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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월 13일 20시 28분 등록
(일기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어 이곳에 덧 붙입니다)

일기

나라에는 나라의 기록이 있고, 개인에게는 개인의 기록이 있다. 인류에게는 세계사가 있고, 개인에게는 개인의 역사가 있다. 기록되지 않는 것은 사라진다.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없었다면 임진왜란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 절박하며 통쾌한 장면들이 사라질 뻔했다. 안네의 일기 역시 평범한 인간의 무관심한 악에서 비롯된 잔혹한 일면들을 잊지 않게 해 주었다. 그래서 로가우는 말했다.

“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사람은 그 책의 활자다. 국가는 그 책을 붙들어 맨 끈이고, 시대는 그 책의 한 페이지다”

한 사람의 이야기. 평범한 사람의 결코 평범치 않은 이야기, 나는 이것이 일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아마 초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그때 일기는 숙제였고, 부담이었으며, 방학이 끝나기 전 날 한꺼번에 열흘 치 씩 써 가는 똑 같은 날의 반복이었다. 최초의 개인사에 대한 왜곡이 만들어 졌던 것이다. 그 후 나이를 먹으며 일기를 한 번 써 볼까하는 충동이 몇 번 있었다. 시도한 적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습관이 되지는 못했다. 처음 며칠 성실한 기록이 이어지더니, 이내 듬성해 지다가 이윽고 일년은 백지로 남은 나날로 방치되었다. 가끔 서가의 어딘가에 꽂혀있는 과거의 기록들을 우연히 다른 책을 찾다 발견하고 읽어본다. 종종 그때의 장면들이 까맣게 잊은 기억의 벽을 뚫고 햇빛처럼 생각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침묵한다. 무엇이 나를 화나게 했던가. 무엇이 나를 초초하게 했으며 절망하게 했던가. 이제는 기억할 수 없는 사연과 감정이 곳곳에 묻어있다. 지나간 일이 미스터리로 남게 된다. 역사의 진공이 생기고, 추측이 이루어져야하는 대목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일기가 없었다면 통째로 날아가 버렸을 나의 실존이 그 나마 그 불완전한 기록들에 의해 기억되고 환생되고 추측된다.

내가 처음 기록에 관심을 가지고 쓰기를 시도하게 된 것은 10년쯤 전이었다. 미국에 출장 갔을 때 노트가 너무 예뻐 한 권 샀다. 그 노트의 안쪽 장식 페이지에 이렇게 쓰여있다.

‘1993년 9월 New York, White plain의 Maypole 거리, 한 한인 상점에서’

39살 가을이었다. 고호의 해바라기 그림이 그려져 있는 이 아름다운 노트에 나는 나의 일상을 담는 대신 내가 읽은 책들에 대한 기록을 담아 두었다. 나는 내 소감을 쓰는 대신 나를 움직였던 말들을 적어 두었다. 그리고 이 노트는 내가 첫 번 째 책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쓸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었다. 나는 이 문장들 덕에 쓰기를 시도했고, 이 문장들 덕에 내 책은 그나마 품위를 갖게 되었다.

내 첫 번 째 글쓰기의 시작은 일기였으나 이내 흥미를 잃었고, 글쓰기에 대한 관심은 우연히 독서록으로 회생되었다. 어쩌면 나에 대한 것을 별로 쓸 것이 없었는 지 모른다. 매일 반복되는 인생에 지쳐있었던 것 같다. 뒤돌아 생각할 것도 고민할 것도 별로 없는 인생은 기록해야할 특별한 가치가 없었는 지도 모른다. 일기를 쓰지 못하게 한 것은 나의 불성실이 아니라 아무 특징 없는 하루였던 것 같다.

나는 마흔 아홉이 되었던 작년부터 일기다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서너 번 씩 썼다. 아마 앞으로는 매일 쓰게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내게 내 하루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하루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물결처럼 늘 새로운 하루로 인식되었다. 수없이 일어나는 물결은 똑 같은 물결이 아니다. 그것은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생성이다. 하루 역시 늘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언제고 과거를 떠나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결정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오늘 하루다. 하루는 인생과 같다. 하루의 물결이 없이는 강물이 흐를 수 없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와서 다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빠져 가는 사이 한없는 찬란함으로 빛나는 지금은 오늘이라는 물결이다. 오늘 없이 일기는 없다. 일기는 오늘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일기를 쓰게된 이유다.

내가 일기를 적는 방식을 보면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알 수 있다. 나는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나는 주로 어떤 장면에 집중한다. 내 일기를 펼치면 이내 바로 그 장면을 그려 볼 수 있다. 그 때의 장면, 그 일에 대한 느낌, 생각들이 보인다. 하루에 그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 일이 내게 주관적으로 다가 온 그 날의 하이라이트였다. 마치 한 부분이 확대된 듯한 인상파 스타일의 일기다. 우리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세상을 읽는 방식은 모두 자신의 성격이나 기질의 반영이다. 종종 그 사실을 잊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일기를 쓰는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하루를 사는 방식이 다르듯이 하루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러나 누구든지 멋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일기다. 그것이 바로 일기의 매력이다. 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세상에서 자신을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일기다. 새로운 일을 획책하고, 잘못된 일을 후회하고, 아프게 반성하고, 해보고 싶은 일을 찾아내고, 그 일을 해 본 환희를 즐기고, 해 보지 못한 일을 그리워할 수 있는 자신만의 세상이 바로 일기다. 그러므로 일기는 제 멋에 겨워, 제 멋대로 사는, 지극히 평범한 자의 정신적 일탈이며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군중의 삶 속에서 자기라고 하는 구체적 개체를 구해내는 따뜻한 시선이다. 일기를 쓰다 보면 나라는 인간이 보이고, 나의 꿈이 보이고, 나의 세상이 그려진다.

기록하라. 그대가 이 곳에 머물렀던 그 날들을. 그 어두운 날들을 , 그 슬픈 날들을. 그리고 모든 찬란한 날들과 위대한 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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