜 삶이 기다렸다가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관통하고 있는 이 순간이 바로 삶이다. 아무 생각 없이 멍청하게 보낸 하루, 슬럼프에 빠져서 허비한 일주일, 별다른 소득 없이 보낸 휴학 기간 일 년... 이 모여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번 살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삶이 뭉텅 사라진 것에 경악하지 않으려면, 바로 지금부터 살아야 한다. 삶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살아야 한다.


‘오늘’은 24시간 단위로 잘려진 生이다. 이것을 마구 허공으로 뿌려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아들이 정상컨디션으로 돌아오면 ‘헤매더라도 무언가 하면서 헤매자’는 말을 강조하고 싶다. 물론 아들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쉬지 않고 빵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처한 문제로부터 도피하게 만드는 행위는 무엇이든 소모적일 뿐이다. 인터넷 서핑이나 게임처럼 널리 알려진 행위만이 시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여행이나 사진, 그림처럼 품위 있는 취미도 마찬가지다. 그런 취미활동들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 명확해 진 다음에 필요한 작업들이다.  내가 선택한 일을 좀 더 잘 할 수 있도록 창조적인 이완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중요하고 본질적인 질문들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고, 자신이 중요한 질문을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해 주기 위한 취미활동은 결코 건강하지 않다. 


요즘에는 아들 같은 복학생뿐만 아니라 중년의 나이에도 ‘정체성’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 정체성이라는 것이 한 번 찾았다고 해서 평생 가는 것도 아니다. 굽이굽이 길어진 인생의 변곡점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답답해한다. 과연 어떤 방법으로 ‘나’를 찾아갈 것인가. 내가 아는 최고의 방법은 ‘세월’과 ‘글쓰기’ 이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통해 세월은 나의 외피를 깎아내리고 진면목을 드러내 놓는다. 무슨 일이든 방향과 철학에 대해 최소의 확신만 있다면 저지르는 것도 방법이다. 직접 행동을 통해 배우는 것이 가장 확실하겠지만, ‘글쓰기’에는 ‘세월’ 못지않은 위력이 있다.


직접 행동에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 가지 사안을 검증하기 위해 짧아도 몇 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아무리 인생이 길어졌다고 해도 모든 일을 직접 행동으로 검증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무슨 일을 먼저 할 것인가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도 중요하다. 이럴 때 글쓰기가 도움이 된다. 짧은 메모부터 미스토리까지 글로 적어 놓으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지만, 여기에서는 4행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고바야시 케이치는 ‘4행일기’에서 사실, 느낌, 교훈, 선언으로 이루어진 일기를 제안한다. 단 네 줄짜리 일기라고 해도 보통 일기에 쓰는 내용은 모두 들어가 있다. 일기쓰기에 대한 부담감을 줄이면서, 일기의 효용을 극대화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되었으리라. 마지막의 ‘선언’만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 저자가 제일 심혈을 기울여 강조하는 것도 ‘선언’ 부분이다. ‘선언’은 하루를 깔끔하게 매듭짓고 잠재의식 속에 내가 이루고 싶은 미래상을 각인시키는 행위이다. ‘나는’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구체적인 이미지가 샘솟는, 산뜻한 단문으로 쓰는 것이 요령이다. 절대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말을 쓰면 안 된다. 하루 종일 한 건의 계약도 따내지 못한 세일즈맨을 예를 들어 보자.


사실: 오늘 계약을 한 건도 못했다

느낌: 어프로치 방법에 문제가 있나 보다

교훈: 고객마다 접근 방법이 달라야 한다

선언: 나는 변화에 능동적인 프로세일즈맨이다


이렇게 하면 어떤 부정적인 경험에서도 긍정적인 측면을 찾아내는 훈련을 할 수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보다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한데, 긍정성으로 무장하게 되면, 실수나 실패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 모든 것이 배움이다. 오늘 일어난 일에서 다음 행동을 이끌어내므로, 일기가 과거의 기록이 아닌 미래를 개척하는 도구가 된다. 아무리 바쁘거나 글쓰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 해도 하루에 4줄을 쓰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처럼 간단한 투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막강하다.


나는 아들의 책상에 ‘4행일기’를 올려 놓았다.  아들이 4행일기를 통해 권태와 무기력의 주범이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오늘이 24시간짜리 인생이며, 내일 또 그만한 인생이 펼쳐진다는 것과, 그것들을 어떻게 채워나가느냐 하는 것이 자기 몫임을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언어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IP *.108.8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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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9 00:08:53 *.148.134.86
오늘도 좋은글 감사합니다. (팬입니다)
블로그에 글올릴 때, 글은 짧게 쓰고팠는데, 
'4행일기' 식으로 써도 좋을듯해요
근데 '4행일기' 절판...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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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10.05.19 08:40:41 *.251.229.103
부족한 글을 '좋다'고 말해 주셔서 위안이 되었습니다.^^
매일 책과 글을 가까이 하고 있긴 해도
구선생님처럼, 날마다 새로 태어나듯 차디찬 샘물이 퐁퐁 솟듯
나와 삶을 새롭게 보는 그런 '감탄'의 글이 나오질 않아서 심란하던 중이었거든요.

절판되지 않은 책 중에서도 아주 좋은 변화일기가 소개된 책이 있습니다.
이미 읽어보셨을지도 모르지만
1기 연구원 문요한의 '굿바이 게으름'에는 오문오감 일기가 소개되어 있는데요,
 

오문오감 변화일기

  1. 과거의 긍정적 경험이나 추억 하나를 떠올려보세요.

  2. 오늘 감사할 일은 무엇이었나요?

  3. 오늘 스스로 선택한 일은 무엇인가요?

  4. 오늘 생활하면서 새롭게 느낀 점은 무엇입니까?

  5. 원하는 미래의 모습 중에서 한 장면을 떠올려보세요. 

자신의 경험을 자원화하고, 일상생활에서 주도성을 키워 나가며,  방향성을 곤고히 하는 좋은 질문들이라고 생각되어 권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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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
2010.05.19 09:48:18 *.131.41.34
빵 만드는 아드님 심정.. 전 100% 공감되는데요..^^
제가 김치 - 온갖 종류의 김치와 장아찌를 담그면서
한 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ㅎㅎ
글 읽으면서 뜨금했지만,
그래도 나름 그 시절이 나에게 꼭 필요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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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0.05.19 22:29:52 *.251.229.103
하도 만들어대는 바람에 좀 더 먹게 되어 큰 일이네요.
부지런한 분들은 김치 만드는 일이 위안-도피성?-이 되기도 하는군요?
아들의 빵과 연계해서 가끔 인용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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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2010.05.22 01:57:29 *.131.15.192

뜨끔합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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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0.05.24 01:20:22 *.251.137.41
저로서는 너무 밋밋해서 '뜨끔한' 글인데
지금님이 '뜨끔'하다고 말씀해주시니 위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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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10.05.25 01:41:00 *.75.3.154

난 선생님의 글도 좋고
선생님도  좋아요,^^

물론 글도
잘 읽히고 그리고 교훈적이면서도 날카롭지 않아요.
그보다 더  한 선생님이 좋아요,
변화를 위해 정말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그리고 변화에 성공하고, 증명하고 보여준... 살아있는 모델이시니까요...

항상,  종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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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0.05.25 20:41:03 *.88.56.230
에궁~~ 멀리에서 날아 온 댓글에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철들자 망령' 이라고 언제 사람될 지 모르는데요.
그저 어제보다 조금 나아진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봅니다.
헤헤, 변화는 아직 멀었구요, 성공은 더더구나 언감생심입니다만
성렬님 말씀에 정말 성공하여 변화의 모델이 되고 싶어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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