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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2일 22시 31분 등록
2007년6월4일

맑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졌다. 새벽 5시 반인데 밖이 훤하다. 나는 나갈 준비를 하고 전날 싸두었던 노트북과 출장자료와 개인 짐을 들고 공항으로 나섰다. 물론 팔찌도 잊지 않았다. 처음 출장 때 엄마가 주신 것이었다. 그 후 먼 길을 나설 때마다 착용하였다. 마치 나를 지켜주는 징표인 것처럼, 나는 이 팔찌에 기대는 바가 없지 않았다.

공항에 오니 또 설레고 들뜬다. 공항이라는 곳을 오간지 수십 번인데 매번 이러함은 어찌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다.

출국장에서 같은 기수 연구원인 은남 언니와 마주쳤다. 넓은 출국장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약속도 안했던 언니를 우연히 만나다니. 이것도 인연은 인연인가. 그러고 보니 전에도 비슷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갈 길이 바빠 각자의 걸음을 재촉하였다.

중국 심천에 도착하였다. 후끈한 열기가 밀려왔다. 다행히 사무소 기사가 픽업 나와 편하게 이동하였다. 사무실에 도착하여 회의실에서 미팅을 위해 자료를 셋팅했다. 이번 출장의 목적은 현지 직원 프로세스 교육과 VOC 청취였다. 나를 바라보는 여러 사람 앞에서 이야기를 끌고 풀어내는 것은 여전히 부담이었지만, 이전의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행히 어렵고 곤란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외국어로 의사소통하기는 아직 자유롭지 않다. 실력을 더 업그레이드해야 함을 느꼈다.

전에 진행했던 다른 사무소 직원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흥미로웠다. 전의 그곳에서는 동조이던 반대이던 의견이 활발했는데, 여기는 좀 잠잠한 분위기라 순간 당황했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교육 내용도 비슷한데 왜 그런 것일까. 궁금했다.

반응이 어찌되었던 이들은 지금 나의 고객이다. 내 눈 앞에 있는 이들을 고객으로 나는 일을 한다. 고객 감동이라. 나는 어떻게 이들을 감동시킬까. 나는 문득 그간 현지인의 입장에 서 보는 기회가 적었음을 느꼈다.

사무소장님과 짬을 내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의 다른 사무소장님과는 또 다른 의견과 태도를 읽을 수 있었다.

밤이 늦도록 일을 하였다.


2007년6월5일

맑다. 오늘은 개별교육이 있었다. 직원들마다 이해하는 정도와 방식이 달랐다. 궁금해하는 점, 어려워 하는 점도 달랐다. 이렇게 다른 이들을 같이 대할 때와 일대일로 대할 때는 어떤 구별을 두어야 할까. 생각해 볼만하다.

다른 출장자들과 같이 저녁을 먹은 후, 술자리를 마다하고 호텔로 들어왔다. 몹시 피곤하기도 하였지만, 어서 이순신이란 인물을 만나고 싶었다. 남자친구가 참고하라 빌려 준 이순신에 관한 다른 책자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이 날은 밤에 일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시간 잡아 후딱 해치울 심산이었다.

밤에 집에 안부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받으셨다. ‘엄마, 잘 도착해서 잘 지내고 있어요.’, ‘그래, 일 마저 잘 보고 잘 들어오너라.’ 짧은 대화이지만 많은 것이 오간다. 문득, 처음 출장 때 연락을 빨리 안 드려 집에서 안절부절했던 기억이 난다.


2007년6월6일

흐리고 비 오다. 오늘은 한국이 쉬는 날이다. 오전에 일을 마저 보고 천진으로 이동하러 공항으로 갔다. 이륙시간을 얼마 안 앞두고 비가 쏟아졌다. 이륙하려던 비행기가 줄줄이 연착했다. 덕분에 예정시간보다 한 시간 이상 늦게 도착하였다. 점심에 과식을 했나. 속이 몹시 거북하여 준비해 간 약을 먹었다.

천진은 흐렸다. 스모그가 낀 것처럼 뿌옇다. 조금 전까지 있던 심천과 비교하면, 이곳은 오래된 도시임이 단번에 느껴졌다. 그곳의 좀 더 북방화 된 발음에 귀가 즐겁기도 했다.

호텔에 도착하여 일을 마저 하고 난중일기를 읽으려 하였다. 일을 하려면 사내 네트워크망에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왠지 되지 않았다. 이럼 안 되는데.

그 와중에 그곳 사무소장님이 나를 불러내었다. 나는 그 분과 담소를 나누었다. 먼저 다른 두 곳의 의견과 태도가 또 다름이 흥미로웠다.

방으로 돌아와 다시 수차례 연결을 시도하였지만 결국은 되지 않았다. 이 날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시간이 부족한데 속이 좀 상하였다.


2007년6월7일

흐리다. 사무소로 출근하여 교육을 진행하였다. 한국어로 된 텍스트에 한국어로 말을 하니 갑자기 편안함이 밀려왔다. 이곳은 먼저 두 곳과 또 분위기가 달랐다. 연구대상이다.

사무소 식구들과 훠꿔(중국식 샤브샤브로 이해하면 쉽겠다. 매운 맛도 있음.)를 저녁으로 하였다. 즐겼던 음식인데 오랜만에 먹으니 맛났다. 그런데 그 식당의 서비스는 영 엉망이었다. 종업원들은 어떤 재료가 안 되는지 알지 못했고 나오는 속도도 매우 늦었다. 전에는 잘 되던 식당이라던데, 우리가 간 그 날은 손님이 없었다. 필시 서비스 영향이 있었으리라.

늦은 시간에 호텔로 돌아왔다. 결정을 해야 했다. 그 주 말에 있는 꿈벗 전체 모임에 참가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일주일 내내 출장이라 과제를 할 만할 여유가 없다 여겼다. 참가하고 싶었지만 못할 것 같아 모임 준비도 안하였다. 나는 고민 끝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보기로 생각을 다시 바꾸었다. 서둘러 어느 꿈벗과 행사 장소로 같이 이동하기로 약속을 정하였다.

이 날은 밤이 늦도록 일을 하였다.


2007년6월8일

맑다. 그런데 나는 새벽부터 배탈이 났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속을 달래보려 했지만 쉽사리 나을 것 같지 않았다. 기운이 빠졌다. 전 날 먹은 매운 훠꿔가 문제를 일으킴이 틀림없다.

오전에 사무실에서 마저 일을 보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여전히 속은 낫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으려 해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저녁 때 집으로 들어왔다.

책이 이만큼 남았는데, 꿈벗 모임에 참가하고도 과제를 기한 내 마칠 수 있을까.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역시 두 마리 토끼는 안 되는 것이었나. 나는 또 고민고민하다가 과제를 포기하고 꿈벗 모임에 가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마음은 매우 불편하였다. 과제에 해이해지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잡은 것이 그 전 주였다. 그러나 과제는 혼자 시간 내서 할 수 있지만 모임은 그 때가 아니면 없노라 생각하고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나는 남자친구에게 나의 결정을 말하였다. 그는 약간 실망하는 눈치였다. 나에게 최선을 다했느냐 했다. 또 다시 절실함의 문제를 건드렸다. 나는 그가 먼저 나를 이해해주지 않고, 내가 다시 상황 설명을 길게 덧붙여야 함이 못내 야속하였다. 하지만 내 태도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임은 알고 있다. 그 마음은 고맙게 받았다.

부엌으로 나가니 엄마가 음식 준비에 한창이다. 잔칫상 준비하시나? 다음 날 아빠와 군대에 있는 막내 면회를 간다 하시었다. 이것저것 분주하게 챙기시는 엄마의 모습이 즐거워보였다. 그런 엄마를 보는 나도 웃음이 번졌다.

IP *.142.2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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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6.12 04:03:07 *.142.242.43
난중일기의 문체와 분위기를 떠올리며, 일기 써보았습니다...^^
뭔가가 좀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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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06.12 06:34:19 *.128.229.230
오호, 그리하였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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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12 08:01:05 *.72.153.12
남자친구가 책 많이 못 읽었다고 머라고했더니 펑펑 울었다고 전하던데 일기에는 순하게 써있네. '흐르는 눈물을 가눌길이 없었다.' '가소롭다(?)'라고 해버리지...큭큭.(불란 일으킬 의도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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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6.12 08:56:23 *.244.218.10
'흐르는 눈물을 가눌 길이 없었다. 가소롭다'
ㅋㅋㅋ ..
그치? 난 아무래도 너무 착해. 다 좋게 보려 하고..

완. 네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였느냐. 무덤을 판 꼴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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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완
2007.06.12 09:20:23 *.47.187.34
죽여주시옵소서. 뻥이요. 캬캬캬

호정아, 잘 썼다. 시간이 많다고 잘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좋은 글이 나오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점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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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7.06.13 10:09:06 *.152.82.31
완:조선시대 병을 이르는 다른 말의 표현
정:그 병을 다스리는 만호의 별칭
화:완과 병을 잇을 꿩고기의 함경도 사투리를 말함
부:웃고 즐기는 그래서 남들 보기에 매 일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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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동
2007.06.13 20:05:27 *.219.66.78
난 그냥 웃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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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완
2007.06.13 23:56:01 *.147.17.207
ㅋㅋ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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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운
2007.06.17 10:01:31 *.134.133.173
희석이예요.
호정누나. 성공하신 것 같아요. 읽으면서 난중일기가 자꾸 떠오르더라구요. "밤이 늦도록 일을 하였다." 라는 문장은 "동헌에 나가 공부를 본 뒤 활을 쏘았다"라는 문장과 연결되었지요. 그리고, 맑다. 흐리고 비 오다. 등에서도 난중일기의 내음이 흘러나왔지요. 정화누나의 댓글까지 읽고 나니, 난중일기에서 흘러나온 내음 뿐만 아니라, 누나에게서 흘러나온 착한 향기까지 물씬 풍겨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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