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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9일 19시 17분 등록
한국인의 ‘관계지향성’ 과 법과의 관계, 7/27/2005
- 삼성월드 에세이


올해로 57회 제헌절을 맞았다. 한 신문에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장을 지낸 동암 서상일에 대한 기사가 실려있었다.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1909년 김동삼, 윤병호등과 함께 대동청년단을 조직해 만주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동암은 대한민국 헌법 제정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동암의 넷째 딸로 유일한 생존자인 서태주씨는 아버지 동암을 이렇게 회고했다. “ 양심과 정직을 목숨처럼 생각한 분이다. 아버지는 늘 대한민국을 굳건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올바른 법을 세워야한다고 믿고 계셨다. 선친의 꿈은 대한민국을 법 없이도 사는 정직한 사회로 만드는 것 이었다”

이 인터뷰 기사는 나에게 묘한 역설적 한국성의 깊이를 느끼게 해 주었다. 한국인들은 법치국가를 이상적 국가로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법이 다스리는 국가는 기본적이고 최소한의 사회일 뿐이며, 정말 우리가 만들고 싶은 사회는 ‘법이 필요없는 사회’ 였던 것이다.

미국은 이질적 민족들이 이질적 문화를 들고 들어와 함께 살게 된 나라다. 이 나라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법을 제정하고 이것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다. 법이 무너지면 이 사회는 지켜야할 질서의 바탕을 잃게 된다. 그러나 동양의 여러 나라 특히 한국의 경우는 단일한 민족이 오랫동안 같은 문화적 관습 속에서 살아 왔다. 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법 외에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다른 기준과 준거들이 많이 존재해 왔다. 법치 외에도 덕치의 아름다움이 강조되어 왔고, 이에 근거한 도덕률이 생활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예를 들어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서로서로 잘 알고 있는 한 마을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실수를 하면, 그것을 법에 의거해 풀기 보다는 또 다른 기회를 주어 갱생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은 탈법적 행동이 아니었다.

미국은 보편주의가 강한 문화 속에 있다. 따라서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며 예외가 없을 때 가장 잘 구현된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특수주의가 강하게 작용한다. 그 사람과 나의 ‘관계’에 따라 법의 엄격한 적용의 정도와 수준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정서의 차이는 그동안 ‘패거리의 서로 봐주기와 부패’로 쉽게 연결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오래된 전통은 백성을 형(刑)과 예(禮)로 다스리되, 형은 최소한의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 예는 ‘인간관계를 인간다운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려는 우회적 접근’으로 인식되었다.

동양의 특수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전거는 무수히 많지만, 아마 ‘맹자’의 ‘곡속장’(穀觫章) 에 실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가장 적절한 사례일 것이다.

전에 소흘이라는 한 신하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언젠가 왕께서 대전에 앉아 계실 때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지나갔는데, 그때 왕께서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사람은 “흔종에 쓰려합니다. ”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왕께서 “그 소를 놓아 주어라. 부들부들 떨면서 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차마 못 보겠구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흔종의 의식을 폐지할까요 ? ” 그러자 왕께서 “흔종을 어찌 폐지하겠느냐. 소대신 양으로 바꾸어라”라고 하셨다는데 정말 그런 일이 있으셨습니까 ? ...... 그런 마음씨라면 충분히 천하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동물의 목숨을 가엽게 여긴 어짐과 측은지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측은함에 대한 것이라면 소나 양이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은 이 이야기의 본질은 ‘만남’에 있다고 해석한다. 소가 떠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이 만남을 통해 서로의 ‘관계’가 형성 되었다는 것이다.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나서 알게 되면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속일 수 없고 가혹하게 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생기는 모든 있을 수 없는 흉흉한 일들은 바로 만남이 없는 무관한 관계 속에서 자행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관계’를 가지게 되면 서로에게 가혹하게 대할 수 없고 어질게 된다는 것이다. 성선설을 주장한 사상가다운 견해다. 이것이 동양의 특수주의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다.

이런 마음가짐과 전통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직도 중국의 판사들은 법을 추상적인 실체가 아니라 각 개인에 따라 따로 적용되어야 하는 융통성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각 개인의 상황과 사연에 맞게 적용될 수 없는 법은 비인간적이며 결코 훌륭한 질서 유지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법이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다. 법은 늘 최소한의 것이었고, 예와 인은 동양이 가려하고 만들려고 했던 이상이었다.

한 사회의 부패는 법이 지켜지지 않아서가 아니다. 법이 무너지기 이전에 이미 지켜야할 윤리가 무너져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이란 결국 가장 마지막 마지노선일 수밖에 없다. 윤리의식은 법과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법이라는 깨지기 쉬운 딱딱한 껍질의 안쪽을 둘러싸고 있는 부드러운 완충물같은 것이다. 법이 지켜지지 않아 불투명한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먼저 지켜야할 기본적 원칙인 윤리의 부드러운 막이 찢어지기 때문에 오탁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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