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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30일 23시 12분 등록


원고 하나를 써 보냈습니다. 마침 변화에 대한 것이라 여러분과도 함께 나누고 싶어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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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절박한 사람들의 주제다. 절박하지 않은 사람들은 변화에 성공할 수 없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예외일 뿐이다. 이것이 변화의 속성이다. 조심해야할 것은 절박함이 변화를 쉽게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은 경우가 태반이다.

예를 들어 암에 걸린 사람은 담배를 끊는 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이미 늦다. 마찬가지로 마흔 살 10년에 스스로를 전환시키는데 실패한 사람은 오십 이후의 인생을 보장받기 어렵다. 마흔은 폭포와 같은 시기다. 수직으로 떨어져 꽂히는 정신 없이는 삶을 바꾸기 어렵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들은 미리 절박함을 인식하고 전환한다. 현명한 경영자는 이렇게 자문한다. 지금은 좋다. 그러나 5년 후, 10년 후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 수 있을까 ? 현명한 직장인은 이렇게 질문한다. 지금은 괜찮다. 그러나 3년후 5년 후 나는 이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모두 미래의 절박함을 현재로 이끌고 들어와 지금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미래의 절박함을 현재화시킴으로써 아직 괜찮은 지금, 변화를 시도하여 좋은 미래를 얻는 것 - 이것이 우리가 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익이다. 이로움이 없다면 무엇 하러 어려운 일을 자초하겠는가 ?

변화를 원하는 사람은 스스로 시작해야한다. 의식의 확장 없이는 ‘절박함’을 현실로 데려오기 어렵다. 그러므로 의식의 확장 없이는 변화도 없다.

담배가 주는 위험을 인식하지 않고는 담배를 끊을 수 없다. 의식적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의 특징은 변화에 저항하게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담배를 끊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담배의 위험을 알리는 모든 경고로부터 합리적 도피를 하게 된다. 통계는 왜곡되고 예외가 보편이 된다.

그러니까 쥐를 실험하여 담배의 해독을 알리는 통계에 대해서는 ‘그건 쥐에게 적용되었기 때문이지. 아마 저 정도 상태가 되려면 사람의 경우는 하루에 열 갑은 피워야 할 껄’ 이라고 받아들인다. 아니면 ‘내가 아는 그 사람은 하루에 담배 두 갑씩 70년을 피워대지만 아직도 깨끗해. 그 사람 지금 아흔 둘인가 그렇지 아마’ 라고 반응한다. 이것을 자기 합리화 과정이라 부른다. 금연이라는 변화에 대한 사회적 압력에 저항하는 방어 기제인 셈이다.

변화의 시작은 그러므로 ‘의식의 정서적인 각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의식의 고양’ ( consciousness raising)이라는 말은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무의식을 의식하도록 만드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기본적 목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의식의 고양’이란 변화의 과정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프로세스 중의 하나다.

이 말은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실천’으로서의 자기경영과 대단히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현재 자신에 대하여 무관심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스스로 변화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지금 생활이 문제가 있는 것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일이 끝나면 집에 돌아와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는 것 그리고 이내 골아 떨어져 잠에 빠지는 일상이 문제 있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니면 퇴근 후 회사의 동료들과 모여 상사를 비난하며 술을 마시거나, 친구들을 불러내 술을 마시다 자정이 넘어서야 들어오는 일이 비일비재해도 자신은 그저 술과 사람을 좋아하는 호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의 생활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어려운 현재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의 조언과 지적을 바가지 정도로 받아들인다. 주위의 경고도 무시한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는 것이며, 회사에게 있는 것이며, 상황에게 있는 것이며 사회에게 있는 것이며, 이도저도 아니면 운명의 탓일 뿐이다.

그들은 지금의 생활이 그저 숨을 쉬고 있는 것이지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매일 일상에서 반복되고 지속되는 직장에서의 일들은 품삯일 뿐이며, 그 속에서 의미와 보람을 느끼지 못해도 인생은 그런 것이려니 한다. 가족이나 회사의 상사가 그들에게 변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어떤 때는 경고를 주면 마지못해 따라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외부의 강요에 밀려 행해진 외면적 변화에 불과하다.

외부의 힘이 태만해 지거나 약해지면 의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변화의 주문은 귀찮은 것이고, 지겨운 바가지고, 내면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잔소리와 억압일 뿐이다.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들은 자신을 방어한다. 의식의 고양은 이 방어벽을 뚫고 자신의 현재가 문제가 있는 삶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 준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지금 보다 훌륭한 자신이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으며, 자신의 기질과 재능에 맞는 새로운 일의 방식을 찾아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깨우고 탄생시키는 것’이 이제 스스로의 과제가 된다.

지금의 초라한 자신과 자신이 원하는 자기 사이의 간격, 바로 불행과 가능성의 인식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다.

그래서 변화란 불행을 인식한 사람들의 가능성을 향한 몸짓이며, 절박함이라는 불안으로부터 힘을 얻어내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의식의 고양은 변화라는 열차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며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변화는 고양된 의식이 만들어 낸 실천이다. 자신의 불행과 가능성을 발견한 사람들은 거기서 머물면 안된다. 변화는 현재의 불행에서부터 미래의 가능성을 향한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지금을 떠나지 않고는 닿을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한 여정이 바로 변화인 셈이다.

‘떠남’이란 ‘현재의 삶의 방식’을 버리는 것이다. 떠남이란 흡연자가 담배를 끊는 것이며, 밤마다 벌어지는 술자리를 버리는 것이며, 끼고 살던 TV를 끄는 것이다.

떠남이란 직장인이 일에 대한 어제의 시선을 버리는 것이며, 진부한 관행을 깨뜨리는 것이며, 비효율적 시스템을 파기하는 것이며, 배타적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다. 떠남이란 기름진 음식을 피하는 것이며, 늦게 저녁을 과식하는 습관을 버리는 것이다.

떠남이란 바로 하루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반복적인 요소들 중에서 나의 꿈을 위협하는 문제 있는 습관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변화는 떠남만 가지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변화는 극기와 절제와 금지만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변화는 내 꿈에 대한 그리움을 찾아가는 것이다. 바로 변화의 목적지, 나의 꿈과의 만남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만남’이란 긍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행복을 가정한다. 만남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그것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한 웰빙 식단이고, 저녁 운동이고, 주말 등산이다. 하루에 두 시간은 반드시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학습이고, 좋은 책을 읽는 독서다. 부하 직원을 대하는 수평적 태도며, 일을 대하는 창의적 시선이다.

깨달음에 의한 정서적인 각성이 기존의 생활 방식의 한 부분을 바꾸게 할 때, 변화는 실천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제 보다 나아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보와 발전의 정체다. 바로 우리가 원하는 인생을 향한 여행이다.

변화는 위대한 것이지만 또한 아주 작은 무수한 물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하루하루 다르게 사용한 순간들에 의해 축적된다. 그래서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변화는 실천 될 수 없는 것이다. 일상의 곳곳에 숨어 있는 과거의 잔해들을 갈아치우고, 새로운 삶의 관점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고, 과거의 문제 있는 습관들을 바꾸어 갈 때 우리의 하루는 우리가 원하는 삶으로 전환된다. 일상 속에서 실천되지 못하는 것들은 아직 삶이 아니다. 삶은 하루라는 일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루를 개편하지 못하면 새로운 일상도 없다.

변화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그의 무관심과 방어가 결국 스스로를 ‘변화의 대상’이 되게 만든다. 누군가가 우리를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불쾌해진다. 그 외부의 힘이 압도적으로 커지면 저항은 내면화되고 우리는 시키는 일을 하는 수동적 인간으로 전락한다. 이때 일은 품삯이 되고, 일상은 지루한 반복이며, 뜻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삶이 된다. 그리고 이 수동성 때문에 결국 사회로부터 쉽게 버려진다.

변화는 스스로 그 주체가 될 때, 의미있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스스로 주도할 수 있을 때 그것은 자신을 찾아가는 즐거운 여정이며, 내면화 되어있던 자아를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그것은 새로운 자아의 함성이다. 상자 속의 꿈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고 그들이 정한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는 대신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주변적인 삶을 청산하고 스스로 기획하고 스스로 실천하는 삶의 중심에 서게 만들어 준다.

변화할 수 있다면 아직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고, 우리는 깨달을 수 있고, 바꿀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이 변화의 위대한 점이다. 우리는 어제 보다 나아지고 아름다워 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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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6.05.17 10:06:59 *.229.28.18
사부님은 늘 내가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신다....
그래서 나는 그의 글을 읽는다. 내 마음을 대신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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