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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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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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7일 19시 10분 등록
우리 연구원 30명은 지금 진전사 부도탑 앞에 앉아 있습니다.

진전사는 속초 근처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라는 마을 안 자락에 있습니다. 마을에서 얼마쯤 올라가면 평지에 삼층석탑이 덩그마니 놓여서, 그것이 진전사 터였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다시 왼쪽에 저주지를 끼고 올라가면 여러 겹의 산들이 병풍처럼 멋지게 펼쳐지는 (복원된) 진전사 안마당에 이릅니다.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더 오르면 소나무 밭 사이에 부도탑하나가 덩그마니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경사진 길을 천천히 올라 부도탑에 당도하였습니다. 봄은 지천에 깔려 우리를 축복하였습니다. 연노란 싹을 내미느라 분주한 녀석들과, 벌써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낸 녀석들이 함께 벌이는 봄 잔치가 우리를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빠져나온 춘풍이 우리 뺨을 부드럽게 건드릴 때 마침내 사부님의 10분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틀 동안 진행된 연구원 4기 오리엔테이션에서 사부님은 어떤 훈시도, 강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톱니 바퀴처럼 그저 우리 속에 섞여 함께 웃고 먹고 놀았을 뿐입니다. 다만 그는 어제 아침 속초를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잠시 진전사에서의 10분 강의에 대해 언질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공부하러 가는 게 아니고 놀러 가는 것이라고 운을 뗀 사부님은 오늘과 내일 잘 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년 동안 그러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수업은, 내일 아침 먹고 들를 진전사에서의 10분 스피치 뿐이다. 10분도 채 안 걸릴지 모른다.’

4기 임시조교로 3기 조교와 총무님을 도와 행사를 준비하던 나는 사부님의 메일을 한 통 받고 궁금해지지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메일에서 ‘진전사에서 10분 스피치를 하고 싶으니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진전사는 우리가 2차 레이스에서 함께 읽은 삼국유사에 언급된 절입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14살에 출가하여 삭발하고 스님이 된 절이 진전사입니다. 아마도 일연과 관련된 어떤 스피치가 되겠지, 막연히 상상할 순 있어도 그가 어떤 스피치를 할지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기대되는 스피치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스피치가 시작되었습니다.

1,200년 전 어느 사내가 넓은 세상에 나가 스승을 구하러 돌아 다녔다. 마침내 좋은 스승을 만나 혁신적인 공부를 하고 고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자견성불’(네 마음을 읽으면 그게 도다, 네 안에 부처가 있다)의 가르침은 고국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수행한 오늘날 우리가 선종이라 부르는 불교의 한 방식은 당대에 이단이나 마찬가지였다. 낙심한 그는 이곳 진전사에 들어 때를 기다리며 은거하였다. 그러나 그는 살아 생전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자신 스스로 훌륭한 씨앗이 되어 사후 그의 가르침은 이 땅에 만개하였다. 바로 우리 눈 앞에 있는 부도탑이 그(도의 선사)의 사리를 보존한 탑이다. 이제 400년의 세월이 흘러 한 사내아이가 이곳에 와 8년간 수련을 한다. 13세기 혼미한 시대를 살던 그는 앞서간 스승을 따라 종교와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평생을 애쓴 혁신적인 승려였다. 그는 당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책(삼국유사)을 하나 쓴다. 그 책을 통해 그는 ‘우리는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지금 여기 여러분과 내가 있다. 그 둘의 관계가 여러분과 나의 관계다. 사람이 자기의 뜻을 세우고 중간에 물러서면 갈 데가 없어진다. 그들 역시 그러했다. 이제 4기 여러분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1년 동안 ‘양’에 대한 훈련을 해야 한다. 괴로운 훈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환경은 그들 보다 괴롭진 않다. 때때로 회의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생이니, 그것을 담기 위해 1년 훈련을 하자. (이 대목에서 갑자기 사부님은 앞 줄에 앉은 송창용 선배의 빨간 모자를 벗어다 쓰신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이 모자의 의미를 알 것이다. 이 모자를 쓴 훈련 조교는 무엇이든 명령할 수 있다. 훈련을 받는 사람은 무조건 명령에 따라야 한다. 1년 동안 허벌난 채찍이 가해질 것이다. 4기 연구원은 그대로 따라야 한다. 그렇게 1년이 지나면, 그 다음은 조교없는 고독의 기간이다. 혼자서 길을 가야 한다. 선생이 없는 싸움이다. 작가가 자신의 내면을 보지 못하면 엉터리다. 자기 내면의 영웅을 꺼내야 한다. 어제 여러분은 장례를 치르고 이미 죽었다. 죽음은 계속 된다. 계속 죽으며 고독과 싸워라. 그렇게 가는 것이 너희들의 인생이다.

10분 스피치는 끝났습니다. 그 순간, 무거운 돌 하나가 ‘쿵-’ 하고 가슴 속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울림은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평생 가슴 속을 떠다니며 나를 괴롭힐 것입니다. 합격이 영예 만은 아닌 것을 그는 이토록 선연한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깨우쳐 주었습니다.
IP *.248.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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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바다
2008.04.07 22:32:15 *.41.96.47
그런데요, 4기 조교님의 말씀~~' 정말 영을 울리는, 심금을 울리는, '쿵~'하고 가슴속에 떨어진 무거운 돌~~ 같은'
그것에는 안 어울리는 말씀이지만..꼭 하고 싶은 말이 있네요.

구본형 선생님,
정~말 빨간모자 잘 어울리세요.
제가 건천 JC 및영남권 모임에서 얼마전 뵌 선생님 모습보다 한 10년은 젊어 보이세요..
여러분들 그렇게 안 느끼세요? 너무 젊은 오빠 같으신걸요...

좀 생뚱맞죠? 제 말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but 4기 연구원님들 화이팅~~!! 이 말도 잊지 않을게요...
길고 험난한 여정에~~~~ 축복 있으시길...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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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岩박중환
2008.04.07 23:38:29 *.179.70.234
대단하십니다~ 역시 4기 짱님!
어떻게 사부님 스피치를 요약하셨죠? 궁금하네~
다시금 이 문구가 가슴을 후벼 파네요~

"죽음은 계속 된다. 계속 죽으며 고독과 싸워라.
그렇게 가는 것이 너희들의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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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희
2008.04.08 01:01:16 *.41.62.236
사부님이 송창용 선배의 빨간모자를 들어 머리에 썼을때
오래전 보았던 영화 '탑건' 이 생각났습니다.

정화선배가 후기에 쓴 그자리에서의 눈물의 의미를 가늠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시간 정화선배가 흘린 눈물이 부러워집니다.

졸업식에서 예썰, 경례를 할 수 있을 그날까지
4기는 안으로 화합하고 밖으로 더 씩씩해져야 겠지요.

사부님이 5기를 위해 빨간 모자를 쓰실 때까지요.
역시 한숙님은 멋진 우리 조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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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8.04.10 10:15:38 *.128.229.202

조교가 군발이를 강조 한 것 같아 마음에 갈리는구나.
나는 시인이 되고 싶구나. 빨간모자 시인.
그래서 네루다 시 한편을 올려 두마.

*********************************************
<시>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어 있었어,
열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난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어둠,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어둠,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

"네루다의 시는 언어라기보다 그냥 하나의 생동이다. 그의 살은 제 살이 아니라 만물의 살이요, 그의 피는 자신의 피가 아니라 만물의 피이며, 그의 몸 안팎의 분비물은 자기의 것이라기보다 만물의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네루다는 만물이다. 그의 시를 통해 자신들이 드러날 때 사물은 마침내 희희낙락하는 것 같고, 스스로의 풍부함에 놀라는 것 같다. 그의 시 속에서는 사물의 경계가 지워지고, 안팎의 구별은 없어진다." - 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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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벨의 신화를 읽을 때,
그대들은 종종 우주적 에너지와 교통했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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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4.10 12:32:09 *.248.75.5
시가 나를 찾아왔어….

아 저는 이 시를 한 편의 영화와 함께
만난 기억이 있습니다.
네루다의 망명생활과 시골 우체부와의 우정을 그린 영화‘일 포스티노’에서입니다.
배경은 이탈리아 카프리 섬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카프리 섬 바닷가의
포말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 때 이 시가 자막처럼 영상과 함께 소개됩니다.

시가 나를 찾아왔어..

그건 운명처럼 거부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네루다는 뼛 속까지 시인이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파블로 카잘스, 그리고 파블로 네루다. '파블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들은 모두 내면에 활화산 하나씩 품게 되나보다’라고 김병종님은
'라틴 화첩 기행’에 썼습니다.

네루다는 칠레 민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민중 저항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은 다양하고 다복하였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외교관으로 지구촌 곳곳을 누볐고
프랑스대사 재직 시절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연보에 의하면 그의 여자관계는 더욱 화려합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시인이어서였을까요.
그는 원도 한도 없이 연애를 합니다.
공식적인 결혼 3번, 공개적인 애인만 5명,
애인인지 친구인지 경계가 모호한 여성은
부지기수입니다.

관능, 환상, 대자연, 인간, 사랑...
열아홉 나이로 문단에 데뷔하여
40여권 시집에 3,500여편의 시를
불꽃 같이 터트린 그가
다루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저항시와 연애시를 같이 쓸 수 있는
그 정서의 토양은 무엇일까,
김병종 화백은 묻고 있습니다.

네루다의 그 독하고, 강렬하고, 관능적인 시어는 어디에서 발원하는 것일까요?

오늘 사부님이 올린 시를 읽으며
그의 마음 속에 타고 있는 활화산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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