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불씨
  • 조회 수 7132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20년 11월 8일 09시 39분 등록

책을 통해서만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책을 짓눌러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일당들
머리를 종이 위헤 처박고 있는 일당들
부디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우시라
그리하여 '진리의 노예'가 되지 말고, '지혜의 친구'가 되시라 
- 니체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 -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사실 사유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하는 것들 태반은 문을 걸어 놓고 안에서만 왁자지껄하기 일쑤다. 문 밖에서 사유하는 방법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아니, 남들로부터 배울수 없다. 흉내는 낼수 있지만 내재화되지 않은 앎은 내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배워야 한다. 물론 문 안에서의 사유가 문 밖으로 이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문 안에서의  사유는 문 밖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문 밖에서의 사유는 바로 실천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꽃을 식물도감에서 찾아서 정하는 사람은 없다.

제대로 된 지혜는 깊은 사유에서 태동한 다음 삶의 행위 속에서 피어난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좋은 책은 내가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을 가슴으로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것들이다. 더 좋은 책들은 문 밖으로 나가서 죽어가는 관념들을 펄떡이는 활것로 바꾸라고 끝없이 종용한다.  모르고 있는 개념과 이론을 알게 해주는 책의 효용은 단지 지식의 전달에만 한정된 얘기다. 삶에서 실제 느끼던 것들을 가슴으로, 또한 구체적인 행위와 표현으로 불러일으키는 것이 예술의 근본적 가치이며 진정한 걸작의 속성이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책들의 인기가 좋다. 사람들은 책 안에서 자기들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될 때 동질감을 느끼고 위로를 받는다. 이는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하는 인간의 유약한 본성 탓이다. 위로의 말만 잔뜩 늘어놓지만 마지막까지 신세한탄에 그치고 마는 책이 있고, 그럴듯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사상누각에 불과한 책들도 있다. 읽을 당시에는 자신에게 좋은 책이라고 생각되지만, 그저 책을 읽는 잠깐 동안 받는 자기 위로나 책을 덮으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허망한 관념에 그치고 마는 책들이 많다. 물론 좋은 책임에도 독자의 수준과 상태에 의해 그렇게 오도되는 책들도 많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스스로의 삶을 통해  아직 알아내지 못한 것들은 가슴으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글귀, 울림이 있는 문장은 독자를 번쩍이는 각성과 깊은 사유로 이끈다. 하지만 명언집만으로는 인생을 바꿀 수 없다. 때론 단 한 줄의 글이 큰 울림을 주기도 하지만,  좋은 글귀는 단지 독자를 절정으로 이끄는 역할을 할 뿐이다. 부지불식간에 폭포가 되어 온 마음을 덮친다 한들, 책을 덮고 나서 증발해버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래서 좋은 책은 어느 것이나 예외없이 단지 절반만 좋을 뿐이다.  책 뿐만이 아니다.  대가들이 남긴 모든 예술품과 혼신의 저작들 역시 마찬가지다.

독자가 저자의 목소리에 공명하는 것은 두가지 경우가 있다. 
첫번째는 자신의 감정과 고민에 대한 주파수와 정확히 동조되는 글을 만났을 때다. 독자는 위로를 받고, 글을 통해 다시 한번 자신의 상황을 되새김하고 자신의 생각을 확신한다, 다음의 문장을 예로 들어보자.

"40대 사표를 써라. 직장에서 중역이 되든 나와서 창업을 하든 일단 사표는 써야 한다. 떠남이 목표 일때가 있다. 이때가 그때다. 떠나지 못하면 모욕을 당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40대가 이 문장에 동조가 되었을까? 많은 40대들이 이미 모욕을 당했든 미래에 당할 모욕이 두려워서든 떠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겪고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칼날이 예리하면 예리할수록 가슴으로는 더 깊이 들어온다.

두번째는 자신의 생각을 벗어난 경우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서 생각이 탄생한다는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이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다. 문을 열 때 우리는 문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이 잠겨 있으면 생각하게 된다. 왜 문이 잠겨 있는지,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이지 고민하게 된다. 단순한 예를 든 것이지만, 대가들의 예리함은 우리의 상식밖에 있다. 독자의 생각을 뛰어넘는 사유과 사상이 독자를 덮쳐 뒤흔드는 것이다. 이런 유형은 통찰력이 뛰어난 대가들의 책에서 보는 경우가 많다. 얼핏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관념의 허술한 빈틈으로 지혜의 씨앗이 비수처럼 박힌다.  묵직한 것들은 때론 독자의 사상을 완전히 뒤집는 결과를 낳는다. 달리 표현을 하자면, 사상이 뒤집힌다기보다는 미완성이였던 사상의 고리들이 퍼즐처럼 원래의 자리에 맞춰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떤 경우든지간에 책을 덮고 난 후의 사색과 문밖에서의 실천을 이끌어내는 것들이 좋은 책들이다. 이는 사실 온전히 독자에게 달린 역량의 문제다. 작가는 단지 씨앗을 뿌릴 뿐이다. 씨앗은 가능성일 뿐이다. 발아하여 꽃을 피우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씨앗을 받아들임에 있어 독서의 방법론은 도움이 될 수 있다. 독서는 능동적으로 문자를 해독한다는 점에서 같은 정보를 전달해주는 영상언어보다 지식의 내재화에 대한 우위를 가진다. 더 우월한 방법은 필사다. 해독하여 받아들인 지식을 다시 아웃풋으로 내보내면서 내재화된 지식의 견고화를 도모할 수 있다. 강의노트를 쓰는 이유다. 더 우월한 방법은 자신만의 언어로 다시 쓰는 것이다. 사색과 창작의 프로세스가 적용되므로 지식은 증폭된다. 이것이 바로 책쓰기다. 프루스트는 사람이 무엇을 스스로 느끼는지를 자각하는 방법으로 말하자면, 어떤 거장이 어떻게 느꼈는지를 스스로 재창조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언어로 타인의 사상을 정리할 수 있으면 그 사상은 내 것이 된다. 고 신영복 선생은 고전을 볼 때 처음 텍스트를 읽고, 그 다음 텍스트의 필자를 읽은 다음, 마지막으로 독자 자신을 읽는 삼三독을 해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책쓰기는 삼독을 뛰어넘는 사四독의 방법론이다. 하나의 글보다 한권의 책이 가지는 무게는 결코 두께에만 비례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하나의 글이 모여서 책을 이루겠지만, 하나의 책은 미시와 거시를 모두 포괄한다는 점에서 한편의 글쓰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사四독으로서의 책쓰기를 언급했지만, 당연히 책쓰기는 책읽기와는 다른 분야다. 하지만 독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책쓰기는 저자가 되어 독자의 얘기를 한다기보다는, 독자가 되어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고 보면 된다. 책을 읽는 독자의 관점에서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책을 통해 지혜를 얻는 법이라는 진부하면서도 다소 거창한 제목으로 글을 썼는데 여기에 쓴 내용이 꼭 책에만 해당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제대로 하고, 그로부터 최고의 지혜를 얻으려면 우선 온전히 그 대상에 침잠해야 하고, 얻은 결과를 자신만의 언어 또는 표현방법을 통해  내재화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IP *.70.220.99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