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개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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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길을 따르는 것이 성공의 비결임을 명심하라. 왜냐하면, 대부분의 실패는 언제나 정의의 길에서 벗어날때 생겨나기 때문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한국인들은 부자를 존경하지 않는다고 한다. 부자의 재물과 권력, 그들의 풍요로운 삶은 부러워하지만 존경하지는 않는단다.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부에 대한 편견을 갖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부자란 정당하게 돈을 번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권력과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갖은 편법을 동원해 부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정당하게 돈벌기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말이다. 상속재산 없이 스스로 부를 이룬 사람들은 극소수이며, 이들에게는 대체로 타고난 열정과 기회 등 성공을 위한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물론 바닥에서 정상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들도 있지만, 이런 사례는 극소수일뿐이다. 더구나 언론이나 주위소식에 의하면, 정당한 노동이 아닌 편법을 통해 떼돈을 번 사례들이 가득하니 평범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부란 동경이 아닌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더구나 한국경제의 위기가 장기회되면서 풍요의 시대에 생존의 위기를 느끼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부자와 서민의 소득격차는 더욱 심화되고 있고, 입지적인 성공을 이룰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부자들의 개인주의적 습성은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반면에 자신의 부를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이들은 수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으며, 진정한 부자로 인정해준다(대표적으로는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의 "재산기부운동").
또한 한국인들은 정치인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이들은 가문, 학력, 재산, 포부 등 여러모로 국민을 대표할만한 인물들이지만, 국민은 이들의 풍요를 혐오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의 물질적 풍요는 뇌물, 부동산투기 등 가증스러움의 결과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가증스러움에는 이들의 이율배반적인 지식이 한몫하고 있고, 그래서 이들은 부요하지만,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는 힘은 없다. 정치인들의 위선적인 모습에 국민이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정치인이 되려면 타인의 모범이 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청렴해야 한다. 모범이나 청렴까지는 아니더라도 법은 물론이고 윤리와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어야 한다.
부자와 정치인.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존경을 받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사회정의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뜻밖의 사살을 알게 된다. 즉 우리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부자와 정치인을 판단할 때 "사회정의"라는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재산취득방법과 재분배라는 두 요소가 두드러지게 적용된다. 여기서 국민은 부자와 정치인의 재산취득과정에서 보여지는 탐욕적인 모습을 싫어하며, 기부와 선행 등을 통한 재분배를 좋아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교훈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결론지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교훈에는 권력자들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숨겨져 있다. 그건 바로 사회정의실현이다. 사실 부자는 경제의 권력자, 정치인은 정치의 권력자라고 할 수 있다(권력자라는 표현에 악의적인 감정이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이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제법 적합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국민은 부자와 정치인이 자신들의 권려긍로 사회정의를 실현하길 원하는데, 이러한 기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쫓는듯한 행보에 국민들은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국민은 누구에게 사회정의의 구현을 기대해야 하는가? 물론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에게 기대를 걸어야 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원론적인 답변에 머무르지 않고 누가 실제로 책임을 지어야 할지 생각해보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사회정의구현에 정부와 종교단체가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정부는 국민의 생활여건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국민간의 충돌을 중재하려면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야 하므로, 사회정의는 정부의 핵심기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부는 특정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이념에 편향되어서는 안된다. 종교단체 역시 사회정의의 엔진이 되어야 한다. 특히 기독교는 사회정의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의"는 성경을 관통하는 핵심사상 가운데 하나이며,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왕은 정의구현의 의무를 가졌고, 그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사회정의를 실현해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정의를 부르짖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추구에만 전념하는 시대일수록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정신을 구현하려고 애써야 한다. 하지만 지금껏 정부와 종교단체는 이러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그래서 NGO 단체들이 등장하게 되다. 따라서 NGO 단체들의 등장은 성숙한 시민정신의 등장이자 무능한 정부와 부패한 종교단체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학기관도 한몫 거들어야 한다. 어쩌면 대학은 사회정의의 엔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이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사회정의의 엔진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사회정의의 엔진을 보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 대학은 인재들을 양성하는 곳이다. 특히 3차산업국가에 진입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대학은 지식경제사회의 핵심원동력의 하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사회정의에 대해 가르치고 사회정의구현에 대한 책임감을 심어주어야 한다. 장기적인 경제위기로 취업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실정이지만, 이제부터라도 대학기관은 사회정의의 엔진을 길러내는데 힘을 다해야 한다. 더 나아가 앞으로는 대학의 경쟁력을 판가름할 때 사회정의의 정신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지 물어야 하는 시대가 와야 할 터이다.
[신문기사] 연합뉴스, 케임브리지대 부총장 "대학은 사회정의의 엔진 아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8/09/10/0200000000AKR20080910202900085.HTML
[신문기사] 중앙일보, 공정성 없이 지식정보사회 못 만든다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18835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한국인들은 부자를 존경하지 않는다고 한다. 부자의 재물과 권력, 그들의 풍요로운 삶은 부러워하지만 존경하지는 않는단다.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부에 대한 편견을 갖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부자란 정당하게 돈을 번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권력과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갖은 편법을 동원해 부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정당하게 돈벌기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말이다. 상속재산 없이 스스로 부를 이룬 사람들은 극소수이며, 이들에게는 대체로 타고난 열정과 기회 등 성공을 위한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물론 바닥에서 정상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들도 있지만, 이런 사례는 극소수일뿐이다. 더구나 언론이나 주위소식에 의하면, 정당한 노동이 아닌 편법을 통해 떼돈을 번 사례들이 가득하니 평범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부란 동경이 아닌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더구나 한국경제의 위기가 장기회되면서 풍요의 시대에 생존의 위기를 느끼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부자와 서민의 소득격차는 더욱 심화되고 있고, 입지적인 성공을 이룰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부자들의 개인주의적 습성은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반면에 자신의 부를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이들은 수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으며, 진정한 부자로 인정해준다(대표적으로는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의 "재산기부운동").
또한 한국인들은 정치인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이들은 가문, 학력, 재산, 포부 등 여러모로 국민을 대표할만한 인물들이지만, 국민은 이들의 풍요를 혐오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의 물질적 풍요는 뇌물, 부동산투기 등 가증스러움의 결과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가증스러움에는 이들의 이율배반적인 지식이 한몫하고 있고, 그래서 이들은 부요하지만,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는 힘은 없다. 정치인들의 위선적인 모습에 국민이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정치인이 되려면 타인의 모범이 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청렴해야 한다. 모범이나 청렴까지는 아니더라도 법은 물론이고 윤리와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어야 한다.
부자와 정치인.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존경을 받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사회정의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뜻밖의 사살을 알게 된다. 즉 우리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부자와 정치인을 판단할 때 "사회정의"라는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재산취득방법과 재분배라는 두 요소가 두드러지게 적용된다. 여기서 국민은 부자와 정치인의 재산취득과정에서 보여지는 탐욕적인 모습을 싫어하며, 기부와 선행 등을 통한 재분배를 좋아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교훈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결론지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교훈에는 권력자들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숨겨져 있다. 그건 바로 사회정의실현이다. 사실 부자는 경제의 권력자, 정치인은 정치의 권력자라고 할 수 있다(권력자라는 표현에 악의적인 감정이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이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제법 적합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국민은 부자와 정치인이 자신들의 권려긍로 사회정의를 실현하길 원하는데, 이러한 기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쫓는듯한 행보에 국민들은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국민은 누구에게 사회정의의 구현을 기대해야 하는가? 물론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에게 기대를 걸어야 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원론적인 답변에 머무르지 않고 누가 실제로 책임을 지어야 할지 생각해보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사회정의구현에 정부와 종교단체가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정부는 국민의 생활여건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국민간의 충돌을 중재하려면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야 하므로, 사회정의는 정부의 핵심기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부는 특정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이념에 편향되어서는 안된다. 종교단체 역시 사회정의의 엔진이 되어야 한다. 특히 기독교는 사회정의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의"는 성경을 관통하는 핵심사상 가운데 하나이며,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왕은 정의구현의 의무를 가졌고, 그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사회정의를 실현해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정의를 부르짖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추구에만 전념하는 시대일수록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정신을 구현하려고 애써야 한다. 하지만 지금껏 정부와 종교단체는 이러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그래서 NGO 단체들이 등장하게 되다. 따라서 NGO 단체들의 등장은 성숙한 시민정신의 등장이자 무능한 정부와 부패한 종교단체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학기관도 한몫 거들어야 한다. 어쩌면 대학은 사회정의의 엔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이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사회정의의 엔진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사회정의의 엔진을 보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 대학은 인재들을 양성하는 곳이다. 특히 3차산업국가에 진입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대학은 지식경제사회의 핵심원동력의 하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사회정의에 대해 가르치고 사회정의구현에 대한 책임감을 심어주어야 한다. 장기적인 경제위기로 취업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실정이지만, 이제부터라도 대학기관은 사회정의의 엔진을 길러내는데 힘을 다해야 한다. 더 나아가 앞으로는 대학의 경쟁력을 판가름할 때 사회정의의 정신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지 물어야 하는 시대가 와야 할 터이다.
[신문기사] 연합뉴스, 케임브리지대 부총장 "대학은 사회정의의 엔진 아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8/09/10/0200000000AKR20080910202900085.HTML
[신문기사] 중앙일보, 공정성 없이 지식정보사회 못 만든다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18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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