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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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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14일 23시 13분 등록
약속을 했다. 임용시험을 마치면 그간 송구하게도 책 한 권도 읽지 않은 채, 감히 사부님 운운해 가며 촐랑대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 우선은 사부님 책을 먼저 읽고 몇 권의 책을 더해 읽으며 삶을 반추해 보고 싶었다. 별로 잘 살아오지도 못했으면서, 아니 남들 보다 훨씬 못난 삶을 살아오면서 나는 힘들어 했고 유난을 떨어 댔다. 내가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들의 순간순간을 마치 살얼음을 걷기라도 하듯 조바심내고 못미더워하며 어려움을 감추느라 우울했지 싶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어느 조상님의 음덕인지는 모르겠으나 삶의 고비라고 느껴지는 벅찬 일들에 놓여 있을 때 마다 나는 용케도 자비로운 은혜를 받게 된다. 인생의 실패라고 할 만큼의 사랑의 쓰라림과 감히 들출 수조차 없는 상처 앞에서도 나는 아직까지 나를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고 비틀대는 내 모습을 구출해 나가고 싶어 한다. 나이가 먹어도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하고 철없는 나를 안다.

아마도 변*화*경*영*연*구*소는 나의 마지막 애인이 되지 싶다. 결혼하고 싶다. 아니 내 스스로 청혼을 했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늘 서성이고 맴돌다가 주저앉고 또 맴돌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기에 정리해야 할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어제의 나와의 완전한 결별, 그것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쉽지 않은 일이 되는가 보다. 완전한 결별을 위해 나는 지난날을 돌아보아야 하고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골라내야 한다. 이왕이면 아주 간단하게 가볍게 덜어내고 싶다.


12월 3일 일요일
중등임용시험이 있는 날이다. 처음엔 초등에만 응시하려 했으나 한 번의 기회를 더 갖게 되었다. 나와 같은 전공을 하여온 사람은 전국을 통틀어 광주에서만 단지 4명만이 선발 된다. 초등시험을 치르고도 나는 아무런 가늠을 하지 못했다. 아쉽다고 할 수 없을 만큼의 부족함이었다. 나를 알기위해 중등에 허세와도 같은 지원을 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반문,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를 연발하며, 거의 체념하고 포기한 채 경험을 하자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었다.


12월 2일 토요일
꿈 벗 10기 <따로 또 같이>의 공식 첫모임이 있는 날이다.

아침부터 설레었다. 솔직히 나는 일요일 국가고시보다 토요일 꿈 벗 모임이 더 가고 싶었다.

사부님을 만나 뵐 수 있을 것이고 멀리 울산에서 태성님과 소광(형민)아빠가 된 대광님이 참석할 것이고, 회장이랍시고 통 얼굴도 내밀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내는 KKK와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 것 같은, 항상 엉뚱한, 그래서 그녀에게는 늘 신비한 무언가가 막 터질 듯한 모모, 그리고 천재소년이거나 새침때기 악동처럼 입가에 웃음을 하나 가득 머물고는 무한한 상상력으로 놀래키는, 외부세계와 교통을 하고 사는 듯한 신비주의자 정화, 누구보다 알차게 월동준비(?)를 해온 막내 옹박, 그리고 우리를 흐뭇하게 하는 그의 친구 귀한자식, 마침내 동성애(?- K모양에게 밀려남)에서 이성애에로 속 차린 현명한 남자 광땡이, 참 고맙게도 무던한 그러면서도 좋은 자리엔 꼭 끼어있는 양다리 걸치기의 귀재(4기& 10기)의 재동님, 자청해서 참석하겠노라 손을 번쩍 들어 웅지서린 기백을 보인 신사 이기찬님, 국가고시야 누가 치건말건 정신 나간 여자 써니가 모여 꿈 찾기 프로그램이후 2달여간의 근황과 변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일정이 있으신 관계로 2부 저녁식사와 이야기가 있는 만남시간에 등장을 하시었으며 또한 4기 두 분의 미녀 (한분은 수원 얌전 녀? 와 또 한분 야무짐과 당당함이 다부지게 보이는 야심 녀?)와, 감히 남의 지역에 허가도 안 받고 오냐며 기선제압하고 들어서며 자신의 인기를 한껏 과시하던 카리스마의 여신 향인 은남님, 누가 10기이고 누가 게스트인지 알 수 없는 무려 14명의 꿈 벗이 모인, 행복한 우린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처럼 즐거웠다.

일일이 저마다의 꿈을 기억하시고 근황과 진행 상태를 점검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신 사부님은 자연스런 우리들의 어울림을 보시고 흐뭇해하시며 또 무언가를 열심히 챙기시는 모습이다. 못내 아쉬운 시간을 뒤로하고 나는 또 미처 준비하지 못한 어설픈 삶을 이끌고 새벽 고속버스터미널에서부터 (12월 3일 01시 출발)버스에 몸을 싣고 낯선 도시 광주를 향해 밤길을 갔다.


12월 3일 새벽 4시 20분 광주역 도착
10기모임에서 맥소정(맥주+ 소주+ 정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싼 우등 고속버스 내에서는 예상외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대합실에 들어서자 한기가 느껴졌다. 하필 영하의 가장 추운날씨이다. 조금만 있으면 날이 밝아 오겠지 하며 대합실 의자에 앉아있으려니 이제는 조름까지 밀려오는 것이 아닌가. 난방이 잘 되는 버스안의 더운 곳에 있다가 싸늘한 대합실에 있으려니 더욱 한기가 느껴지며 갑자기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수 없어 밖으로 나가니, 하얀 눈발이 성글게 날리며 눈보라가 친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쉴 만한 곳이 눈에 Em이지 않는다. 그 흔한 찜질방도 못 찾겠다. 거리엔

술에 취한 사람들이 한두 명 비틀거리며 갈지자를 그릴 뿐, 멀리 빨간 온천표시가 가물거린다. 몸은 점점 춥고 새벽녘 거친 바람이 낯선 이방인을 맞는다.

횡단보도는 또 왜 이리 먼 것인가? 불빛을 찾아 걷다보니 마침내 모텔 입간판이 보인다. 망설일 겨를 없이 어깨를 움츠리고 등에 배낭을 바싹 당겨 메고는 골목에 들어서니 파마머리의 동그랗게 생긴 아주머니가 마치 나를 반기듯 손짓을 해댄다. “두 시간 정도 있다가 갈 건데 얼마에요?” 물으니 눈치를 살피며 “2만 5천원!”한다. “오늘 시험 치러 왔는데 너무 추워서 그러니 깎아주세요.” 하니까 월래 3만원이라나. 아까운 생각에 어쩔까 머뭇거리니 무슨 시험 치는데? 한다. 그러더니, 아하! 중등? 하며 2만원에 해주겠다고 빨리 올라가란 시늉을 하며 301호라 쓰인 키가 달린 바를 하나 건넨다.

올라가는 계단이 컴컴하다. 마치 수용소 같다. ( 에잇~ 뭐가 이래에... ) 문도 나무문에 허연 페인트, 완전 쌍팔년도 쪽방 같다. 마치 도둑놈 굴에나 들어온 것처럼 문을 잠그고 화장실 불을 켠 다음 방으로 들어선다. 툴툴대며 방에 들어서니 온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잘 나올 것 같지도 않은 구닥다리 TV, 구석에 테이블인지 뭔지, 침대 옆에 화장대, 너무나 얇은 것 같은 이불 하나... 비어있어 그렇겠지, 하는 수 없이 겉옷까지 몽땅 입은 채로 벌러덩 누워 웅크린 채로 이불을 뒤집어쓴다. 다시 벌떡 일어나 휴대폰의 알람을 맞춘다. 우선 한 시간, 절대 못 일어나면 안... 되...지...이... 바닥에 불이 들어오는지 퉁퉁 소리가 여리게 가물거리며 들- 리-ㄴ-다.

벌떡 일어나 시계를 본다. 30분 지났다. 다시 잔다. 벨이 울린다. 무의식적으로 꺼버린다. 다시 졸음 겨운 눈을 가늘게 뜨고 알람을 마-ㅈ-추-ㄴ-다. 15분만 더... 금새 벨이 울린다. 에잇~ 10분 더. 가물~가물~ ~ 또 금새 벨이 울린다. 딱 ! 20분만 더... 비몽사몽 꿈인지 생시인지... ,,, ...

9시까지 입실완료 하랬으니 늦어도 8시 반까지 도착,

되도록 8시까지 가서 근처 편의점에서 따끈한 오뎅 국물이라도, 속 풀이엔 컵 라면이 그만... 택시로 30분 잡고, 잡는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30분... ... 어딘지 정확히 모르니까 넉넉잡고 두 시간 전엔 나가야지... 가물~ 가무~ ㄹ~ 눈이 안 떠져~ ~ 양심 없다. 밤새워 공부한 애들(?)도 있을 텐데, 새벽에 두 시간이라도 들여다 봐야했는데... 안 돼, 안 ~돼, 이러면 안 ... 돼 ... 에... 일어낫!

욕실로 가니 찬기가 휑하다. 마치 창문이라도 열려 있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엉덩이에게 너무 놀라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고 호흡을 가다듬어 차가운 변기에 덥석 빠른 속도로 내리 꽂는다. 생각보다 괜찮은지 다리를 좀 더 벌려 퍼질러 오래 머물러 보았으나 큰 놈은 좀체 소식이 없다.

언제 세수하고 무얼 바르랴 싶어 거울을 본다. 마치 꽤 쓸 만한 얼굴인 양 고개를 끄덕이며 세면대에 물을 틀어 본다. 역시나 차갑다. 미심쩍은 손놀림으로 한참을 기다린 듯하나 별 반응이 없는 듯하다. 그럴 줄 알았다. 오래 기다리고 싶지 않다. 손만 씻고 눈곱이 끼었는지 거울에 얼굴을 바싹 디밀어 조사를 벌인다. 이만 하면 봐줄만 하다. 머리에 물을 묻히고 양치질만 하자 내심 거울속의 여자와 협상을 벌이며 찬 맹물로 헤어 스타일링을 하니 제법 그럴싸하다. (히힛... )

키와 함께 건네받은 달랑 칫솔 하나의 비닐 옷을 벗겨 치약을 한껏 발라댄다. 이빨에 다 무치지도 못한 퍼런 치약이 하얀 세면대위에 떨어져 달라붙는다. 한 손엔 칫솔질을 하며 나머지 손으로 물을 끼얹져 세면대의 치약 덩어리를 씻어낸다. 입술 가장자리까지 치약 거품이 번져 입가가 얼룩진다. (난, 늘 이 모양이야. 좀 조신하게 양치질을 하지 못하고 쯧.)

콤팩트로 대강 입가를 찍어 누르고 펜슬로 입술보다 약간 크게 윤곽을 그려 루즈로 입술을 메운다. 이만하면 감쪽같다. 가방을 울러매고 거리로 나오니 아직 거리엔 사람이 없다. 이렇게 사람이 없으면 얼마나 좋아, 다들 너무 추워서 포기하고 안 오려나? 지나가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차도 별로 안 다니고... 조금 서 있으니 합승 해 지나가는 택시가 보인다. 저것 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시험을 치나? 속으로 궁시렁 댄다.

내 앞을 지나는 택시 안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영락없는 고시생들 맞다. 나쁜 년들! 이라고 욕하며 노려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서서 발을 구르고 있으니 택시 하나가 합승을 하자는 신호를 보내며 내 앞에 선다. (어떤 년하고 같이 시험을 치러 가라고? 잰 붙고 나만 떨어지면... 수색하듯 안을 들여다본다. 다행이 뒷좌석의 두리뭉실 아줌마가 시험 치는 사람 같지는 않다.)

“동명중학교아세요?” “동, 명, 이, 라, 아”... (먼가? 외곽에 있나? 아닐 텐데...) “타요.” 20분쯤 타고 가니 학교 정문 앞에 선다. 아직 사람들은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 8시 전이라. 근처에 마트에 가서 컵라면 한 개쯤 먹음 덜 춥고 든든하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펴봐도 편의점이 보이질 않는다. 5분쯤 걸어가다 골목을 들여다보니 마침내*24시 해장국밥* 유리창에 큰 글씨가 눈에 와 확 안긴다.(너, 딱 걸렸어! 반가움에 실실 쪼개며) 내친 김에 해장국집엘 들어서자마자 벽에 걸린 메뉴판을 보며 외쳐댄다. “콩나물 해장국 하나 빨~리요.” 계산대의 아저씨가 주방을 향해 나보다 더 급하게 큰 소리로 "국 하나 빨리"를 외쳐댄다. 콩나물 국밥으로 해장하여 속을 단단히 풀고 지정 고사실을 찾았다. 에에~ 왜 이렇게 많이 앉아있는 거야. 두리번거리며 지정석을 살핀다. 본 시험 1시간 전이 되자 거의 공석 없이 빼곡히 들어찬다. (염병할! 날씨도 추운데 어디서 이렇게 많이 왔담, 잠이나 잘 것이지, 니들은 잠도 없냐?)

첫 시간 교육학 및 특수교육학 객관식 50문항 60분, 시험지 7면, 전체 20점 배점. (역시 시험 치길 잘 했다, 거봐, 초등하고 완전히 다르잖아, 난 이게 더 적성에 맞는 걸 ... ) 둘째시간 특수교육학, 특수교육과정 주관식 20문항, 2시간 30분, 시험지 10장, 한 장당 두 개의 대 문제, 한 문항 당 소 문제 거의 4개, 80점 배점. (어라, 요것 봐라, 역시... 음~ 내년부터 요렇게 바뀐다는 거지? 벌써 시도가 됐네. 내년엔 잘 할 수 있을까? 우선 최선을 다해서 답안지를 메우자!,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 제발 이 시간에 충실하자!) 주문 걸듯 시험을 치렀다.

“딩~ 동~ 댕. 시험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오후 1시 30분) 다들 삼삼오오 모여 거의 대부분 깔깔 대고 조잘거리며 "둘 다 되면 어쩌지?" 여유를 부린다. (니들은 참 좋겠다... )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시계를 들여다본다.)

옹박에게 문자를 보내어 초아선생님 전화번호를 물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광주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줄을 서 있는가. 옹박이 바쁜지 연락이 제대로 오지 않아 정화에게 다시 전화를 해서 알아낸다. 나는 바로 초아선생님께 전화를 올려 나의 곳을 알리고 부산으로 가서 찾아 뵈도 되는 지 여쭈었다. 승낙을 하셨고 승차권을 서둘러 구입했다. 그런데 광주에서 부산이 왜 이리 먼 것인가, 무려 4시간이나 걸린다는 것이다. 두어 시간이면 될 줄 알고 시도한 일인데 혹시 결례가 될까 싶어 도착예정 시간을 알려 드리고 재차 기사님께 확인하니 오늘은 아마도 더 걸리겠다고 한다. 아뿔싸, 이 일을 어쩐다...

나는 초면에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뵙는 것은 실례이다 싶어 고민이 되었다. 딴엔 터미널 근처에서 가까운 줄 알고 -나중 알고 보니 부산역 -기차역에서 가까운 것을, 빨리 뵙고 내려올 때처럼 밤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려던 예정이었으나 어디에 계신지 댁도 전혀 모르는 지라 걱정만 할 뿐, 차안에서 자주 전화하기도 그래서 나는 문자로 상황을 알려 드렸다. 결국에 고속버스는 고속도로를 버리고 국도로 가고 있었고 무려 꼬박 6시간이 걸려서야 부산에 닿았다. 너무 늦었다 싶었는데 아직도 1시간 정도를 더 가야한단다. 도저히 시간이 너무 늦어 다음날 찾아뵙겠다고 하고 숙소를 정하려니 거긴 별로 지역이 좋지 않다고 하시며 일단 중앙동 근처 가까이에 와서 숙소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기에 공연히 걱정까지 끼쳐드리나 싶어 그리하였다.

다시 전철을 타고 한 시간여를 오는 동안 옹박과 모모에게 문자를 날렸더니 모모가 자긴 종일 자고 이제 일어났다며 대꾸를 해온다. 이르신 대로 따르고 보니 무려 10시가 넘었다. 무려 7시간 넘게 차만 탄 것이다. 전날 모임에 참석하고 밤새 내려와 아침에 광주에서 시험치고 종일 고속버스타고 7시간이상 계속 차를 타니 비록 잘 치진 못한 시험일지라도 온몸이 쑤시고 머리가 아프다. 숙소를 정하려 주위를 둘러보니 서울에서는 그리 자주 눈에 띄던 찜질방이 보이지 않는다. 몇 사람에게 물어봐도 여긴 없다는 것이 아닌가. 이리저리 낯선 밤길을 헤매다 보니 더는 허기도 지고해서 일단 요기를 하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며 저기라도 할 수 없이 가야겠다 발길을 내딛으려는 순간 식당의 바로 옆에서 밥을 먹던 남녀 두 쌍이 내가 가려던 모텔을 앞질러 가는 것이 아닌가. 도저히 못가겠다 싶어 다시 식당으로 들어가 주인아주머니를 불러 다시 한 번 더 찜질방에 목을 매고 물으니 근처를 알려 주신다.

좋아라고 신이 나서 사방을 둘러보며 찾는데 말로 듣기에는 쉬웠던 것이 밤길에 찾아 그런지 얼른 눈에 뜨이지를 않는다. 서울과는 달리 간판이 눈에 뜨이지 않게 단골들만 찾아 올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래가지고 장사가 되나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며 들어가 보니 내일이 월요일이라서 그런지 비교적 조용하고 한가하다. 우려되거나 염려할 장면도 눈에 띄지 않고 건전하였다. 마음을 놓고 잠을 청하려 하였으나 성미 탓인지 얼른 잠에 들지는 못한다. 그래도 어깨며 등허리며 지져대는 맛이 괜찮다.

12월4일 월요일
아침에 아홉시가 조금 지나 초아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니 택시를 타고 조금 더 와야 한단다. 그래 택시를 잡아타고 기사에게 전화를 건네주니 자기가 알아서 데려다 주겠노라며 의례 정치에 대한 정보는 기사아저씨들께서 가장 잘 아시듯(?) 열변을 토하시며 당신의 생각을 피력하신다. 지방을 다니다 보면 서울보다는 이런 경향이 강한 듯하다.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보니 어느새 초아선생님 댁에 다다랐는데 어찌 슈퍼가 눈에 뜨이지 않는다. 밤새 낯선 손님을 기약하고 공연히 불편한 잠을 이루신 게 아닌가 싶어 다시 길을 되돌려 슈퍼에 들러 음료수를 한 박스 사서 들고는 길을 오르려니 길이 제법 가파르다.

벨을 눌러 인사하고 집안에 들어서니 웬 생각지도 않은 풍경이 펼쳐져 나는 탄성을 지르고야 말았다. ‘오륙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완전히 내가 늘 그리는, 바다가 훤히 펼쳐지는 너무나 확 트인 전망에 나는 그만 흥분하고야 말았다. 게다가 그 아파트에서 가장 높은 층이니 조망권 하나는 아주 끝내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팔딱이는 생선처럼 생기가 돌아 “선생님 저는 이런 조망권이 있는 집을 늘 갖고 싶었는데요”하며 부러워하였다. 늘 보는 바다임에도 더 그리운 것인지 초아선생님께서는 커다란 책상과 컴퓨터를 아예 거실의 베란다 정면에 측면으로 배치하시어 바다는 한 눈에 내려다보시되 햇볕에 눈이 바시지 않도록 책상을 배치하여 계신 것이었다.

나는 그 바다를 오래도록 내려다보며 밀물과 썰물에 따라 5개도되고 6개도되는 오륙도 작은 섬들을 내려다보며 혼자 즐거운 상상을 하였다. 호는 해정선희라고 지어주셨다. 그 외에는 선생님의 말씀보다 내가 나라는 사람을 말하고 현재상황과 고민을 털어 놓은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여기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느냐 물으셨고 내가 올린 글 중에 무슨 일(멤버쉽에 대하여 몇 가지 기준이 있었으면 ...)이 있었던가를 궁금해 하셨다.

초아선생님뿐만 아니라 10기모임에서도 또 포항의 어당팔님(이분은 이 별칭을 너무도 사랑하시는 것 같아 그리 불러 드림이 좋을 듯싶다)께서도 같은 질문들을 하셨다. 사실 그 글이 매끄럽게 설명되거나 전달되도록 쓰여 지지 않아 지우려다가 그냥 올려버렸는데, 많은 분들이 그 글에 대해 궁금해 하고 계신 듯하다.

나는 하루살이님의 댓글로 말미암아 부족하게나마 나의 의도가 정확히 전달되었다고 믿었으나 아직 부족한 것일까? 그리고 내가 10기 혹은 꿈 벗만을 우리라는 개념에 넣은 것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은연 중 우리라는 울타리의 개념에 익숙해온 나의 좁은 생각이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지적 또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일깨워 준(김나경님) 것이기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무엇보다 구본형사부님의 위대하신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비록 프로그램이나 연구원을 거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꿈 벗이 확장되고 참여되어 질 수 있는 것이라는 열린 사고 이전의 습관적인(미지의 타인에 대한 사랑보다는 경계 지음의 가벼움) 타성을 드러내어 어리석은 우를 범한 것에 대한 커다란 자각이 되었다. 참다운 꿈 벗이야말로 온라인상에서든 아니든 언제 어디서라도 사부님의 사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해 나가는 사람들이라고 본다.

언젠가 프랑스 떼제의 신부님께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예수를 믿겠다는 종교적 서약 없이도(비록 비신자라 할지라도) 생활 자체에서 예수님의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들을 볼 때, 신자로서 너무나 숙연해진다는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와 같이 비록 우리와 얼굴을 맞대고 만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보다 더 사부님을 간절하고, 절실하며, 모범되게 닮아가는 이들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내가 그들보다 더 큰 특혜를 누려야 할 이유가 없음을 인정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보다 더 나은 삶을 찾아가려는 마음의 의도가 있었다는 것만으로 격려와 관심을 잊지 않으시는 사부님께 감사할 뿐이며 우리가 다른 이들 보다 좀 더 사부님을 가까이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씩 어제보다 나아져야함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초아선생님께서는 요즘 당신께서 너무 주착부리지 않느냐 물으시며 젊은이들의 공간에 끼어들어 조금 쑥스러우신 듯 겸손한 멘트를 날리신다. 나는 아니에요, 모두가 참여하는 공간이고 남녀노소가 어울리는 그래야 조화가 이루어지며, 초아선생님께서는 새것을 받아드리시고 젊은이들은 옛것을 접할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말씀을 드렸다. 그러시며 한명석님에 대해 물어오셨지만 제가 알기로 연배가 있으신 여성분이고 저 역시 젊은 분이라 생각한 적이 있음을 말씀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실수했다 하시며 내내 마음을 쓰시는 눈치였다.

그런데 웬걸 작가가 되 보라는 말씀을 하신다. 네에? 나는 진실로 화들짝 놀랐다. 임용시험에 대해 재수를 할 것인가 혹은 이제부터라도 내 일을 찾아 자기 경영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 오던 중 꼭 학교만이 대안은 아닐 것이다. 만약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의욕과 궁극에 이르러서는 안정을 배제하면 무언가 자기 경영을 잘 해 나가거나 일과 공부를 병행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연구원에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한 가지 방향이 고민에 추가되긴 했지만 작가라는 타이틀을 걸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가 정말 작가가 될 수 있다고요? 반복해서 되물을 수밖에 없다. 어려서 누구나 한번쯤 글을 써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머리가 혼란스러워짐을 느꼈다. 무언가의 핵심을 과연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나는 기본적으로 연구원의 하드트레이닝을 받으면 꿈도 좁혀지고 진정 자기다운 일을 할 수 있게 되리란 구상을 하다가, 독서로서 자기성찰에 이르고, 그러면서 기회가 되었을 때 정신과 육체가 혼연일체가 된 모습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나아갈 수 있으리란 생각은 했지만, 지금 단계와 수준에서 무슨 이제와 작가인지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제와 무슨 작가에요? 말도 안 돼요, 놀란 수준을 넘어 펄쩍 뛰었다.

초아선생님께서는 여러 가지 경우의 예를 들어 주시며 가능한 일임을 강조하셨지만 나는 그것이야 말로 팔자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란 생각에 계속해서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 말씀이 먼저 나의 현실을 간과한 무리한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안쓰러움의 발로인 것인지, 정녕 내가 인생에서 언제가 맞았던 전혀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가게 되었을 때처럼 운명의 고비, 고행을 뛰어 넘은 후에야 내가 원하는 삶이 있다는 것인지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그랬다. 나는 살아오면서 딱 한번 내가 전혀 의도한 바 없는 선택의 귀로에서 어긋난 길을 향한 적이 있다. 단 한 번도 상상해 오지 않은, 내가 먼저 부정한 그 삶을 실제로 살게 되었을 때, 나는 정말 죽고 싶었고 반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나를 또 다른 내가 지켜보면서 그래도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나 비굴한 선택이 될 듯싶어 도저히 받아 드리고 싶지 않았다. 살면서 후회도 했고, 반성도 했으며, 몇 번이고 돌이켜도 보았다. 그 정점이 지금일 지도 모른다. 나는 돌아선다. 5년 살고 10년 동안 헤어져 생각해 왔다.

그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제야 말로 진정한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는 것이다. 살아온 기간의 2배를 생각해 왔다면 이제는 나를 편히 쉬게 하고 싶다. 아무도 나를 가두지 않았으나 나는 스스로 갇혀 있었고 내 우울과 긴장은 너무 오래 지속되어왔다. 그래서 진정한 선택을 하고 싶고, 그것은 다만 살아갈 뿐이 아닌, 내가 진정 원하고 바라는 삶으로의 마지막 귀의가 되고픈 간절함이다. 인연의 고리는 단지 하나였을 뿐이나 삶은 수만 가지의 끈으로 연결지어져있다. 그저 막연한 결정 하나하나를 되돌려 보니 그간 시나브로 쌓여진 감정에서부터 사소한 일들에까지 연결되지 않은 것들이 없고, 그것들을 어느 날 모두 한꺼번에 책상서랍을 열어젖히고 뒤집어 먼지를 털어내듯, 단순하고 쉽게 떨어내어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제 이리 많이 쌓아두고 연결시켜왔던지 가히 그 높이와 넓이가 나를 쉽사리 툭툭 털고 편히 갈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들은 그동안의 내 삶이 그토록 부실함에 원인하고 있는 것일 테고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나의 한계의 단면들일 것이리라.
멀리서 온 꿈 벗에게 아낌없는 격려와 지혜를 주시고 싶으셨을 테지만 나는 그저 한 말씀 보태들은 정도로만이 의문으로 남겨두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고 많은 인연 중에 하필이면 변*화*경*영*연*구*소에서 사부님과 꿈 벗이라는 관계로 만날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이 필연일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아직도 내가 무엇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명약관화 하지 않은 상태에서 초아선생님의 깊은 혜안을 받아드리기에는 자신감이 부족한 듯 내내 의구심을 가질 뿐...

초아선생님과 헤어진 후 나는 울산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한참 후에야 연결이 되어 부산에 있노라니까 꼭 자기 집에 들렀다 가라 하기에 다시 고속터미널로 향하였다. 10여 년 전 내가 그녀에게 신세를 지었다면 지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으나 울산은 내게 눈물을 안겨준 도시이다. 언젠가 자리를 잡게 되면 한 번 와야지 했으나 그것이 무려 10년이 되었고, 그저 가끔씩 전화 통화만 하여왔던 터다. 그녀는 그 사이 집을 세 번째 옮겼고, 지금은 전보다 훨씬 기반을 잡은 모습으로 가장 중심지에, 가장 최고의 너른 평수를 장만하여 살고 있었다. 삶이 안정되어 보여 보기에도 좋다. 한 때 옆집에 살면서 공부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 지를 내게 물어왔었고 아이들에 대해서도 이것저것들을 상담해 왔었던 것이다. 그녀의 책꽂이에는 내가 주었다는 책이 꽂혀 있었고, 10여 년 전에 쓰던 휴지통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었으며, 여전히 알뜰살뜰하며 알콩달콩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절에 열심히 다니고 있었고, 울산에서 양산의 통도사를 매일 오가며 하루에 무려 삼천 배를 올리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세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이가 도대체 무엇이 되려고 스님들도 어려워하시는 삼천 배를 매일 올린다는 것인가? 순간 나는 내 삶과 생활이 부끄러워졌다.

나만 힘들게 사는 양 질질대고 대단한 무어나 하는 것처럼 어렵다고 쩔쩔매온 내 삶이 그녀의 당연하고 평범한 삶 앞에서 무릎을 꿇는 심정이 되었다. 보통의 일반인들도 저리 열심히 당연하게 노력하며 살아가는데 나는 내 삶만 어려운 듯이 늘상 헤매고 허둥대며 탓을 해온 것은 아닌지 가슴이 털컹 내려앉는다. 오히려 남보다 두 배, 세배 노력하여도 이미 잃은 것을 도저히 만회할 수 없다 생각하고, 우울과 자기 폐쇄적 좌절로 문을 걸어 잠그고 오랜 시간을 지내온 나의 어리석음이 한없이 부끄러워, 나는 그녀의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하단식의 삶의 자세에 대해 그저 숙연해 질뿐이었다. 이렇게들 열심히 사는데 나는 나만 고생하면서 애쓰며 살아가는 듯이 힘겨워하고 버둥거린 것은 아닌지, 어쩌면 삶의 당연하고도 평범한 이치조차 무겁게 받아드렸을 나를 돌아보게 된다.

피로에 지친 그녀는 저녁을 먹고 나자 일찍 자자며 아직도 51일 더 해야 한다며 지친 몸을 침대로 이끌며 자기는 들을 테니 나보고 이야기를 하란다. 삶을 옹골차게 잘 살아가는 친구 앞에서 개코나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지난날 내가 염려 되어 혹시 무슨 일이라도 났을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들여다보며, 쓰러져 있는 나를 억지로 일으켜 식은 밥이라도 한 술 뜨라며 내 어깨를 도닥인 그 정을 잊지 않고 딴엔 열심히 살아온 줄 알았지만, 뭐 그리 신통치도 변변하지도 못한 채 어느덧 세월이 10여년이나 흘러, 더 늦기 전에 고마웠다는 말을 직접 와서 꼭 하려했을 뿐이라고 피식 웃어보였더니, 그녀는 손 사례를 치며 잘 살아 주어 고맙다고 되레 내게 인사말을 건넨다. 별미인 메밀차를 나눠 마시며 우린 내일 아침 일찍 통도사에 함께 가기로 하고 이른 잠을 청하였다.


12월5일 수요일
다음날은 그녀와 함께 통도사엘 따라 나섰다. 그녀가 삼천 배를 올리는 동안 나는 곁에서 얼마간 따라하다가 혹시 병이 날까 두려워하며 그녀를 법당에 남겨둔 채 통도사 암자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법당은 발이 시렵고 손이 시려웠으며 뻣뻣한 허리며 무릎은 금새라도 꺾일 듯 퍽퍽 위태로운 소리를 낸다. 보다 못한 친구가 절 구경이나 하던지 암자에 가서 쉬란다.

예전에 비교적 자주 들렀던 통도사 경내를 휘돌아 영축산 자락을 삥 둘러 들어앉은 암자들을 둘러보려 마음먹고 터벅터벅 길을 따라 출발을 하였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이며 주위 경관이 크고 넓으면서 아름다워서 안정된 자태가 평화로운 곳이다. 삶의 질곡을 헤매 일 때 이곳으로 찾아와 쉬어 간적도 있건 만은, 모든 것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나만이 혼자 또 이 길을 걷는구나 생각하며 그래도 언젠가 다시 와 보리라던 이곳이, 이제는 낯설 것도 슬플 것도 없이 담담하구나. 처연히 길을 따라 느린 걸음을 옮긴다.

안양암
노승이 따사로운 햇살을 벗 삼아 한가로이 담장을 배회하며 들어서는 길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마치 친하게 알고 지낸 스님을 찾아 뵌 듯 그의 앞으로 다가가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비로암으로 향하는 길을 묻는다. 노승역시 빙그르 웃는 듯 마는 듯 말없이 내 앞을 나서며 길잡이를 한다. 느릿느릿 말없음이 정겹다. '그런데요 스님, 제가 이곳에 와 본적이 있지 싶은데 절이 좀 변한 것 같으네요?' 하니까 "언제 왔는데?" 되물으신다. “10년 전에요” “여태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서야 나타났누?, 그럼 변했어, 저것 없었잖아, 많이 변했재?” “네.”

나는 절 내를 둘러보는데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듯싶기도 하다. “비로암이 여기서 멀어요?” “응, 꽤 멀어” “네에... 저 얼마나 걸릴 까요?” “뭐, 울매 걸리겄나? 아까 진작에 말하지?” “네?” “그럼 내가 차라도 대접했을 낀데”... “그럼 주셔요” “따라와” “네에” 볕이 한가로운 노승의 별채는 방안에 들어서도 유난히 밝다. 늘상 차려진 검소하고 투박한 다과상이 낯선 길손을 맞이하고, 한가로운 노승의 입을 즐겁게 해줄 제과점의 달콤한 과자 몇 개가 찻잔 곁에 놓여 있다. 마치 시장기가 돌듯 내 눈이 그리로 향하니 노승은 턱으로 가리키어 “묵어라”하신다. “스님 잡수셔야죠.” “내는 아깨 전에 묵었다, 니나 묵으라.”

전기를 꼽자 포트의 물은 금새 펄펄 끓는 소리를 내고 노승은 가볍고도 날렵한 솜씨로 찻잔을 닦고, 물을 부어 헹구고, 태연하게 앉은 자세로 멋들어진 다례를 펼쳐 보인다. 잔이 줄어들면 부어주고, 식으면 채워주는 솜씨가 여간한 웨이터도 저리는 못할 것이며 마치 잠자리가 사뿐사뿐 걸음걸이를 떼어가며 춤을 추듯 손놀림이 가볍고, 가뿐한 날갯짓 같다.

저는요, 스님... 나는 특유의 말문을 연다. “니 나이가 몇이고?” “마흔 다섯이에요” “그럼 시집가라” “그건 안 할 거고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잘 안 잡혀서요.” 하니까. “그러이 시집을 가야한다” “나이가 먹을 수록에 여자는 기둥서방이라도 필요한 기라, 점점 더 그래, 그러이까 가라” “안한다니까요” “그럼 너그 친구들하고 이야기 해봐라” “니를 잘 알 수 있는 사람이 친구들 인기라. 너무 인생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남들 사는 것처럼 그냥 사는 기라.” 깨끗한 얼굴에 해맑은 투명함이 비치는 노승은 방긋 웃는 아가의 모습으로 스님은 왜 사시느냐는 듯한 나의 질문에 “모린다, 내는 그런 거 모린다, 니가 하고 싶은 데로 살아라” 하시고는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다는 듯 “니가 너무 젊다” “젊기는 뭐가 젊어요? 다 늙었는데요.” 그래도 젊다 하시며 ‘모린다’와 ‘가라’를 반복하신다.

나는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어 궁둥이를 들려다 말고 도리어 퍼질러 앉아서는 “어떤 삶이 옳은 삶이고 잘 사는 거냐고요?” 하니까 빙그레 웃으시며 “니 잘 살겠다” 하신다. 귀가 번쩍 뜨이기라도 하듯 네에? 하고 재차 물으니 “니 그리 묻는 것을 보이 잘 살것다.” “에이~참, 갈게요” 하며 일어서니 또 따라 나서시며 “니 담배피지 말아라” 등에 대고 말씀을 하신다. “저 담배 안 피워요” 염려 말라는 듯 말씀드리니 “술도 먹지 말그레이” 또 한마디 등에 대고 챙기신다. “저... 술은 조금” ... “여자 술 취해서 쓰러지면 보기 싫다” 당부를 하시듯 이제야 확실하게 말씀을 하신다. 아마도 정신을 놓지 말고 살라는 말씀이신 듯 다시 앞선 걸음으로 찬찬히 길을 일러 주신다. 기약 없는 작별을 하고 총총걸음으로 길을 향한다.

큰길가로 나오니 차들이 쌩쌩 거리며 나를 앞질러 서둘러 지나간다. 아무도 걸어가는 이가 없는 길을 혼자 굽이돌아 내려오며 '나도 꼭 차 한 대 사야 하는데'... 하며 다짐을 한다.

비로암으로 향하는 숲길로 접어들었다. 줄지어 달려가던 자동차 소리가 어느새 끊겼다. 여기, 이 길 왔었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더라? 저기 저산 정상까지 꼭 가보고 싶었는데... 늘 비로암까지만 갔었다. 평평한 길로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암자다. 그 위에 암자가 하나 더 있는데 길이 험하고 가팔아서 힘들다며 많은 사람들이 말리던 곳이다. 그 너머에 정상이 있는데 넘어가면 밀양 얼음골이 나온다고 했던가? “오늘도 비로암까지다” 하며 옛 생각을 더듬으니 어느새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여자는 울면서도 거울을 들여다본다는 노래가사처럼 나는 은연중 뒤따라 오는 자동차가 없는지 살피게 된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날이 화창해서 그런지 군데군데 피어있는 들꽃들하며 지저귀는 새소리가 아름답다. 이름도 모르는 작은 새끼 새(박새?) 한 마리가 햇빛에 오색날개 깃을 반짝이며 요리조리 날아다니며 길 안내를 한다. 저절로 그를 좇아 산길을 둘러본다. 길이 예쁘다. 시간이 조금 걸려서 그렇지 사실 자동차로 휙 다녀오기보다 이렇게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한가로이 터벅터벅 능선을 넘고 골짜기를 따라 가는 길이 여유롭다.

이런 곳에 이런 풍광을 누리며 욕심 없이 살려 그랬고만 어찌하여 나는 이리 홀로 되어 이 골짜기에 또 찾아 드는가 회한이 밀려든다. 갑자기 원통하고 애통한 듯 복받치는 설움을 통제하지 못하고 어어엉~ 으흐흥 어어엉... 흐느낌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통곡이 제대로 소리치지 못한 채,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그리 울어본 적 없는 흐느낌에 소리를 내어 엉엉거리며 토하는 듯한 괴상한 곡을 한다. 길을 따라 무슨 설움 그리 많은지 한참을 엉엉 거리다 멈춘다. 굵은 나무 등걸을 내려오는 청솔이 특유의 쪼만한 반짝이는 눈을 하고는 당돌하게도 나와 마주쳐, 내가 제 곁으로 제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가는데도 꿈쩍 않고 도리어 나를 빤히 들여다보며 맞대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도 기가 막혀 나도 보폭을 줄이 잖고 바싹 다가가니 이번에는 요리조리 좌우로 고개를 돌려대며 돌이질을 치고는 빠꿈이 나를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눈이 어찌 그리 반짝이고 어여쁜지 꼭 아가의 눈과 같이 맑고 투명하게 보인다. 참, 별일도 다 있다 생각하며 저와 내가 짝짜꿍하고 잼잼이라도 하듯 애교를 떠는 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어느새 눈물을 그쳤다. 그래, 그렇게 맑고 고운 눈... 생각이 들으니 또 어느새 곡이 튀어나와 어어엉~ 어엉엉 으흐ㅡ흥 어어엉 아아아~ 훌쩍이며 길을 따라 간다.

반야암
그런데 갑자기 법문하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보름날이어서 사람들이 보름 기도하러 그리 쌩쌩대며 도로를 질주하였던 게로구나 그제서야 까닭을 알고서는 스님 법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사람이 저마다의 짐을 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아비는 부모노릇 자식은 자식노릇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짐인 거야 ... 그런데 원래 고라는 것은 없다고 했다. 고라는 것은 혜안이 없어 지혜롭지 못함에서 연유한 것이니, 지혜롭기 위하여 인생을 통하여 수행이라는 공부를 계속 정진하여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스님의 법문 소리를 지나치며 계속 비로암을 찾아 가려하나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공양주에게 다가가 비로암을 물으니 길을 잘못 들었다며 애달아한다. “너무 많이 들어왔어요. 이제 조금 있으면 공양을 할 시간이니 잠시 기다렸다가 한 술 뜨고 가시지요”한다. 30대 중반의 공양주 한 사람이 그날 모인 신도들의 점심 공양을 위해 혼자 분주하면서도 차림이 다른 나그네 길손에게 친절하고도 정감이 넘치는 말을 건네주니 가슴이 따스하다.
너무 고마운 마음에 “그리하여도 되겠습니까?”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마치 안 먹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큰 실례라도 되듯이 느껴지게 객을 맞는 공손하고 따뜻한, 우러나오는 공경의 마음 씀이 참으로 부처님의 수행자요, 그녀의 마음속에 부처님이 계시듯 하다.

돌아갈 길을 생각하니 오래 머물수가 없고 또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 가야하니 스님 법문 끝나기를 바라는 이내 심사가 오히려 부끄러워, 먹은 듯이 배부른 마음으로 슬며시 발길을 옮겨 들어온 길을 되돌아 나간다. (그래, 스님 법문 들으라고 일부러 이리로 인도하신지도 몰라, 짐을 무거워 하지 말고 고통을 두려워 말고 혜안을 얻어 지혜의 눈으로 삶을 살아가라는 부처님 말씀 인거잖아) 하며 이제는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듯, 언제가 한가로이 반야암 이곳에 와서 평화롭게 스님 법문을 들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비로암으로 향한다.

극락암을 지나 비로암
여전히 작고 아담한 정원이 특히 아름다운 암자, 높은 곳에 욕심 없이 소담하게 차려앉아 밝은 햇볕과 함께 정원에 예쁜 꽃피우고, 늘 깔끔하게 중생들을 반기는 소담한 암자다. 주지 스님은 조금 탄력을 잃은 피부 외엔 여전히 정정하고 다정하며 정겨우시다. 스님은 어서 부처님께 절하라 손짓으로 나를 법당 안으로 밀어 넣으시듯 재촉하신다.

기도를 하게 되면 정말 내가 먼저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리 급하고 간절한 소망이 있어도... 분명 당면한 문제는 그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때마다 가족이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기도를 하라 이르시는지 모르겠다. 묵상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먼저, 내 바람이 먼저 빌어지지 않는다. 비율은 잘 모르겠으나 부모님 아니면 아이들 혹은 아이들 아니면 부모님 그리고 형제들 순으로 이어진다. 사실은 나를 위해 내가 답답해서 갔더래도 언제나 나는 잊어버리고 맨 나중에 기도하게 된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도 그러하리라. 나는 기도를 하면서 부모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먼저 기도 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10년 만에 찾아왔는데요.” 하며 기도라도 해주십사 기록을 하려하니 “오늘 사무 보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하시며 어서 가서 점심공양부터 하고 오라 이르신다. 한 젊은 아낙이 혼자 쑥쓰러이 있다가 나를 반기며 함께 점심공양을 하자며 앞장을 선다. 늦은 점심공양을 하고나서 서둘러 암자를 내려가야 할 판이라 점심상을 치우고는 스님계신 곳에 들으려 하니 햇쌀 가득 내리쬐는 뜨락에, 하나 가득 신발들이 널려있다.

하얀 한지가 발린 창살을 헤집고 방안까지 뻗쳐 들어간 오후의 햇볕과 신도들의 즐거운 이야기가 한데 얽혀, 절간은 느린 스님 말씀과 신도들의 옥타브가 한가로이 메아리로 떠돈다.
잠시 머뭇거리며 들어가려던 발길을 멈추어 이대로 떠나겠다는 목례를 한다. 뜰을 빠져나오는 내 발걸음이 간간히 들려오는 스님음성과 신도들의 화기애애한 웃음소리에 흐뭇하다.
서둘러 암자를 내려 오다보니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있을 것 같아 은근히 욕심이 생긴다.

극락암
중간에 들리지 못한 극락암에 이르러 대법당에 들으려 하니 행자승 하나가 나의 차림을 보고는 반기며 “어디 다녀오십니까?” 묻는다. “예에” 손을 합장하고 뻘춤한 대답을 한다. 법당 안에 들어서니 오후 빛이 반사되어 중앙의 부처님 얼굴을 뵈올 수가 없이 으스스하다. 다른 절과 달리 특이한 형태인지라 공연히 잘 보이지도 않는 부처님께 절을 하는 것이 마치 죄라도 지은 양 섬짓하다. 이 절은 뭔가 다른 분위기다 여기면서 다음에 다시 들러 특징을 알아내야겠다고 마음에 새기어 두고는 마침내 딴 날을 기약하며 가던 길을 재촉한다.

내려오는 길은 확실히 올라갈 때 보다는 빠르다. 친구가 혹시 삼천 배를 마치고 나를 기다리지 않을까 염려하며 통도사 본 절을 향하여 포장이 된 큰 도로를 걷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나는 친구의 전화인 줄 알고 급하게 받으려다 보니 이기찬님의 전화가 아닌가. 나는 약간 숨이 찬 목소리로 반가이 웬일이냐 물으니 어디냐고 되묻는다. 시험을 마치고 광주에서 초아선생님 뵈러 부산에 갔다가 오늘은 울산 사는 3000배하는 친구 따라 통도사에 왔는데, 다시 울산을 경유해서 서울로 갈 예정이라고 하니, 그러면 울산까지 간 김에 포항의 어당팔님을 만나 뵈면 그분 또한 무지 멋진 분이라 일러주며 연락처를 알려준다.

마음이야 백번 그러고 싶지만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사람을 꿈 벗이라는 이유로 들이댈 수도 없고 해서 아쉬운 마음으로 상경하려 했으나 지난번 출판기념 때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받고와 좋았다며 용기를 돋우어 주는 것이 아닌가. 사실 NLP모임과 10기모임 때에도 이기찬님은 포항에서 얻은 에너지가 너무 좋았다며 누누이 이야기 한바 있어 궁금하던 차였던 것이다. 또한 그분의 아내 되시는 서정애님의 글 솜씨 또한 가히 아름답지 않던가. 그래서 나는 책을 내지 않으시고도 남편 되시는 어당팔님 못지않게 글이 수려한 서정애님이 더욱 궁금하다고 해오던 터였다.

연락처를 건네받고 친구와 일정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우선 시간이 어찌될지 몰라 망설이다가 일단 전화를 드리니 반가이 전화를 받아 주시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내 일정을 충분히 배려하여 주시어 어찌나 감사하던지 일단 대충의 이야기를 건네고 나는 신이 나서 친구에게 연락하니 아직 삼천 배를 마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리겠다고 한다. 옳다하고 다시 이번엔 수도암에 들렀다.

수도암
아! 이곳은 내가 묵어간 적이 있는 특별한 암자이다. 모진 삶의 한켠에서 길을 잃고 헤매이다 그래도 가장 안전하리라 믿고 찾아든 통도사내 암자였다. 너무 기력이 없어 다른 곳을 찾지도 못했으며 내키지는 않으나 다른 어떤 곳에도 머물고 싶지 않아 절간으로 찾아든 첫 시도였다. 당시 나는 천주교신자였고 정혼이후 교회에 가지 못했었다. 그래도 아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모두 다니게 될 거라는 헛된 망상을 진실의 보류인양 접어두고 결국에 그를 따라 살았지만, 나의 종교생활은 할 수 없었으며 오직 불교만이 허용되었음으로 인해 그렇게 길들여지게 된 이후 나는 절이라도 가자며 자주 통도사에 다녀가곤 했었다. 불교에 대한 반감은 없었으나 내 것을 버리고 무조건 그렇게 따라야 한다는 강요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족의 평화를 위해 모두를 반목하기보다 한쪽 편을 따르는 것에 동의 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련이 있다고 해서 오랜 동안 냉담해온 주제에 천주교회에 찾아 갈 수 없어 자주 들리던 통도사 큰절에 무작정 갔으나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암자를 찾아 들게 되었던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절에서 기거를 했었다. 그러나 절이라 하여도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공양주 옆에서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다 살게 마련이더라. 처음엔 차마 밥알을 넘기지 못하여 밥을 못 먹었으나 다음날엔 밥도 먹고 잠도 잤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안하는 사람이 없다시던 어머님 말씀이 그때처럼 정확한 때도 없었으리라.

내 모습이 너무 지쳐보였는지 당시 스님께서는 내게 쉬었다 가거라 하였고 공양주가 차려주는 밥을 넘기지 못하자 청심환을 건네주며 우선 먹으면서 쉬어야 한다고 이르시며 약이 필요하냐 물으시며 나갔다 오는 길에 약을 사다주랴 하시었었다. 스님 쓰시는 붓글씨를 도와 곁에서 먹을 갈게 하시며 정신을 놓지 않도록 하시기도 하였지만 나는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 이내 집으로 향하였었다. 스님은 10년 전에 그런 이가 있기는 하였는데 그게 너였더냐 하시며 남들이 뭐라 하든 괴의치 말고 자신이 중요하다 여기는 것을 아주 열심히 즐겁게 할 수 있도록 하여라 이르신다.

즐겁게 하려면 일에는 반드시 因이 있는 것이고 그로인해 果를 얻는 것이니 먼저 果를 보고 因을 즐겁게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여 주신다. 果가 없는 일은 재미있을 수가 없는 것이라 이르시며, 분명하고 확실하게 果를 보면서 因을 행하여 나아가야 즐겁게 혹은 죽도록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르신다. 果를 보고 가면 남이 무어라 해도 흔들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며 남이 미쳤다고 해도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이르신다. 스님께서는 오히려 애가 다시는 듯 말씀을 이어주시려 하였으나 삼천 배를 마친 친구의 전화가 독촉하여 빗발치니 못내 아쉬운 이별을 하며 또 다음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둘러 암자를 내려와 친구와 울산으로 향했다. 그녀는 지쳐있었고 빨리 가서 누워야 하겠다며 몹시 힘들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몸이라고는 나의 반만 해가지고서는 무려 하루에 삼천 배를 처음으로 50일 째 해 나가고 있으니 얼마나 대견하고도 힘이 들 것인가. 아침 8시 반부터 시작해서 오후 3시 반이면 다 마친다고 한다. 그녀는 오늘도 같은 속도로 삼천 배를 마쳤다.

그녀의 대단한 결단에 놀라고 최선을 다해 포기하지 않고 수행하면서 평범한 일상을 지켜나가려는 그녀의 아름답고 처연한 삶의 자세에 새삼 놀란다. 그랬다. 일주일에 한 번 계속해서 6시간 수업 받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지루해 하고 힘들어 했던가. 결과도 없이 그저 과정만을 억지로 이어가면서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해 하였던가.

예전 고마운 기억에 감사함을 전하려 왔으나 되레 감동을 받고 오히려 크게 배워서 간다. 울산에 도착하여 포항으로 가기위해 곧장 고속버스터미널로 가서는 서로의 삶을 기원하며 아쉬운 이별을 했다.

포항 김달국님
나는 처음 변화경영연구소의 어느 세션에서 꿈벗들이 달국이형, 김달국사장, 운제 혹은 어당팔 게다가 운제 어당팔 등의 이름을 쏟아내며 포항이야기들을 할 때 너무 정신이 없었다. 누가 누구인지 뭐가 어쨌다는 것인지, 왜 그리들 신나고 재미있어 하는지 사뭇 궁금하면서도 이분은 뭐가 이름이고 별칭이 왜 이리 많은지 어지러워 쉽게 대입이 되지 않아 헛갈렸었다.

오히려 단아하고 맛깔스런 연상이 떠오르는 서정애님의 글에서 이분이 이분의 아내이시고 책을 내신 분도 분이려니와 아내분은 어찌 이리 멋스럽고 부드러운 화사한 글 솜씨가 있는지 사실 더 궁금하였다. 그래서 아! 서정애님과 어당팔님이 함께 사시는 분이구나 비로소 교통정리를 하고 어찌 이리 사랑하는 글로 남편을 격려하는지 참 아름답게 느끼며 아내분은 시인이신가 상상하였었다.

어느 날 이기찬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래서 궁금증을 물어볼 수 있었는데, “아, 네. 형수님 또한 대단한 분이시지요” 하지 않던가. 해서 나는 도대체 포항에서 뭇사람들을 파도치며 어우르는 이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저절로 궁금해 졌었다. 양산의 통도사에서 암자들을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마침 이기찬님께서 전화를 주셨고 나의근황을 물어오기에 말을 하였더니 이왕이면 포항에 들러 한 수 배우고 오면 좋을 것이라며 연락처를 알려 주신 것이 내겐 큰 행운이다. 나는 용기를 내어 초면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전화를 하여 '써니'라고 하였더니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벗처럼 반가이 맞아 주시며 시간이 가능하니 다녀가도 좋다고 흔쾌히 허락을 하여 주신다. 나는 몹시 설레이는 마음과 포항의 바닷바람을 상상하며 두둥실 즐거운 마음으로 포항에 도착하였다. 처음엔 내외분이 터미널근처로 나와 주시면 함께 저녁식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밤차로 서울행 고속버스에 오를까 했는데, 김달국선생께서는 어찌나 진지하게 자신의 체득된 경험을 바탕으로 실제 상황들을 잘 설명하여 주시며 자신의 꿈에 대한 열정을 피력하시던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참 대단한 즐거움에 매료될 밖에.

허물없는 친구가 찾아와서 편하게 놀자는 것도 아니고 처음으로 보는 낯선 여자가 무턱대고 찾아와 생 초보의 질문들을 던지고 꿈의 실현과정들을 캐어물으면 재미없고 식상할 수도 있으련만, 본인은 꿈을 나눌 수 없는 만남은 시시해서 맛이 없다 하시며, 이제 어느 정도 사그러들고 의당 일상화 되어 무감각해 질 만도 한 것 같은데, 웬걸 마치 미소년처럼 맑은 감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조금이라도 더 크고 구체적인 꿈을 향하여 불철주야 정말 밤낮 없이 노력하는 모습이, 삶 전체와 생활 자체가 어우러져 에너지를 뿜으며 즐겁고 신나게 사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팔딱이는 회와 소주를 겸상하여 저녁을 먹으면서 변화경영연구소에의 참여 동기와 첫 느낌과 다녀온 이후의 변화들과 사부님께서 앞 기수들이 잘 해야 한다며 각별히 격려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꿈과 꿈 벗들에 대한 애정과, 연구소 발전을 위한 견해 등을 동공을 반짝이며 전혀 지치지 않은 모습으로 말씀을 이어가시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목표를 성취시켜 나가면서 얻게 되는 유연한 자신감과 확신에 찬 모습이며 멈추지 않는 노력의 증거이리라.

저녁을 먹고 나서는 집 구경까지 시켜 주시겠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써니의 집과 전원주택에 대한 호기심도 있고 하여 염체 없음을 뒤로하고 서울에서 예까지 떠도는 성의가 괴씸(?)하사 가능한 한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열어 보여주려 하는 마음의 배려가 너무도 고맙고 감사하였다.

집안에 들어서니 안과 밖이 서로 조화되는 평화로운 광경이 한껏 부러움을 더 느끼게 한다. 듣던 바와 같이 서정애님의 여유로운 반김과 정돈된 집안 분위기하며 부부가 한마음으로 같은 꿈을 향하여 서로 격려 하고 지원하는 훈훈함이 감돈다. 밤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는 채 다과상을 마주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있는 듯, 마저의 꿈 이야기를 위해 간이역에 들러 호프까지 걸치니 마치 영하의 한겨울에 한여름 밤의 꿈을 꾸듯 하늘의 별을 세는 기분이다.

늦도록 어당팔님의 꿈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을 모르고 취침시간을 훨씬 넘긴 후임에도 아직 미완의 꿈의 실타래를 풀지 못하는 객이 안쓰러움에선지 무조건 객을 위한 배려심만 가득하다. 마치 학창시절 흉허물 없는 선배를 만나 그간의 삶의 여정을 주고 받듯 허심탄회 하였다. 이것이 꿈을 사랑하는 꿈벗만의 열정 이겠구나 느끼면서 객이 도리어 들어가 쉴 것을 당부한다.

12월 6일 수요일
다시 찜질방에서 몸을 굽고 샤워만 하고 일정을 서두르려다가 이왕에 이리 된 것 내친김에 <마실>에까지 들러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너른 온천수에 몸을 실컷 담가 피로를 씻어낸다. 어당팔님께 상경 길에 마실에 들르고 싶다하니 기꺼이 전화를 넣어 주신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포항에서 천안으로 향하게 되었고 시외버스는 시간이 많이 걸려 대구에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가서 대구에서 기차로 천안을 향해 가려고 서울행 상행 기차에 오르려는 순간 막내 옹박에게서 반갑게도 전화가 걸려오는 것이 아닌가.

다큐멘터리적 실제의 상황을 연출하여 꿈을 찍어내며 완성해 나가는 선배들을 직접 만나니 이해와 또 다른 흥분과 재미를 주는 것이었다. 나는 신나는 음성으로 옹박의 전화를 받았다. 기차가 철로에 들어서는 요란한 굉음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나는 격양된 어조로 막내에게 지난 나의 4박5일 간의 행로에 대해 설명하니, 막내 왈 누나도 참 아무 준비도 안하고 그리 싸돌아 다니냐는 듯 약간 힐란(?)의 조가 섞인 말을 하는 것 같았으나 한편 여태 늘 벼르기만 해오다가 비로소 삼년 가뭄에 목마른 용이 비를 만나 하늘로 승천하듯 비장함과 약간은 낙천적 기질이 발동하여, 시험 휴유증으로 공연히 의욕을 잃고 시간만 죽이고 집구석에 틀어박혀 게으름을 피우게 될 까봐 염려도 하던 차, 이번에 강행군을 해가며 실전에 부딪히게 되니, 마치 탄탄한 설계의 꿈이라도 오래전에 계획되어 있기라도 한 듯, 의욕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실>의 주인 자로님을 만나다!
나는 연일 이어진 강행군에도 피로함을 잊은 채 꿈을 향해 질주하는 또 한 사람의 꿈 벗을 만난다는 기대까지 부풀게 되었으며, 마실은 또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꿈을 성취하고 이루어 가는 지 여간 궁금하여 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로님은 아직 미처 그가 올린 글을 읽어 보지도 못한 나이지만 어찌나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계획을 실천해 가려 노력하는지 아마 꿈 벗이라면 이분의 정체에 대해 모두 다 궁금해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열정의 사나이가 아니었던가.

기차가 역에 도착하여 조금 기다리니 이번엔 먼저 나를 알아보시는 자로님이 역까지 마중을 나와 마실까지 데려가 주시는 것이다. 자로님의 첫인상은 단정하고 섬세해 보였다. 마주앉아 나라는 사람의 상황과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누구보다도 신중하고 깔끔하게 나의 문제와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상의를 해보라고 권한다. 기실 나도 속으로는 그런 생각들을 해오고 있었으나 아직 꿈 벗들을 잘 모르는 상태이기에 시도 할 수 없었음에 마치 나의 문제의 핵심을 파악한 듯 적절하고도 정확한 제안을 하며 교통정리를 할 수 있도록 적재적소의 사람들과 정보와 지혜를 나눌 수 있도록 배치를 잘 하여 주신다.

나는 언제 기회가 되면 또 다른 꿈 벗들을 만나 뵙고 도움을 청하며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에 기쁨과 안도의 숨을 몰아쉰다. 그는 또한 일에만 열정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즐거움과 행복을 나누려는 데에 까지도 자신의 열정을 나누고 배려하며,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곰곰 생각하고 즉각 실천에 옮기는 타고난 열정적 기질의 소유자인 듯하다. 말로는 그냥 대충 한다면서도 음식의 맛을 꼼꼼 챙기고, 하시라도 빈틈이 없도록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아니하며 스스로가 모범이 되fp 불철주야 동분서주 주경야독하는 일인 몇 몫의 성실한 가장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할 진데 <마실>이 어찌 발전하지 않고 배길 수가 있으랴! 아마도 마실은 머지않아 천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 질과 영역을 굳게 다져나가고, 명실공이 요식업의 새로운 장을 창조하는 존재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실은 넓은 공간의 깨끗하고 정갈한 곳이었다. 식사를 하지 못했을 것을 배려한 주인장께서는 나그네의 애환을 눈치라도 챈 듯 상다리가 휘어져라 하나 가득 진수성찬을 내어 놓으시니 그저 감개가 무량할 따름 인지라 워낙에 잘 먹는 나는 오래도록 거의 모든 찬들을 다 먹어치웠으나 정작 주인장 자로님께서는 애써 굶으시며(단식 중) 객의 찬을 보살필 따름이다. 주제 넘는 나의 느낌들도 몇 가지 솔직하게 털어 놓으니 가히 대인다운 마음 가짐으로 진정으로 받아 주시어 객의 편협한 소견을 오히려 격려한다.

어딜 가도 모두들 철철 넘치는 열정과 지속적인 꿈의 확장과 노력으로 여념이 없다. 마실의 맛과 멋과 마실(정다운 사랑방)다움 으로서 천안을 주름잡고 나아가 천안의 명소가 되기를 기원하며 여행의 일정을 줄일까 한다.


후기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일들을 내친 김에 몰아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알고, 찾고, 실행하기에 게을러서는 안 되겠다는 경각심이었고, 둘째는 시간을 절약하여 써야겠다는 생산적 의도였으며, 셋째는 움츠러들지도 모르는 계절에 직접 부딪혀 생각들을 현장에서 쏟아 내자는 것이었고, 넷째는 앞서 노력하신 선배님들로부터의 체득된 경험과 혜안을 나누고 싶었으며, 다섯째는 필요한 것을 찾아 구하는 용기를 내보기 위함이었으며, 여섯째는 위축된 자신을 구출하여 밖으로 끄집어내어 흉허물을 토해 냄으로써 정화되려는 의지에서였으며, 일곱째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목표를 위한 배짱을 키우기 위함이었으며, 여덟째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관찰과 시도였으며, 아홉 번째는 어려울수록 정면으로 대처하여 방법을 터득해 보기 위함이었으며, 열 번째는 타인의 의견에 대한 수용과 참조 그리고 타인의 나에 대한 평가를 알고자 함이다.


느낀 점
사람들은 각자의 주관과 혜안으로 대상에 대한 판단을 하고 강조점을 달리 할 수 있다. 체득된 경험은 진수의 가르침이 있다. 먼저 나를 열고 타인을 존중하며 배려심을 길러야 하겠다. 어떤 일을 하든 확고한 자신의 신념과 의지가 있어야 하겠으며 일을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그 결과를 예측하고 그리면서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생산해 내야만 하는 것이다.

결과가 없는 과정은 한 낱 쓸모없는 허상이다. 원인을 철저히 파악하고 분석하여 기대하고픈 수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여야 하며 반드시 결과로 획득하여 나가야 즐거움이 오래 유지되고 계속적인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 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을 쫒아 버려라.
* 행동하는 양식이 되어라 그리고 철저히 분석하라.

각오
혼자 가는 길을 외롭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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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06.12.12 18:56:27 *.192.80.9
정말로 대단한 내공이 느껴집니다. 앞으로 그것들을 모두 다 분출하시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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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렬
2006.12.13 00:30:10 *.75.166.98
써니님!
지나는 산이 높고 골이 깊으니 아픔도 크시겠지만
넘고 나시면 그 마음은 깊고 그 뜻은 높아서 복이 되실 겁니다.
이름처럼 눈부신 하루들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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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2006.12.13 10:40:42 *.191.110.138
써니님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마치 내가 써니가 된것 같아요.
작가로서의 소질이 충분히 보여요.
그런데 드라마 작가해보시면 잘 하실 것같은데...
원하시는일 잘 찾으셔서 꼭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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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6.12.13 11:51:55 *.180.48.240
글이 힘찹니다. 에너지가 넘쳐요. 16일에 뵐 수 있을지?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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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6.12.13 16:21:53 *.140.145.118
에궁... 써니님.. 숨이 찹니다.. 이렇게 긴 호흡의 글을 올리시다니..
그래도 하나도 안 지루한걸 보면 초아 선생님 말씀대로 작가로서의
기질때문인듯 합니다..^^

위의 두 분도 꼭 한번 만나서 이야기 나누어 보시면 큰 힘이 될듯
합니다.. 아직도 만나셔야 할 분들이 많이 남았다고 하면 조금 더
힘이 나시려나.. 저랑은 영화나 한편 보시지요? 목요일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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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6.12.13 23:29:20 *.70.72.121
하루살이님 제가 고마워하는거 아시지요? 앞으로도 가르쳐 주세요.

김박사님! 감사하고요. 기원님은 또 누구실까? 그렇게 말씀 하심 저 글 못올려요. 격려 고맙습니다. 정화 모모네 일일찾집에서 보고 기찬님
표는 구해놓으셨단 말씀이신지요? 웬수(?) 갚아드려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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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6.12.14 13:48:41 *.145.231.158
긴 여행이었군요.
아마도 마음 깊은 곳에까지 생각이 깊어지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여행은 돌아올 곳이 있기에 가는 것처럼
삶은 살아갈 곳이 있기에 존재하는 법입니다.
머잖아 스스로의 길을 찾아 또 다른 꿈 벗에게 써니님의 내공을 가득 불어넣어 주길 기대하겠습니다.
다음에는 혼자 오시지 말고 같이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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