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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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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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13일 21시 21분 등록
실제 OFF 수업에서 발표는
아래의 글을 근거로 하지 않았습니다. 장시간에 걸친 수업으로 인해 모든 연구원들이 힘들어 하는 상황에서 임기응변(애드립)에 의존해 워렌 버핏, 빌 게이츠, 에드먼드 힐러리, 텐징 노르가이와 같은 일화를 조셉 캠벨에 대한 소개로 대신했습니다.


1. 조셉캠벨 나는 누구인가?

안녕하세요? 조셉 캠벨입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주위를 둘러 보니, 제 외모에 실망한 분도 계신 것 같지만, 반가와하는 분도 계신 것 같습니다. 아무튼 고맙습니다. 변화경영연구소 식구들은 지난 4월 한달 간 저와 씨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많은 관심 갖아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제가 글솜씨가 없어서 이해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은 제 개인적인 소개보다는 제가 생각하는 신화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화이야기를 하기 전에 미로와 미궁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미로와 미궁은 크게 다릅니다. 미로는 말 그대로 길이 넝쿨처럼 얽혀 있어서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미궁은 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외길이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미궁은 들어갈 때와 나올 때 같은 길을 걸어야 하지만, 미궁의 중심을 향해 걸어갈 때와 중심에서 나올 때 서로 다른 사람이 된다. 깨닫기 전의 사람과 깨달은 후의 사람은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신화(神話)는 미로가 아닌 바로 ‘미궁’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미궁으로 안내하고 보물을 얻도록 해줍니다. 신화와 상징들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보물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 것이지요. 다만 우리는 잊혀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것을 파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인간과 자연, 온 우주를 관통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생의 잔인한 속성과 그 영광을 인식해야 합니다. 세상은 서로를 먹고 먹히는 관계들입니다. 즉 생명은 다른 생명의 죽임을 통해 태어나는 것이지요. 당신이 세상의 신비를 깨닫기 위해서는 이러한 잔인한 삶의 속성과 영광에 대해 긍정하고 또한 거기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붓다, 마호메트와 같은 성인들은 우리들의 안내자이며, 길이며, 귀환의 동반자입니다.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賢者)는 여러 이름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구원의 몫은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구원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바꾸자고 한다고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 말씀입니다. 어느 사회든 사악하고 불행하며 불공평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됩니다. 추악하고 힘겨운 존재가 있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외로우리라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 계신 변화경영연구원 모두가 자신 그리고 세계와 함께 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만남 또한 신비의 한 조각입니다. 이 조각을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파니샤드에 구절로 제 인사를 대신하고 싶습니다. “해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신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2. 내가 좋아하는 신화이야기

삼국유사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두 남자가 있었다. 둘 다 풍채가 평범하지 않고, 이 세상에 대해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 부득과 박박은 친구 사이로 가까이 지냈다. 나이가 스물쯤 되어 마을의 동북쪽 고개 너머 법정방에 가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그들에게는 아내가 있었고, 일상의 생계를 스스로 일하며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저 멀리 깨달음에 대한 뜻이 커지면 커질수록 세상에서 한 몸이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를 보게 되었다.

<서편제 천년학 음악이 깔린다.>

(부득과 박박 왈 - 서로를 바라보며)
"기름진 밭에 풍년이 들어 무척 남는다 해도, 옷과 밥이 생각하는 대로 이르러 저절로 배부르고 따스함만 같지 못할 것이요. 부인과 집이 진정 좋다 하나, 연꽃 핀 연못가와 꽃밭에서 천성들과 함께 놀며 앵무새며 공작과 어울려 함께 즐김만 같지 못할 것이네. 하물며 부처님을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아야지.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니, 세상에 묶인 끈을 벗어 버리고 더할 수 없는 도를 이루어야 하네. 세상에 묶인 끈을 벗어 버리고 더할 수 없는 도를 이루어야 하네. 먼지 날리는 세상에 코를 박고서야 어찌 세상의 무리들과 다름이 있겠는가?"

그들은 드디어 완전한 출가를 이루기로 작정하였다. 그들이 찾아 들어간 곳이 바로 백월산이었다. 박박이 산 곳은 판옥, 부득이 산 곳은 뇌방이었다. 판자 때기 몇 개로, 돌무더기 여남은 개로 지은 초라한 집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수행(修行)에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덧 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날 해는 저물어 가는데, 아리따운 한 낭자가 박박의 처소를 찾는다. 그 낭자는 김태희의 미모와 이효리의 섹시함을 섞어 놓은 듯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인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시를 읆는다)
"가다 보니 해는 떨어지고 온 산이 저물어
길은 끊어지고 마을은 멀어 사방이 막혔다오
오늘 밤 몸을 맡겨 암자 아래 자려 하니
자비로운 스님께선 화내지 마세요."

(박박이 여자를 보지 못한지 3년. 박박은 교태를 부리는 듯한 아름다운 여인의 미모에 뻑~이 갔다. 옷고름이 약간 풀어헤친 듯한 그녀의 옷차림은 그의 가슴을 더 뛰게 했다. 어느 나라 향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향기로 머리가 아찔했다. 박박은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사랑은 이렇게 찾아오는 것인가? 가슴이 두근 거렸다.)

<사랑은 봄비처럼~음악이 깔린다>

(그러나 박박은 수행자신분.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겉으로는 기색을 하지 않고 마음에 없는 딴 소리를 한다)
"절이란 깨끗이 지키는 것을 일삼는 곳이오.
그대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빨리 떠나시고 이 곳에 머물지 마시오."

박박은 어떨결에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후회막급이었다. 박박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욕망으로 주체할 수 없었다. 가슴이 아팠다. 으~ 그러나 박박은 수행자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는 곧 단념했다.

여인은 자신의 미모에 넘어가지 않은 박박에 울분을 가졌지만, 얼굴 이쁜 여자 치고 머리 좋은 여자가 없듯이, 이내 모두 까먹고 다시 남자를 찾아 헤매였다. 그래서 다시 부득의 처소를 찾는다. 지난 유혹이 실패했다 생각하고, 여인은 최신 텔미의 원더걸스 춤을 추며 교태를 부린다.

<텔미의 원더걸스 음악이 깔린다>

(부득은 아름다운 여인의 미모와 현란한 텔미의 춤에 넋을 잃었다. 그도 남자였다. 그러나 수행자의 신분임을 자각하고 정신차리며 말했다.)
"그대는 어디서부터 밤을 헤치고 오시는 것이오?"

(여인 왈)
"맑기가 태허와 한 몸이니 어디 오고감이 있나요? 다만 현명하신 스님께서 뜻이 매우 깊고 덕행이 높다 하여 보리를 이루는 데 돕고자 합니다."

(여인이 고혹스런 눈빛을 보내며 시를 읆는다)
"날 저문 산길에
가는 곳마다 사방이 막혀 있네
소나무 대나무 숲은 그늘이 짙어 가고
골짜기 시냇물 소리는 낯설기만 한데
자고 가기를 바라는 것은 길을 잃어서만 아니요
스님게 계율을 일러 주려 함이네
내 청을 들어만 주실 뿐
어떤 사람인가는 묻지 마오.”
(부득은 혼잣말로 생각했다. 어떤 사람인가를 묻지 말라니? 이게 바로 그 묻지마 만남이란 말인가? 영화에서 보던 그 열정적인 사랑이 나에게도 찾아오는구나?)



(그러나 부득은 경험이 부족한 초짜였다. 부득은 자신이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겉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곳은 여자가 와서 더럽힐 곳은 아니오.
그러나 중생을 따르는 것도 보살행의 하나이지요.
하물며 깊은 산골에 날마저 저물었으니 어떻게 소홀히 대하리요.
누추한 방이지만, 쉴 수 있다면 들어오시오.”

부득의 예상과는 다르게 여인은 작업을 걸지 않고 잠을 자는 것이 아닌가? 이후 스테이지에 실망한 부득인지라, 끊어오르는 욕망을 가라앉히기 위해 염불을 외고 또 외웠다. 그러나 일정하던 목탁소리는 그의 욕망의 크기만큼 점점 커져만 갔다. 그는 원초적 욕망과의 전쟁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한밤중의 뇌방은 스님의 염불소리와 곤히 잠든 여인네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그런데 밤을 맞을 무렵 여자가 부득을 불렀다.

(여인 왈)
"제가 하필 아이를 낳으려나 봅니다. 스님께서 거적때기를 좀 준비해 주시지요."

부득은 매우 당황했다. 작업을 걸어오르리라는 여인네가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닌가? 여기가 무슨 동네산부인과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이윽고 여인은 진통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부득은 부랴부랴 출산을 준비할 수 밖에 없었다. 여인은 시간이 흐른 뒤 아이를 출산했다.
“아~~~~”, “응에~, 응에~”

이윽고 여인은 목욕물을 부탁했다.
“몸을 정갈하게 하기 위해 목욕물을 부탁드립니다”

부득의 마음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방금 출산한 여인을 범할 수는 없었다. 두려운 마음이 엇갈렸으나, 항아리 욕조를 마련해 여자를 거기 앉히고, 새로 물을 끓여 씻겼다. 그녀의 피부는 역시 부드러웠다. 떨리는 가슴을 안고서 욕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금강경을 되뇌였다. 부득의 수행 목적은 여자를 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절대행복 = 열반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임을 되뇌였다.

그런데 그 순간 욕조 안의 물이 향기를 가득 피우면서 금빛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부득이 크게 놀라자 여인이 말했다.
(여인 왈)
"우리 스님도 여기와서 함께 씻으시지요."
(부득은 거의 실신 상태에서 맛이 간 목소리로)
“아~ 네~”
부득은 굳이 권하자 이에 따랐다. 문득 정신이 상쾌하고 맑아지면서, 피부가 금빛이 되었다.

(여자 왈)
"연대 위에 앉으시지요."

부득은 이에 따른다.
"나는 본디 관음보살이오. 네가 여인에 대한 욕정에 흔들리는 것을 잘 보았다. 그러나 너는 원초적 욕망을 잘 참아내었다. 그래서 너의 대보리를 이루도록 와서 도운 것이다."

(부득은 크게 놀라며)
큰 절을 하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날이 밝았다.
(박박 왈 - 혼잣말로)
"부득이 분명 계를 더럽혔을 것이야. 가서 비웃어 줘야지~"

부득의 처소로 득달같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웬걸, 부득을 보니 연대에 앉아 미륵존상이 되어 밝은 빛을 내고 있지 않은가?

(박박 왈)
"내가 눈에 씌운 것이 있어 대성을 만나고도 바로 모시지 못했구먼. 그대는 지극히 인자하여 나보다 먼저 이루었네. 바라건대 옛날의 약속을 잊지만 말아주시게, 부디 함께 가야지 않겠나?"

(부득 왈)
" 암 그래야지~ 욕조에 남은 물로 몸을 씻게나~"

<박명수의 바다의 왕자를 부르면서 두 사람은 함께 성불을 하였다고 한다>


3. <노힐부득 달달박박> 신화를 좋아하는 이유

조주 스님과 남전스님의 대화다. 조주스님이 먼저 물었다.
"도(道)는 무엇입니까?"
"평상심이 도이고 진리이다."
"그러면 평상심을 향해서 닦아 나아가면 되겠습니까?"
"안되지. 그러면 참된 도와는 더욱 멀어진다."
"만약 마음을 일으켜서 마음을 닦지 않으면, 그것이 도인 줄 어찌 알겠습니까?"
"도는 알고 모르는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안다는 것은 허망한 깨달음이고, 모른다는 것은 허무일 따름이다. 만약 진정으로 이 한걸음에 도달해서 의심하지 않으면 마음이 허공처럼 탁 트여서 광활하므로 아무런 장애가 없다. 이때가 되면 또 무슨 옳고 그름 따위를 말할 수 있겠는가?"

조주는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

위의 글은 홍자성의 <채근담>중에서 나오는 일화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당신은 도(道)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겠는가? 깨달음의 떨림이 다가오는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한 때 불교서적에 심취해서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해석한 책들을 읽은 적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얄팍한 수준이지만, 불교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 넓이와 깊이의 끝이 어디인지 개탄한 적이 있다. 그래서 불가의 사상을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본전도 못차리겠다는 생각에 단념한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불가의 사상이나 일화를 접할 때면, 매번 새로운 깨달음(?)과 배움을 얻는 것 같다.

<삼국유사>에서 나오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설화(說話)를 선택한 이유도 개인적으로 불가의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취향 때문일 것이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지만, 부득과 박박 그리고 여인의 주고 받는 대화는 한편의 시(詩)이며 아름다운 노래이다.

여인의 방문을 거절한 박박을 저자는 이기심과 독선의 발로라고 폄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함께 득도를 하자는 박박의 애처로운 부탁이 더욱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부득의 경우, 여인을 박절히 내쫓지 못한 것, 아이를 낳으려는 여자 옆에 가만히 등불을 피워 놓은 것, 산후의 여인을 씻긴 것 그의 행동 하나하나 그 자체가 관음보살의 현신으로 보인다. 또한 본인이 성불 한 후 박박에게 남은 욕조의 물로 몸을 씻게 하여 함께 성불하는 모습은 과히 인간적이라 볼 수 있다.

아주 짧은 설화이지만,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야기와 같이 훗날 나의 이야기가 한편의 시(詩)와 같이 아름다운 노래(頌)로 불릴 수 있다면 그만한 멋진 일도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속에서 깨달음의 지혜를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이지 않겠는가?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이 이야기 속에서 깨달음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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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2008.06.16 00:56:21 *.177.232.39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늦게나마 4기에 최종합격자되심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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