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오늘 팔이 너무 아파요. 필기는 못하겠어요.”

한 때 모 예고 무용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과외를 했었다. 그 친구들은 레슨이 우선이었기에 과외시간은 들쑥날쑥이었고 취소, 연기가 다반사였다. 고된 연습을 하고 책상 앞에 앉은 아이는 언제나 지쳐 있었다. 공부에 들어가기 앞서 지친 마음을 푸는 워밍업 시간이 필요했다.

“선생님, 백조의 호수 아시죠? 저 오늘 ‘백조 1’이었쟎아요. 팔을 이렇게 해가지고(두 팔을 엇갈리게 X자로 만든다) 목을 빼고 한참 있어야 하는데 팔 아파 죽을 뻔 했어요. 나중에 공연 볼 때 주인공만 보지 말고 백조 1, 백조 2들도 봐주셔야 해요. 불쌍해요.”

그 때는 한참을 웃었다. 연극의 ‘행인 1’처럼 발레에도 ‘백조 1’이라는 게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고 아이가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X자의 손짓과 길게 뺀 목이 마냥 웃겼던 것이다. 그렇게 병풍처럼 무대의 배경이 되어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무용수들을 ‘코르 드 발레(corps de ballet)’라고 한단다. 어인 일인지 그 때는 웃으며 나눈 수다가 내 마음 속에 돌덩이처럼 무겁게 남아 있었다.

실력이 뛰어났던 아이가 솔리스트가 되지 못해 오자마자 가방을 팽개치고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었던 기억, 고 3이 되어 ‘어차피 주인공이 되지 못할 건데 왜 무용과를 가야 하냐’며 엄마랑 싸웠던 기억이 스치듯 지나간다.

발레를 전공하는 사람들만 이런 슬픔을 겪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경기를 뛰지 못하고 벤치에서 대기 중인 운동선수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병풍처럼 늘어서 무대 중앙 주인공의 화려한 춤을 바라보는 백조들, 벤치 위에 앉아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는 선수들을 바라보는 대기선수들.

그런데 무대의 주인공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어딘가 낯익지 않나? 그들의 마음이 꼭 내 마음 같지 않나? 무대의 주인공을 꿈꾸며 최선을 다하지만 나아가기보다는 자꾸만 처지는 느낌. 실력의 부족, 나를 알아주는 귀인의 부재, 운의 부재, 건강의 상실 등 무대에서 자꾸만 나를 밀어내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밀리다 어느 순간 덜컥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것 같은 서글픔에 속상한 적은 없나.

병풍처럼 늘어선 ‘코르 드 발레’ 무용수를 상상해보자. 그녀는 지금 무대 배경으로 서 있지만 한 줄 한 줄 앞으로 나아가 마침내는 무대 중앙에서 화려한 날갯짓을 하는 주인공 백조가 될 것을 꿈꾸고 있다. 그런데 지그프리드 왕자가 아닌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임신을 했다. 아뿔싸!

날개는 꺾였다. 아니 접었다.

동료들은 승진하는데 나만 기저귀를 갈고 있는 것 같다. 아이가 뒤집고 걷는만큼 동료들도 나아가는 것 같다. 나만 뒤처지는 것 같다. 애써 모성애와 육아의 숭고함으로 위안하기에는 무대가 자꾸 어른거린다.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여성이야말로 무대 뒤편의 서글픈 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알 것이다. 이러한 때 필요한 주역의 괘는 없을까.  

‘풍택중부(風澤中孚)’는 주역의 61번째 괘이다. 위에는 바람(바람 풍, 風)이, 아래에는 연못(연못 택, 澤)이 있어 ‘풍택’이며 괘의 이름은 ‘풍택중부(中孚)’이다. 부(孚)는 믿음을 의미한다. 연못 위로 바람이 부는 이미지다. 괘의 이미지를 보면 3층과 4층에 2개의 음효(--)가 있어 가운데가 호수처럼 오목하게 비어 있다. 그 ‘비어 있음’을 ‘마음의 믿음(중부, 中孚)’이라 이름 붙인 걸까.

누구나 자신이 꿈꾸는 무대, 그 무대에서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자원이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풍택중부괘에는 아래와 같은 말이 있다.

鳴鶴在陰, 其子和之. 명학재음 기자화지

우는 학(鳴鶴)이 그늘에 있어(在陰), 그 새끼가(其子) 화답한다(和之).

왜 음지에서 학이 울까.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 울어도 새끼는 어미임을 알고 화답한다. 무대 뒤라는 그늘에 처할지라도 자신을 믿고 열의를 다해라, 무대의 주인공이 될 미래의 나(새끼)는 그 노력에 화답하며 언젠가는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학의 울음은 자신을 믿으라는 내면의 목소리이다. 나의 현재 조건을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미래의 나’는 나의 열의에 응답할 것이다. 꿈을 향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 거기에 화답하자. 나를 믿자.

아래는 그 뒤를 잇는 문장이다. 인생의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기 위해 달리는 이들이 간직하면 좋겠다. 

我有好爵, 吾與爾靡之. 아유호작 오여이미지

내게 좋은 잔이 있어(我有好爵) 너와 함께(吾與) 이것을 같이 한다(爾靡之).

좋은 잔(호작, 好爵)으로 상징되는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꿈을 이루게 되었을 때, 무대에 진출하여 주인공이 되었을 때, 나누고 베풀자.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엔 나를 믿고 도와준 주변인들과 기쁨을 함께 하자. 그들의 도움은 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뜻도 좋지만 읽을 때의 어감도 시처럼 부드럽고 따듯하지 않은가. "아유호작 오여이미지."

세상이 정한 무대 공간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고, 주인공 역시 소수일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했지만 세상의 무대가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너무 속상해 하지 말자.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믿으라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말고, 욕심 내지 말라는 것이다. 마음에 품었던 무대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 꼭 그 무대여야만 한다는 법도 없지 않나.

세상이 정한 무대는 깨끗하게 잊고 나만의 소무대를 만들자. 이런 저런 이유로 중앙 무대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면 나만의 ‘작은 판’을 벌이자. 치열한 조직을 떠나 나만의 컨셉을 담은 1인 기업을 만들면 된다.

다시 ‘풍택중부’괘의 오목한 부분을 주목하자. 마음을 비운 텅 빈 나룻배같지 않은가. 나를 믿되 마음을 비워라. 연못 위의 바람이 저 양지로 나룻배를 이끌 것이다. 저 양지에서 화답하는 미래의 당신을 만나라.

미래의 당신이 말한다.

내게 여기 좋은 술과 잔이 있으니 어서 오게, 술 한 잔 함께 하세.

아유호작 오여이미지(我有好爵, 吾與爾靡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