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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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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28일 23시 41분 등록
10막 10장 ① - 홀로 서기

더 이상 스스로의 밥줄을 남에게 맡기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장사 혹은 비즈니스의 길로 들어선지 10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청춘과 열정의 20대를 뒤로 하고 이제는 나를 위해 살자고 마음먹었던 30대 패기만만한 10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기록하셨던 ‘Me story'를 보고 언젠가 나의 역사도 저렇게 한번 써 보리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막상 쓰려고 보니 별다른 인생도 아니었는데 괜히 혼자 잘난 척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그래도 지난 10년의 과정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고, 한 가정을 꾸리게 만들었습니다. 어려웠던 적도 많았고 혼자만의 패기에 세상을 바꾸자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거대한 세파의 흐름에 휩쓸려 잔가지 하나라도 붙잡으려 용을 쓸 때는 세상이 그렇게 원망스러운 적도 없었습니다. 그랬던 저의 과거가 여러분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저 역시 불혹의 마흔을 넘어 가는 고개 길 중턱 바위에 앉아 시원한 바람 한 줄기 쐬다 다시 봉우리를 향해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얼마 전 ‘20년짜리 변화경영펀드’ 라는 글에서 지난 10년 동안 제가 낸 사업자 등록만 10개가 된다고 한 것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봐도 참 많이도 냈구나 싶습니다. 언제 그렇게 이 것 저 것 했는지 헛웃음만 나옵니다. 그래도 제가 남들보다 조금 잘하는 게 있다면 일 벌리는 것이구나 싶으니 이렇게라도 먹고 살았던 10번의 과정을 연재해 보는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은 비즈니스를 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장사니 사업이니 하는 말들을 ‘비즈니스’라는 용어로 통일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1. 엄마방 이유식(이유식 비즈니스 - 1995 ~ 1996, 2년)
2. 이동급식사업(장산곶 급식센타 - 1997 ~ 현재, 10년)
3. 시설급식사업(주식회사 장산곶 - 1999 ~ 2002, 3년)
4. 서울 아케이드 식당(e참맛 - 2001, 1년)
5. 도시락전문점(이바디 - 2000년, 1년)
6. 식자재사업(주식회사 아이비시스템 - 2000 ~ 2001, 2년)
7. 정보통신사업(주식회사 다산정보통신 - 2000 ~ 2002, 3년)
8. 식당비즈니스(청수산장 - 2002 ~ 2005, 3년)
9. 식당비즈니스(마실 - 2005 ~ )
10. 새로운 비즈니스(주식회사 하루경영연구소, 2005 ~ )

머리가 어지럽지 않으십니까? 하나만 잘 하면 될 놈의 일을 뭔 영화를 바란다고 이렇게까지 벌리고 까먹고 혼나고 몸까지 상해가면서 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던 이처럼 했었고 지금도 다시 일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면 성격은 바꿀 수 없나 봅니다. 마실을 개업하고 나서 조금 몸이 편해 졌습니다. 그새 며칠이 지났다고 서울로 어디로 싸돌아다니는 것도, 부산 꿈두레 모임에 가지고 하시는 선생님 말씀에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한 것도 다 타고난 성격 탓으로만 돌려야 할지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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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이 저물어 갈 무렵 저와 집사람은 갓난 애기인 큰애를 안고 천안 부근 어디 공동묘지가 있는 산에서 하루를 꼬박 보냈습니다. 아마 그때 타고 다니던 차가 아벨라였을 겁니다. 차안에서 저와 집사람은 이제 뭐하면서 먹고 살아야 하나를 심각하게 고민하였던 겁니다. 천안을 떠나야 하는가? 그렇다면 대구나 부산으로 내려가야 하나, 서울로 가야 하나 하면서 당장 내일 먹고 살아야 할 끼니 걱정에 30대 초반의 길목에서 초초해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서른 살이었고 현장 노동자로 3년을 살다가 더 이상 돈을 벌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없어 현장을 탈출한 사회경험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신출내기 선머슴이었습니다. 평생을 천안에서 살자고 다짐했던 친구들도 하나 둘 떠나고 어느 날 덜렁 혼자만 남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몸서리치게 서러웠고 두려웠습니다.

지난 6년 동안의 운동에 매달렸던 시간이 아까웠고 뭘 하나라도 배워놓지 않았던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호기롭게 큰소리치며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던 저와 집사람은 현실이라는 해일 앞에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홀로 선 어린아이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대출받아 무리하게 산 교외의 조그마한 21평짜리 아파트 하나, 아직 할부가 2년이나 남아 있는 소형승용차 한 대, 저와 집사람 그리고 돌이 갓 지난 큰 놈, 이것이 서른 살 저의 제무제표였습니다.

조그마한 아이디어 하나를 아내가 떠 올렸습니다. 큰 애를 키우면서 이유식을 해 먹이다가 시내에 있는 이유식 가게를 찾아다닌 적이 있어서 이 비즈니스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겁니다. 지금은 웬만한 곳에는 다 있는 선식가게가 그때는 무척 드물었습니다. 당장 여기저기 알아보고 수소문을 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부산 광복시장에 선식골목이 있다는 소리에 부산까지 내려가 시장조사를 했습니다. 그 와중에 파주 어느 쯤인가에 있는 선식공장을 알게 되었고 몇 번의 협의 끝에 대리점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약 4개월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살고 있던 아파트를 전세주고 받은 1,800만원이 투자금의 전부였습니다. 시 보건소 앞에 가게를 임대해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그 자리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 않은 곳이었는데 저한테는 아주 좋은 자리로 보였습니다. 보건소는 갓난아이 엄마들은 예방접종 때문에 무조건 한 번 이상은 찾아오는 곳이라는 점 때문이었는데, 발상은 좋았지만 나중에 홍보를 엄청나게 해야 하는 고생을 사서 했던 위치였습니다. 소매점은 자리가 반이라는 격언도 모르고 시작했던 무지함은 두고두고 저를 괴롭혔습니다. 당연히 장사는 어려웠고 저는 몇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만 했습니다. 그때 하루 일정을 시간대별로 되돌아보면 먼저 새벽에 우유배달을 했고, 아침에는 어린이집 운전을 마치고 오전에는 팜플렛을 가지고 여기 저기 홍보를 하러 다닙니다. 그리고 점심때는 공장 다니는 아주머니들 차량 운행을 하고 오후에는 배달주문이 있으면 천안 시내 곳곳에 배달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다시 어린이집 차량운행이 끝나면 저녁을 먹고 밤 늦게에는 학원 차량운행을 하였습니다. 소위 ‘모찌구미’라고 하는 거죠. 그래야 간신히 먹고 살만 했습니다.

제일 많이 기억나는 것이 큰 애를 어린이집에 처음 보내던 날의 기억입니다. 17개월 정도 된 큰 애는 엄마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절규에 가까운 몸부림을 쳐대고 우리는 안쓰러워도 억지로 떠맡겨 놓고 가게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난 다음 가게 바깥에서 왠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게 아닙니까? 누구애가 이렇게 악을 써대며 울고 있지? 하면서 바깥에 나가보니까 세상에, 우리집 큰 애가 엉덩이를 처들고 고개는 밑으로 처박고는 엄마가 무서워서인지 안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엉엉 울고 있는 게 아닙니까. 기가 막힙디다. 어린이집에서 가게까지 그 어린애가 울면서 왔을 것을 생각해 보니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 목이 매였습니다. 그후로도 한두 번 정도 큰 애는 그렇게 가출(?)을 했었고 저희는 답답한 현실이 서글펐습니다.

일 년 정도 지난 후에 재래시장인 중앙시장내 공판장에 가게를 하나 더 냈습니다. 장사가 잘 안되어서 목 좋은 곳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장사가 조금씩 되어서 형편이 점차 나아졌습니다. 장사는 전적으로 아내의 몫이었습니다. 제가 가게에 앉아 있으면 손님을 한두 명 밖에 물어(?)오지 못하는데 아내는 저보다 훨씬 많은 손님을 끌어오는 재주가 있더라구요. 아내의 장사 솜씨는 그 후로도 몇 번 저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저에게는 경쟁속에서 이겨야 하는 전쟁이었는데 집사람한테는 물건을 팔아치우는 사람이 아니라 고객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수평적 관계관리를 하였던 것 같았습니다. 이유식 비즈니스는 거의 아내 때문에 간신히 살았다고 할 정도로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는 도중 둘째가 태어났고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외가집으로 가서 3년 동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손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만 1년 반이 지날 무렵 평생을 같이 지낼 후배의 두 달에 걸친 끈질긴 제안으로 난 농장에 관리일을 맡게 되면서 이유식 비즈니스를 어느 정도 정리해야 될 때가 되었음을 느꼈습니다. 먼저 6개월 정도 아내에게 맡겨 놓고 다른 일을 하면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 이유식 가게를 친구에게 넘기고 96년 겨울 새로운 비즈니스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약 2년 동안의 이유식 비즈니스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세상에 혼자만의 힘으로 저와 제 가족을 지키고 살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첫 무대였습니다.

무모한 실험, 부족한 자금, 준비되지 못한 실력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시작했던 첫 비즈니스는 그 이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오늘까지 계속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첫 비즈니스는 세상에 대한 도전이 무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배우게 해 주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먹고 살수는 있다는 것이죠.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면서도 돈을 버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아직은 20대 삶의 흔적을 관통했던 역사와 민족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인한 운동권적 시각이 시장경제가 주는 비즈니스와 돈의 관계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닌가 여겨졌습니다.

그래도 젊을 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 가장 큰 수확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누군가의 눈길을 받으며 일을 하고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월급을 받고 사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젊은 저의 피를 홀로 서게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어쩌면 그것이 젊다는 또 다른 표현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젊다는 것, 그래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사실. 첫 비즈니스의 교훈이자 30대 10년을 관통했던 도전정신의 출발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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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승
2006.04.29 11:09:31 *.237.13.237
허 허, 자로의 일 벌리는 용기는 탁월할 뿐만 아니라 존경심까지 품게 하는군...그 정도면 그 분야에서는 손 꼽아 줄 만한 빼어남이니 그 능력을 바탕으로 50, 60의 모습을 그려보면 무언가 나올 것 같군. 자로의 인생 경험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 나와 다르면서도 참 비슷한 데가 많아서 가끔 착각을 하게 돼...우리 첫 애가 18개월부터 놀이방 다녔고 작은 애는 15개월부터 다녔지, 그래서 그 당시 자네 큰 애 마음과 자네 부부의 마음은 충분히 알 것 같아...자네 부부가 공동묘지가 있는 산에서 하루밤 샐 때 나는 여기 저기 수행처를 찾아다니며 현실 속에 나와 내 가족의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밤을 새곤 했지.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면 희미해져서 잘 보이지 않는 기억들이 갑자기 떠오르는군. 나도 이참에 자신을 찬찬히 다시 한번 훑어보아야겠네 그려...
이런 자기 고백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 자네의 용기를 존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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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곤
2006.04.29 11:35:42 *.233.148.72
여기 부산이야. 어제 도착해서 지금 체제네 집에 있어. 이제 준비하고 꿈두레 모임을 나서야 하는데 형의 고백이 발길을 붙잡네.
나도 386세대였고 한때는 치열한 문제의식을 품고 젊은 시절을 보냈지.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경험이 형이나 나나 종승님에게 큰 자산이 된 거라고 생각해. 형의 따뜻하고 순수한 인격의 밑바탕이 됐을 것이고. 또 문제의식이 있어야 발상의 전환이 되는 것처럼 다양한 사업경험이 형이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거지. 갑자기 나, 박노진의 변화이야기의 단면을 보는 듯한.
먹고사는 문제와 나답게 살아가는 것의 기묘한 모순을 현장은 다르지만 한바탕 걸쭉하게 풀어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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