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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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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15일 12시 43분 등록

늦은 겨울로 기억된다. 겨울바람에 눈두덩과 귓볼, 코끝이 발갛게 오그라 붙은 파마머리 여자아이는 환한 웃음만큼이나 노오란 점퍼를 입고 늦은 겨울의 끈기 있는 바람 사이를 가르며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와아 하는 아이들의 함성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황토빛의 5층짜리 아파트를 등지고 달리는 노오란 점퍼의 그 여자아이는 얼굴에 한가득 시기 이른 개나리를 꽃피우고 있었다. 쨍그랑, 깨질 것처럼 새파랗게 언 겨울 공기가 하악하악 가쁜 숨을 내쉬는 노란 점퍼의 입김에서 파래졌다 하얘졌다를 반복했다.

노란 점퍼 뒤로는 꽤 많은 아이들이 뭉쳐서 내달린다.

타닥타다닥, 타다닥타닥. 타다다다닥, 탁다다다닥.

아이들의 뜀박질 소리는 질서 없이 뒤엉켜 있는 듯해도, 자세히 귀를 귀울이면 기어이 들을 수 있었다. 그 또래 아이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천진하고 꾸밈없는 박자, 그리고 유머스런 리듬이 그들의 뜀박질 안에 고스란히 숨어 있음을 말이다.

 

동네 어디서건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동네 꼬마들'이라 특별히 눈에 띄는 얼굴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제가 가진 최고의 활기찬 표정으로 힘껏 달리고 있었기에 지나가던 어르신이

'고놈들, 참 똘똘하게 생겼구먼' 하고 귀여움을 표할만 하였다. 대략 열 명 남짓한 무리의 아이들이,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로, 또는 같은 유치원에 다닌다는 이유로 꽤 끈끈한 유대감과 동지의식을 가졌던 것 같다.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 너무 추워 유치원도 안 가겠다고 떼를 쓰며 눈물을 글썽이던 아이가 창문 밖에서 같은 반 친구 녀석의 유쾌한 웃음소리라도 들리면 후다닥 목도리를 휘어 감고 현관을 박차며 뛰어 나갔으니 말이다.

아이들은 곧잘 아파트 놀이터에서 출발하여 정문 오른쪽 내리막을 지나 아직 포장되지 않은 시장 공터를 경유, 마지막으로 아파트의 후문으로 완성되는 달리기 코스를 이용하였다. 일요일, 점심밥만 먹으면 으례히 시작되는 경주였다.

 

나는 언제나 일등으로 놀이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놀이터 나무에 "야아도!"하고 손도장을 찍으면 순식간에 얼굴이 벌게진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곤 했다. 어차피 놓친 일등은 할 수 없고 둘째 셋째로 라도 '야아도'를 찍고 싶었던 아이다운 마음을 피차 알지 못했던 우리들이라, 둘째 셋째 순서를 매기는 행사는 결국 몇 명의 얼룩진 눈물과 서글픈 하소연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래도 아이들은 달리는 것만큼은 너무나 환상적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제일 선두엔 첫 '야아도'를 찍은 내가 있었지만 그 다음으로는 순서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엔 둘째 셋째 놈들이 내 뒤를 이어 달리지만 내리막을 지나기 시작하면 어느새 대열이 흐트러져, 와르르 쏟아지듯 아이들의 발이 엉켜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애초부터 순서나 대열은 중요하지 않았던 거였다. '야아도'로 순서를 정하면서 생겼던 아이들 간의 시기 질투는 달리기가 시작되면 이내 흐물하게 녹아 사라져, 우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달리는 것에만 열중했으니까.

 

바람은 꽤 차갑고 사나웠다. 하지만 아직 늦추위가 무서운 줄 모르는 아이들은 마냥 신이 났다. 양 볼과 코끝, 그리고 두 귀가 발갛게 얼어붙어 나중엔 얼얼하게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상관없었다. 차갑고 따가운 겨울바람을 정면으로 맞아 가며 달리다 보면 잔뜩 껴입은 옷들이 오히려 답답하고 거추장스럽게 생각되었다. 분홍색 보온 메리야스는 온통 땀으로 범벅되기 일쑤였고 골인 지점에 이르러선 모두의 몸에서 목욕탕 수증기 같은 열기가 폴폴 올라오곤 했다. 메달이나 상장은 당연히 있을 턱이 없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무엇이 우리들을 그토록 달리고 또 달리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해 겨울의 나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시작된 어떤 신비로운 힘에 이끌리어 아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동화적이고 유머러스한 일에 동참하게 되었던 것 같다. 달리고 또 달리고 매일 달려도, 새로운 길을 달리는 것만 같은 착각은 나를 지치게 만들거나 지겨움에 빠져 들게 하지 않았으며 내 뒤를 따르는 많은 친구들과 함께 한다는 생각에 외로움이나 두려움이란 감정도 일찍부터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내가 그 때, 달릴 때, 정말 노오란 점퍼를 입고 있었냐는 것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른 무언가와 나의 기억이 겹쳐진 듯 하다는 것이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드디어 달리는 장면과 노오란 점퍼의 오버랩된 교차점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보통의 사진보다 훨씬 큰 사이즈로 인화된 것으로, 카메라로 뛰어들 것 마냥 힘차게 정면으로 달려오는 나의 모습이 정 가운데 정확히 찍혀 있고, 누군지 알 수 없는 두 명의 여자 어른이 내 뒤에서, 뛰어 가는 내 모습을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그 사진. 통통한 발간 두 볼에 유난히 대조되었던 노오란 색 점퍼. 사진 속 그날도 역시 추위가 한창인 겨울의 풍경이었다. 무릎에 귀여운 토끼 두 마리가 나란히 웃고 있는 빨간 털 바지와 바람 한 점 침범하지 못하도록 꽁꽁 앞섶을 잠근 노오란 점퍼를 입은 내가 거기, 사진 안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내가 왜 달리는 것과 노오란 점퍼를 한 장면에서 기억하고 있는지 제대로 설명할 순 없지만 아마도 훌쩍 커버린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나리'라는 내 이름과 노오란 점퍼가 무척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그리고 내가 살았던 아파트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개나리 아파트' 였다고 얘기한다면 그 기억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 될 수 있을까.

아직도 나는 설레인다. 팽팽하고 차가운 겨울바람 속을 아무런 두려움 없이 달리고 또 달렸던 그 때의 나를 기억할 때마다. 와아아 하는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함성과 타닥타닥 재빠르게 뛰어가는 경쾌한 발자국 소리, 빨갛게 언 코와 귓불, 그리고 노오란 나의 점퍼까지.
이렇게 나의 겨울은 늦겨울에 만난 때 이른 노란 개나리꽃처럼 놀랍고 반가운 손님이 되어 올해도 나를 어김없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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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5 12:59:23 *.38.42.99
일주일에 한 편씩 글을 올리겠다는 나와의 약속...지난 추억이 소록소록 올라오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10년 가까이 묻어둔 나의 일기들, 나의 추억들. 기억도 추억도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져 가지만 글들은 이렇게 한 자도 지워짐 없이 그대로 남아 세월을 거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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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꿈
2009.01.23 09:01:13 *.197.147.48
나리언니.
글들은
기억과 함께 실로 계속 이어져 있는 것 같아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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