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연구원

연구원

  • 조회 수 2360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8년 5월 13일 22시 15분 등록
- 조셉 캠벨, 나는 누구인가

나 조셉 캠벨이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삶의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나의 삶은 어떤 것이었다고 판단하십니까.
한번 내 삶의 궤적중 일부분을 간단히 살펴볼까요.

일단 제가 여섯 살때 인디언 문화와 제의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모두 알고 있지요. 그런데 1921년 다트리머 컬리지에 진학했을때는 생물학 수학을 전공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요. 인디언 신화와 제의를 좋아했는데 생물학 수학이라니요.
결국 한해 뒤에 콜롬비아대로 전공을 바꿔서 편입합니다. 영문학 비교문학 전공이었죠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아서왕 전설을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물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죠.
이제 좀 제가 원했던 것과 같아 비슷해졌습니다. 그 뒤에 유럽 유학을 갔고 유럽에서부터 제가 좋아했던 신화에 대해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합니다.

결국 신화로 방향을 잡았지만 그 전의 궤적을 보면 좀 어수선 하지요.
제가 말했던 천복을 여섯 살 때 찾은 듯 싶었지만 걸어온 길은 조금은 갈팡질팡 이지요.
생물학 수학을 거쳐 영문학 비교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 들어가서야 본격적으로 전설에 관한 학문적 연구를 했으니까요.
헷갈리게 살았다고 해야 하나요?

그런데 그것 보다 더 극적인 게 있지요.
사실 제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부분입니다.
제가 유럽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때, 미국은 대공황의 시기였습니다. 일자리를 찾기도 어려웠고, 연구했던 학문이 일반적인 학문이 아니어서 불러주는 학교도 차직 힘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우 어떻게 했을까요.
기를 쓰고 일자리를 찾아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라도 하거나, 또는 아예 포기하고 집에서 딩굴딩굴 하거나 그랬겠지요. 사실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지요.

저는 그 때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드스톡이라고 불리는 숲이지요. 그 숲에서 오두막을 하나 얻었지요. 1년에 20달러라는 아주 싼 가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5년이란 시간동안 책만 봤습니다. 하루를 네시간 단위의 네번의 세션으로 나누고 그중 세번째까지는 독서 그리고 나머지는 휴식... 이렇게 해서 하루 9시간을 순전히 독서에 전념할 수 있었지요.

이건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한국에서 말하는 식으로 하면 무데뽀이고 쇼부를 친것이고 승부수를 띄운 것일까요? 일반적인 선택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배고픈 길이었고 힘든 방식이었지만 그 때의 5년이 나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일반적인 삶의 방식으로는 좋은 선택이 아니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수 없고, 미래를 내다본다면 더욱 답답한 꼴이었죠.
젊은 사람이 숲속에 쳐박혀 기한없이, 그리고 어떤 보장된 약속도 없는데 책이나 보겠다는 것은 어찌보면 인생 포기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길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간 이후에 이어질 아주 긴 시간동안 가야 할 나의 길을 다지는 시기로 삼은 겁니다.
결국 저는 그 선택을 토대로 나의 길을 걸어갈수 있었습니다. 성공한 선택이었죠.

그렇지만 아마 저와 똑같은 방식을 택한다고 누구나 성공하는건 아닐겁니다. 실패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렇기에 저같은 경우는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선택에 있어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양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았을때 참으로 답답해 보이는 선택이 뜻밖에 삶의 길을 열어주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삶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삶에 너무 매달리다 보면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아예 못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번쯤은 매달리지 말고 놓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제가 그렇게 했고 그렇게 해서 삶의 토대를 마련했으니까요.

반드시 성공하느냐고요?
그걸 누가 장담할 수 있나요.
그렇지만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성경에 이런 말이 나온다고 하지요.
하느님은 한쪽 문을 닫히면 다른 쪽 문을 열어놓는다고.

하나의 문에 너무 매몰되지 마세요.
삶에는 많은 문이 열리고 닫힌답니다.

오늘 제가 하고싶었던 이야기는 이것이었습니다.


- 미다스왕의 신화

무엇이든 만지면 황금으로 변하게 만들었다는 미다스왕은 탐욕과 어리석음의 대명사로 불린다.

미다스는 프리기아의 왕이다.
미다스왕의 아버지는 고르디아스. 프리기아의 왕이었는데 왕이 된 사연이 완전 로또다. 고르디아스는 원래 가난한 농부였는데 여러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
프리기아는 당시 많은 재난으로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사람들은 아폴론 신전에서 신탁을 구했는데 ‘마차를 타고 오는 사람이 왕이 되어야 한다’ 는 것이 신탁이었다.
때마침 그때 고르디아스가 마차에 미다스를 태우고 신전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당신이 우리의 왕이십니다.”외쳤고 고르디아스는 순식간에 얼떨결에 왕이 되었다.

왕위를 물려받은 미다스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욕심이 많았다는것.
미다스가 나라를 다스리던 어느 날 이었다.
실레노스(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스승. 반인반수의 사티로스 종족)가 술에 취해서 길을 잃고 헤매다 프리기아의 산속에서 잠이 들었다. 한 농부가 이상하게 생긴 실레노스를 발견해서 밧줄로 묶어 왕에게 데려갔다. 미다스는 실레노스를 한 눈에 알아보고 실레노스에게 결례를 사과한 뒤 열흘동안 극진히 대접했다.
열하루째 되는 날. 실레노스는 미다스를 데리고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있는 숲으로 갔다.
디오니소스 “나의 스승을 환대해주었으니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겠소. 말해보시오.”
미다스 “내 손에 닿는 것은 모두 금이 되게 해달라”고 말했다.
디오니소스 “별로 좋은 소원이 아닐텐데... 다른 소원은 없소?”
디오니소스가 말렸지만 미다스는 “이것보다 더 좋은게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그럼 원하는대로 해주지.”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다음날 아침.
미다스가 정원에서 떡갈나무 가지를 하나 꺾으니 황금으로 변했다. 아싸.
“나는 이제 최고의 부자다” 환호하는 미다스.
기쁨에 넘친 미다스왕은 성대한 잔치를 벌이게 했다. 그러나 미다스가 잔칫상 음식에 손을 대는 음식마다 황금으로 변하고 치즈도 빵도 물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먹을 것을 다오. 먹을 것을.”
미다스의 기쁨은 공포로 바뀌었다. 미다스는 자신의 욕심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미다스가 음식을 먹을 수 없게되자 딸 오렐리아가 아버지에게 음식을 먹여준다.
오렐리아가 먹여주는 포도주를 마시다가 포도주가 입에서 넘치는 바람에 컵을 잡는 순간 컵과 딸 오렐리아가 황금으로 변해버렸다.
미다스왕은 절망하고 공포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가 얻은 기적의 능력은 횡재가 아니라 횡액이고 저주가 되어버린 것이다.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에게 달려가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디오니소스 신이시여. 제 욕심과 허세가 지나쳤습니다. 자비를 베푸시어 제게 주신 능력을 거두어 주시고 제 딸도 돌려주십시오.”
디오니소스가 웃으며 말했다.
“어리석은 미다스여. 이제야 알았느냐. 너의 탐욕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네 소원을 들어주마. 팍타로스 강의 원천을 찾아 온몸을 씻으라.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정화하라.”
미다스 왕은 팍타로스 강을 찾아 목욕을 했고, 그 이후 팍타로스 강에서는 사금이 많이 난다고 한다.


- 미다스왕의 신화를 왜 선택했나

미다스 왕의 신화에서 황금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부유함의 원천이죠. 요즘의 용어로 한마디로 말하면 돈 이겠죠.
미다스 왕에게 있어서 손에 닿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는 것은 탐욕입니다. 탐욕이라는 말은 그렇게 좋게 들리지 않는 말입니다. 사실 좋지 않은 예를 들때 탐욕이라는 말을 씁니다. 탐욕을 지니면 비도덕적이고 불량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듯이 말하고 평가하지요.

그러나 사실 탐욕을 쉽게 버릴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부유함은 대단한 특권입니다. 삶을 편하고 안락하게 해주지요. 그리고 삶을 자유스럽게 만들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부유함을 추구하지요. 쉽게 말해서 돈을 더 벌려고 혈안이 되지요.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부터, 나라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많은 부를 추구합니다. 그 욕심의 어디까지를 탐욕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미다스의 신화를 가끔씩 생각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습니다.
내 손도 미다스의 손처럼 만지는 것마다 황금이 된다면 행복할까?
신화에서 본 것처럼 그것이 결코 행복도 아니고 행운도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지만 실제 그러한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미다스의 손이 부러워졌습니다.
30대 시절에는 부유함에 대한 부러움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게 큰 돈 없어도 사는데 불편한거 없다. 이런 철학아닌 철학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큰 욕심이 없었고 또 욕심 때문에 괴로워 해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40을 넘고 나이를 먹으면서 부유함에 대한 부러움이 커졌습니다. 남들이 갖고 있는 부유함의 크기와 이미 그들을 따라갈수 없는 정도의 차이를 내고있는 내가 갖고있는 자산의 크기를 비교해보니 답답하더군요. 마치 삶을 잘못 산 것처럼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지나온 삶의 형태나 삶의 방식과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대부분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자산의 크기로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삼았고,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반 사람들의 잣대를 잘못되었다고 말할수 없었습니다. 그것도 수많은 잣대중의 하나이고, 사실 돈이 많다는게 나쁜것도 아니니까요.

문제는 힘들다는 거지요.
나도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 중의 하나인 이상 남들과 자신을 돌아보며 비교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그 결과로 속 쓰리고 짜증나고 괴로운 것도 당연한 일일테고요.
도대체 이 나이까지 뭐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특별히 잘못 산 것도 아니고, 허투루 산 것도 아닌데, 남들보다 돈이 없다는 것 때문에 그 동안의 삶이 실패한 삶으로 순식간에 바뀌더군요. 그것은 아주 간단한 논리였고, 그 논리에 대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했습니다.

젊어서도 괴로워하지 않았던 이유로 나이가 들어서 괴로워 할 줄은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더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지금도 그런 과정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유함에 대한 욕심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미다스왕처럼 그렇게 큰 탐욕은 아닙니다.
생계를 유지하고 아이 교육시키고 노후에 큰 걱정없이 살 정도면 더 이상 욕심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보니 욕심이 앞섭니다. 저에게 미다스왕의 신화가 의미를 갖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IP *.204.29.6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