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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9일 10시 30분 등록

편지, 그 아련한 기억들(43번째 칼럼)

11기 정승훈

 

#1

중고등학교 때 국군장병아저씨께 보내는 위문편지는 쓸 말은 없는데 뭔가는 써야하고 안 쓰면 안 되니 숙제 같기만 했다, 매번 비슷한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편지를 받는 군인들도 억지로 쓰는 나만큼이나 별로였겠구나 싶다. 글이란 것이 쓰는 이의 마음이 얼마나 잘 나타나는 지 그땐 몰랐다. 하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닌가 보다. 왜냐 여고생이었던 새언니 친구의 위문편지 덕분에 오빠는 결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꼭 당사자가 아닌 옆 친구와 인연이 되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2

중학교 때 친구가 다니는 교회에 같이 다녔다. 그곳에 교회오빠들이 있었다. 그 중 한 오빠는 엽서보내기가 취미였던 것 같다. 예쁜 그림엽서에 글씨체도 특이했다. 정성이 들어간 글씨체였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왠지 부담스러워서 답장을 하지 않았다. 아니 그 오빠가 싫었던 거다. 하지만 지금도 그 엽서는 많은 편지들과 함께 보관함에 있을 거다. 이상하게 편지, 엽서, 카드는 버려지지가 않는다.

 

#3

1 어느 날 모르는 여학생으로부터 편지 한 통이 왔다. 나를 이름 때문에 남학생으로 오해하고 보낸 편지였다. 그 당시엔 펜팔이란 것이 있었다. 얼굴도 모르면서 편지를 보내고 그러다 사귀기도 했다. 아마 그 여학생도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미지의 남학생에게 보내며 설레는 마음이었을 거다. 어쩌다 내 주소를 알게 되었는지는 편지 내용을 보고 알았다.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한 중학교 동창이 다니는 학교 학생이었다. 내 주소가 적힌 종이를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편지를 보내게 되었단다.

 

처음엔 황당하고 재미있어서 웃다가 어떻게 할까 고민을 했다. 그냥 남학생인척 답장을 보내야하나, 아님 솔직하게 여학생이라고 이야기해야하나. 여학생이라고 밝히면 창피하겠지 싶기도 했다. 그래도 거짓말은 안 될 것 같아 솔직히 여학생이라고 밝히고 그 학교에 중학교 동창이 다닌다는 내용으로 답장을 보냈다. 그 여학생이 답장을 받고 어떤 심정이었을지 짐작이 되진 않는다. 남학생이 아니라 실망했을까. 자신의 무모함이 창피했을까.

30년도 더 지나 자세한 내용까진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기분 상하게 쓰진 않았나보다. 내 답장에 다시 답장이 왔다. 인문계를 진학한 나와 실업계에 다니던 그 여학생은 서로 다른 학교생활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공통의 관심사나 내용이 없어서인지 그러다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내가 남학생이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그 여학생과 약속하고 제과점에서 만나기도 했을 거고 영화도 봤겠지. 여학생은 졸업하고 취직하고 남학생은 대학을 가면서 헤어졌을까. 아님 계속 만나다 군대를 가면서 헤어졌을까. 군대에서 다른 여학생의 위문편지로 새로운 만남을 가졌을까. 알 수 없다.

 

#4

그 서클 선배와는 정작 고등학교 땐 그리 친하지 않았다. 그 선배는 여대를 갔다. 나는 고3의 힘든 시간들을 그 선배와 편지, 엽서를 주고받으며 지냈다. 그런데 그 선배의 남자친구가 친구의 오빠였다. 참 인연이란.

MRA라는 서클은 노래와 율동을 하던 서클이다. 그래서인지 그 선배도, 그 위의 선배도 대학 가서 같은 노래 동아리에 가입을 했다. 그 당시 많은 노래 동아리 학생들은 학생운동을 했다. 그 선배들이 대학에 가서 학생운동을 하고 전교생이 보는 자리에서 삭발까지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곤 덜컥 겁이 났다. 그러다 그 선배가 친구 오빠와 헤어지면서였는지 학생운동 때문이었는지 그즈음 편지가 안 왔던 것 같다.

 

#5

3 담임선생님은 노총각의 영어선생님이셨다. 만우절날 학생을 속이는 선생님이셨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엔 간식을 사와서 아이들 책상에 올려주시던 선생님이셨다.

반 아이들 한 명씩 모두에게 그 당시 유행하던 엽서에 각기 다른 내용으로 글을 써주셨다. 나에겐 야구 모자를 돌려쓰고 있는 아이의 그림엽서에, 내용도 어떤 모습이 그렇게 보였는지 모르지만 보이시하다고 했다.

 

편지를 써서 부치고 다시 답장이 오길 기다리고, 기다림이 지루하고 답답하면서도 설레던 그 느낌들. 아마 편지를 모아놓은 함에 다 있을 편지들. 언제 날 잡아 한 번 꺼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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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1 09:52:47 *.106.204.231

옛 추억을 떠올릴때 편지만큼 확실한건 없네요. 그때 감정을 고스란히 알수 있으니까요. 그런 편지를 왜 버렸나 싶네요.

저도 위문편지를 받아봤답니다. 내용을 떠나서 받는 순간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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